(행전10:14) 고정관념과 성령의 질서
(행10:34) 베드로가 입을 열어 가로되 내가 참으로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취하지 아니하시고 각 나라 사람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받으시는 줄 깨달았도다
오늘 우리가 함께 살펴 볼 말씀은 참으로 중요한 내용이다. 사도행전을 공부하면서 우리가 먼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우리의 믿음생활의 현주소에 관한 것이다. 사도행전에는 초대교회의 출발과 함께 성도의 믿음 생활의 기본 원리에 속한 모든 성령의 질서들이 제시되어 있으며 또한 현실 속에 발생될 많은 문제들이 제시되고 있으며 그 문제들을 해결하는 하나님의 지혜가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원리는 오늘날 우리 교회와 성도의 믿음생활에 이르기까지 그대로 적용되는 하나님의 지혜로서 만약 오늘 우리의 믿음생활이 이에 준하지 않고 있다면 그것은 스스로 자신의 믿음생활의 현실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오늘 우리는 사도행전 10장에서 베드로 사도가 발견한 복음 사역자들 마음 가운데 자리잡고 있는 잘못된 고정관념과 인식들에 대한 하나님의 가르침과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의 복음전파를 위한 성령의 질서를 살펴 보게 된다.
“그가 경건하여 온 집으로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더니”(2)
우리는 앞에서 하나님을 대적하던 사울을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신 과정과 유대를 떠나 룻다와 욥바 지역의 성도들을 볼아보는 사도 베드로의 사역을 살펴 보았다. 바야흐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를 거쳐 주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땅끝’ 곧 이방인의 세계로 진입하기 위한 준비가 시작되고 있는 것이다.
9장 36절 이후에는 사도의 수장 베드로의 놀라운 사역들이 소개되고 있다. 팔 년 동안 중풍으로 누어있던 애니아의 일으킨 일과 또한 이미 병들어 죽은 욥바의 여제자 다비다를 다시 살린 일은 초대교회 사역 가운데 나타난 또 다른 이적이었다. 성경은 이로서 온 욥바 사람이 주를 믿었다고 기록하였다.
A. 가이샤라 고넬료 백부장
1절에는 ‘가이샤라의 이달리야 부대의 백부장 고넬료’가 소개되고 있다. 가이샤라는 헤롯대왕이 로마 황제 아구스토에게 개축하여 바친 지중해 연안의 항구도시로서 로마 총독부가 설치된 곳이다. 이곳은 팔레스틴의 제일 큰 도시었다. 또한 이달리야 부대란 로마총독에 소속된 4개의 예비부대 중 하나로서 이탈리아 사람들을 중심으로 편성된 1000명 정도의 규모의 부대이다. 그 중에 고넬료는 100명 정도를 담당하는 로마군대의 중추 요원인 책임 장교(Century)로서 오늘날 중대장과 같다 하겠다.
우리는 성경에서 복음을 받아드렸던 몇 사람의 경건한 백부장을 보게 된다. 그 하나는 병든 부하를 살리기 위하여 예수께 장로들을 보냈던 가버나움의 백부장(눅7:1-10)이며 두번째는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실 때 ‘그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라’(마27:54)한 백부장이며 세번째는 오늘 이달리야 백부장이며 또 한 사람은 ‘율리오’ 백부장(행27:1,3)으로 바울을 로마로 압송한 사람이다.
흥미로운 것은 그가 이방인임에도 불구하고 온 집으로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였다는 것이다. 우리는 고넬료가 어떻게 하나님을 믿게 되었던지 알 수 없으나 그는 그 지역을 담당하며 신실한 유대인들을 통하여 여호와 하나님을 믿게 되었던 것 같다. 더욱이 우리를 놀랍게 하는 것은 고넬료 백부장은 많은 백성들을 구제하며 항상 기도하였다는 것이다. 그의 믿음의 행위는 오늘날 그리스도인이라 칭하는 우리를 부끄럽게 한다.
B. 환상 중에 하나님의 사자 현신
어느 날 오후 3시경 기도 중인 백부장 고넬료에게 환상 중에 하나님의 사자가 나타나 “고넬료야 네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하여 기억하신바 되었으니 내가 지금 사람을 욥바로 보내어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청하라 저는 피장 시몬의 집에 우거하니 그 집은 해변에 있느니라”(3-6) 전하였다. (여기서 피장이란 가죽 세공업자를 말한다.)
천사가 전한 메시지 가운데 ‘네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되었다’ 라는 말 가운데 과연 고넬료는 어떤 기도를 하나님께 드렸을까 궁굼하다. 그가 구제에 힘을 썼다는 것으로보아 개인적인 문제를 가지고 기도한 것은 아닐 것이다. 구제 가운데 나타난 많은 사람들의 고통의 문제를 갖고 기도했을 것이 틀림없다. 또한 베드로를 청하라는 메시지로 보아 하나님을 경외하는 고넬료는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자 하는 소망 속에서 갈급한 영혼의 인도자를 만날 수 있게 해달라고 청하였을 것이다.
또한 여기서 우리가 다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주의 천사가 어떤 일을 지시할 때 그 지리적인 상황과 인적 상황을 상세히 전달한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빌립집사를 에디오피아 내시에게 이끌어 가실 때에도, 교회를 박해하던 사울을 부르실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성령은 어떤 일을 지시하실 때에 그 위치와 환경과 사람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충분히 이해 할 수 있도록 지시하셨다.
오늘날 성령 세례를 받았다는 우리의 경우는 어떤가 과연 우리는 고넬료와 같은 환상적인 체험을 하고 있으며 또 성령으로부터 어떤 확실한 지시를 받고 있는가? 불행히도 대부분의 사람들의 답변은 ‘NO’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기록들은 과거에 있었던 한 사람의 경험과 체험으로 끝나는 것일까? 그렇다면 성경은 우리에게 역사책일 뿐이다. 나는 성경에 기록된 일들은 지금도 동일하게 일어날 것이라 생각된다. 그리고 우리 주변의 수많은 경건한 사람들은 ‘ YES’라 답하고 있다.
내가 43살 때였다. 그때 나는 동경에 있었고 동경 순복음 교회에 출석하며 신학을 하고 있었다. 어느 날 나는 내 인생의 가장 고통스런 문제 곧 숙명적이라 여겨왔던 동성애적 문제가 극적으로 해결되는 실제적 체험을 하였다. 내 눈 앞의 환상 속에서 하늘이 열리며 43년간 나를 지배하던 더러운 영이 마치 거대한 ‘토네이도’(tornado)처럼 내 몸에서 빠져나갔다. 그 순간을 표현하라면 환상 중에 하늘이 열렸다고 말할 수 밖에 없다. 그리고 나는 태초의 나의 몸으로 돌려졌다.
그후 나는 내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 알지 못하고 있었다. 내 생각은 신학교를 졸업하면 예정했던 대로 순복음 교회의 사역자가 되어 헌신하는 것이었다. 나를 위해 기도하던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고 나 또한 다른 변동을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금요일 오후 신학교에 가려고 준비를 하기 위해 세면실에서 양치를 하는 나에게 성령께서 말씀하셨다. 그때 나는 사도행전 7장을 읽으며 창세기12장과 여호수아 24장에 기록된 아브라함의 부르심과 순종에 대한 말씀을 묵상하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성령께서 ‘아브라함의 아비 데라가 강 저편에 거하여 다른 신을 섬겼으나 내가 너희 조상 아브라함을 강 저편에서 이끌어 내어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였듯이 내가 너를 인도하리라’(수24:2,3) 하셨다. 나는 양치하던 손을 멈추고 ‘주여 그곳이 어디입니까?’ 물었다.
그때 주의 영이 내게 ‘이미 그가 너를 불렀으니 그 곳에서 내가 네 갈 곳을 알리라’ 하셨다. 그후 나는 주의 말씀을 따라 동경 호라이즌 채플로 옮겼고 6개월 후에 미국 싼타바바라 갈보리채플에서 온 리키 라이언 목사를 통해 목사 안수를 받고 한국으로 나왔다. 나는 그때부터 내 앞에서 급하게 흐르는 강물을 보았다.
II. 베드로의 깨달음
“이르되 유대인으로서 이방인을 교제하는 것과 가까이 하는 것이 위법인 줄은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께서 내게 지시하사 아무도 속되다 하거나 깨끗지 않다 하지 말라 하시기로”(28)
A. 베드로의 체험
이때 베드로는 욥바의 가죽세공업자 시몬의 집에 머물고 있었다. 스데반 집사 순교 이후 유대인의 예루살렘 교회 박해로 성도들은 여기저기로 흩어졌고 흩어진 성도들을 돌보아야 할 사도의 수장으로서 여러 가지 책임이 막중하였을 것이다.
고넬료가 사람을 보낸 후 이튿날 되던 날 정오쯤 시장기를 느낀 베드로는 음식이 준비되는 동안 기도를 하러 옥탑으로 올라갔다. 시장기가 동해서 인지 갑자기 하늘이 열리며 네 귀가 매인 큰 보자기 같은 한 그릇이 땅에 내려졌는데 그 안에는 땅에 기는 각색 네 발 가진 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에 나는 것이 있었다. 그때 하늘로서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 먹어라” 하는 소리가 났다. 이에 놀란 베드로는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속되고 깨끗지 아니한 물건을 내가 언제든지 먹지 않았습니다” 답하였다.
이 일은 베드로에게 있어 참으로 난감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는 태어나면서부터 유대인으로서 그의 조상들의 가르침을 따라 율법이 금한 더러운 짐승들을 먹지 않았다. 그것은 이제 율법을 떠나 거룩한 하나님의 의로운 백성의 믿음의 토대였으며 거룩한 생활습관이었던 것이다. 그것들을 보는 순간 베드로는 섬 짓 놀랐을 것이다. 그런데 잡아 먹으라니 이것은 어쩌면 참을 수 없는 모욕이다.
그때 다시 하늘로부터 “하나님께서 깨끗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는 소리가 들렸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이런 일이 세 번 있은 후 그 그릇이 하늘로 올리워 갔다는 것이다. 결국 베드로는 세 번이나 천사와 실갱이를 버린 것이다. 참으로 베드로의 완강한 고집을 알만하다. 베드로가 ‘주여’ 하고 답한 것으로 보아 그는 분명 자신에게 말한 분이 누구인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세 번이나 그의 명령을 완강히 거부할 수 있단 말인가?
여기서 우리는 사도 베드로의 마음 속에 자리잡고 있었던 고정관념을 발견한다. 물론 베드로 자신은 예수 그리스도의 종으로 진리의 복음을 위하여 부름을 받은 사도의 수장이다. 그는 3년 동안 주님을 섬기며 자신을 깨뜨리기 위한 많은 시련과 시험을 겪었었다. 이미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를 맡은 사도의 수장으로서 교회에 발생한 많은 문제들을 해결하였고 앉은뱅이와 중풍병자를 일으키고 죽은 도르가를 다시 살려낸 이적들을 손수 체험한 바 있다.
그는 스스로 자신은 완벽한 그리스도의 사도로서 부족함이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마음 속에는 그도 깨닫지 못한 깨어낼 수 없는 고정관념이 있음을 알지 못하고 있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이방인에게 전파되어야 한다는 복음의 진리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은 익히 잘 알고 있었지만 그의 마음 속에는 이방인에 대한 고정관념이 돌덩이처럼 굳게 자리잡고 있었다. 그것은 자신도 알지 못했던 떼어 낼 수 없는 의식의 한 부분이었으며 생활이었다.
이처럼 우리는 우리 속에 자리잡고 있는 완고한 마음을 보게 된다. 때때로 우리의 고집은 쇠심줄보다 더 질겨서 천사와 다투던 야곱처럼 심줄이 위골되기까지 절대로 물러서지 않는다. 이것으로 우리는 인간이 하나님의 명령을 어길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사람이 내 말을 훼방할 수 있으나 성령을 훼방하는 자는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서도 사함을 얻지 못하리라’ 하셨다. 이것은 인간이 성령의 말과 인도하심을 거역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이것으로 우리는 어느 교단이 고집하는 불가항력적 은혜와 구원의 예정설이 비성경적임을 알 수 있다.
환상에서 깨어난 베드로는 환상의 일들이 무슨 일인가 마음에 의심을 갖고 있던 중 마침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이 시몬의 집에 도착하여 베드로를 찾고 있었다. 이 때 성령이 베드로에게 “두 사람이 너를 찾으니 일어나 내려가 의심치 말고 함께 가라 내가 저희를 보냈었다”하신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베드로는 이 때 그 환상에 대해 골돌해 있었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가 깨닫지 못한 일들에 대하여 골돌할 때 생활 속에 접목되는 일로서 깨우침을 받을 때가 있다. 나는 가끔 성경을 읽다가 그 말씀의 뜻을 깨닫지 못해 의문에 쌓여 그 말씀에 골돌할 때가 있다. 어떤 때는 자면서도 그 말씀에 매여 있을 때가 있다. 그러던 중 어느 날 갑자기 생활 속에 부닥친 사람들과의 만남 속에서 그 해답을 발견하게 된다. 나는 그때서야 아하! 바로 이것이였구나 하고 무릎을 치며 기뻐하게 된다.
B. 베드로의 방문
성령의 말씀을 받은 베드로는 욥바에 있는 믿는 형제들과 함께 이튿날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을 따라 가이사랴의 고넬료 집으로 갔다. 그때 고넬료는 일가와 가까운 친구들을 모아 베드로를 기다리고 있었다. 베드로가 집에 도착하자 고넬료가 일어나 베드로의 발 앞에 절을 하였다. 절을 한다는 것은 신이나 아니면 최고의 권위자에게 표하는 절대적 순종의 표시다.
이에 베드로는 놀라서 말리며 ‘나도 사람이다’ 말하고 모인 사람들 속으로 들어가 “유대인으로서 이방인을 교제하는 것과 가까이 하는 것이 위법인 줄은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께서 내게 지시하사 아무도 속되다 하거나 깨끗지 않다 하지 말라 하시기로 부름을 사양치 아니하고 왔노라 묻노니 무슨 일로 나를 불렀느냐” 하였다.
여기서 아직도 우리 의식 속에 굳게 자리 잡고 있는 다른 민족에 대한 나쁜 의식 곧 고정관념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일본인에 대하여는 팔백만 귀신에 사로잡힌 더러운 사람들로 우리 민족을 38년간 괴롭힌 악한 백성들이라 생각한다. 또한 중국과 베트남과 타이와 티벳사람에 대한 의식은 곱지 못하다. 미국과 유럽사람과 같은 서방세계 사람을 대하는 우리의 마음과 우리보다 못사는 아프리카나 서남 아시아 사람들을 생각하는 우리의 고정관념들은 복음전파의 큰 장애물이 아닐 수 없다.
III. 베드로의 메시지
“모든 백성에게 하신 것이 아니요 오직 미리 택하신 증인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일어나신 후 모시고 음식을 먹은 우리에게 하신 것이라”(41)
A. 예수 그리스도의 화평의 복음
고넬료로부터 성령께서 인도하신 자초지종을 들은 베드로는 “내가 참으로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취하지 아니하시고 각 나라 사람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받으시는 줄 깨달았다” 말하였다.
이 세상은 베드로가 환상 중에 본 바와 같이 각양 각색의 사람들이 살고 있다. 생김새와 언어와 풍습과 문화 그리고 철학과 이념에 이르기까지 서로 화합할 수 없는 상반된 나라와 민족들이 서로 대적하고 있다. 이러한 국가적 환경 속에서 사람들은 서로 자기의 유익을 따라 자기가 이해할 수 있는 범위를 설정하고 조건적 화합을 하게 된다.
계속하여 베드로는 “만유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화평의 복음을 전하사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보내신 말씀 곧 요한이 그 세례를 반포한 후에 갈릴리에서 시작되어 온 유대에 두루 전파된 그것을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붓듯 하셨으매 저가 두루 다니시며 착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자를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34-38) 하였다.
여기서 베드로는 화평의 복음을 증거하고 있다. 화평은 평안을 의미하며 평안은 개인 뿐 아니라 공동체 모두의 육체적 평안은 물론 정신적인 완전한 상태로서 경제적 번영에서 정치적 번영에 이르기까지 완전한 상태를 의미한다. 이러한 평안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으로 화평은 이스라엘 민족의 기원이며 그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숙원이기도 하다. 성경은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안이라’(요20:19) 기록하였으며 이것은 오직 그리스도와의 관계에서만 성립되는 은혜이다(엡2:19).
B. 사도의 택하심과 성령세례의 정의
베드로의 메시지는 이제 복음전파와 성령의 세례의 정의를 전하고 있다. 그것은 사도의 택하심으로부터 시작된다. “우리는 유대인의 땅과 예루살렘에서 그의 행하신 모든 일에 증인이라 그를 저희가 나무에 달아 죽였으나 하나님이 사흘 만에 다시 살리사 나타내시되 모든 백성에게 하신 것이 아니요 오직 미리 택하신 증인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일어나신 후 모시고 음식을 먹은 우리에게 하신 것이라”(39-41)
“우리를 명하사 백성에게 전도하되 하나님이 산 자와 죽은 자의 재판관으로 정하신 자가 곧 이 사람인 것을 증거하게 하셨고 저에 대하여 모든 선지자도 증거하되 저를 믿는 사람들이 다 그 이름을 힘입어 죄사함을 받는다 하였느니라”(42) 증거하였다.
여기서 우리는 복음전파와 관련된 중요한 메시지를 발견하게 된다. 그 하나는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는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주께서 진리의 복음을 사도들에게 맡기셨다는 것이다. 이것은 복음의 진리가 외곡되지 않고 땅끝에 이르기까지 온전하게 전파하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이며 성령의 역사의 질서이다.
나는 베드로의 메시지 속에서 그리스도의 구원의 메시지가 ‘모든 백성에게 하신 것이 아니요 오직 미리 택하신 증인’ 곧 ‘우리를 명하셨다’는 말씀에 대하여 동의하며 감사한다.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모든 사람을 구원하는 진리의 복음은 악한 자들에 의해 파괴되고 외곡되어 땅끝에 이르지 못하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IV. 성령의 임하심(44-48)
“이에 베드로가 가로되 이 사람들이 우리와 같이 성령을 받았으니 누가 능히 물로 세례를 줌을 금하리요 하고”(47)
이제 우리는 고넬료와 그의 집안에 임하는 성령의 역사를 보게 된다. 44절에는 “베드로가 이 말을 할 때에 성령이 말씀을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왔다”고 기록되었다. 여기서 베드로는 성령을 받으라 소리를 지르지도 않았다. 베드로가 진리의 복음을 전하자 그 메시지를 듣는 모든 사람들 위에 성령이 임한 것이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자 그들은 방언을 말하여 하나님을 높이기 시작하였다. 이를 본 베드로와 함께 욥바에서 내려 온 할례받은 유대인 형제들이 보고 놀랐다. 이것은 그들도 베드로와 같이 이방인에 대한 고정관념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아직도 믿지 않는 유대인 마음 속에 사로잡은 완악한 마음이다. 이 마음을 깨뜨리기 위해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신 것이다.
이에 베드로가 “이 사람들이 우리와 같이 성령을 받았으니 누가 능히 물로 세례를 줌을 금하리요” 말하고 그들에게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었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한번 침례에 대하여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고넬료 사람들은 이미 하나님을 믿고 있었고 베드로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진리를 터득하고 성령의 세례를 받았다. 그런데 왜 베드로는 구태어 그들에게 침례를 베풀기를 주저하지 않았을까? 이것은 그들이 모두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한 지체가 되는 의식이며 사도들에게 명하신 그리스도의 명령인 것이다.
오늘날 우리 한국교회는 어떠한가? 우리는 모두 이방인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을 받은 하나님의 성도이다. 그런데 아직 우리는 성령세례와 침례에 있어 초보적인 입장에 놓여 있음을 알 수 있다.
어떤 이들이 말하는 성령은 지극히 기초적인 성경적 원리를 무시하고 있으며 누가 보아도 성령의 역사가 아님을 알 수 있다. 또한 한국교단을 대표한다는 어느 교파는 아직도 침례에 대하여 부정적인 생각을 갖고 있으며 약식 세례로 그 의식을 행하고자 한다. 그러나 나는 여기서 이제라도 우리는 모두 성경의 가르침으로 돌아 가야 할 것은 제안한다.
주께서 우리에게 오실 날이 가까웠기 때문이다. 성경은 믿음의 결국은 영혼의 구원이라 기록하였다. 그 구원에 관한 기초와 질서와 완성의 토대가 모두 성경에 기록된 것이다. 이 말씀이 우리와 또 이 말씀을 믿는 모든 사람들을 넉넉하게 구원하실 것이다.
주님 감사합니다. 이제 우리로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도를 깨닫게 하시고 이제라도 우리로 하여 그리스도의 온전한 성도로서 그 약속의 나라에 들어가게 하소서. 주 예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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