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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11:23) 그리스도인의 정의

이요나 2006. 11. 30. 18:42

(사도행전11:23) 그리스도인의 정의

 

(행11:23)저가 이르러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하여 모든 사람에게 굳은 마음으로 주께 붙어 있으라 권하니

 

오늘 우리는 사도행전 11장에서 성경에서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는 단어를 발견하게 된다. 그리스도인이란 크리스챤을 말하는 것으로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룬 지체를 의미한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에 속한 사람, 그리스도의 것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11장은 가이사랴 지방에서 일어난 고넬료 집안을 구원한 문제로 인한 할례자들의 논쟁과 베드로와의 증언으로 시작된다. 서두에서 베드로는 10장에서 언급된 자신이 욥바와 가이사랴에서 체험한 일들을 다시 증거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성경에서 같은 내용이 다시 반복되어 나올 때에는 이 내용이 우리에게 전달하는 메시지가 상당히 중요하다는 것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그러므로 오늘 11장의 내용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의미가 큰 것을 기억해야 한다.

 

따라서 오늘 우리는 본문을 통하여 그리스도인의 정의를 다루면서 10장에서 베드로가 체험한 일들 곧 베드로가 이방인들과의 함께 한 식사의 문제를 왜 다시 11장에서 거론 되고 있는가에 초점을 맞출 필요가 있다.

 

후일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사도된 베드로로서 유대인의 구습을 버리지 못하고 안디옥교회에서 이방인과 함께 먹다가 유대에서 내려온 할례자들의 눈을 피하여 물러선 것을 책망하였다. 여기서 바울은 그가 할례자들을 두려워하여 떠나 물러가매 남은 유대인들도 저와 같이 외식하므로 바나바도 저희의 외식에 유혹되었었다(갈2:12,13) 증거하였다.

 

이 말씀 속에서 우리는 오늘 그리스도인이라 칭하며 땅끝까지의 복음전도를 표방하는 우리는 우리 보다 못한 이방인들에 대한 편견된 마음을 갖고 있지 않는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또한 나와 다른 믿음을 가진 설혹 아직 깨닫지 못한 연약한 믿음을 가진 사람들에 대한 경멸감 속에 스스로 자신의 믿음을 높이는 우월감을 갖고 있지 않는가 생각해 보아야 한다. 만약 그렇다면 당신은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그러한 마음은 아무리 반석 같은 믿음을 가진 택한 종들이라 해도 베드로와 같이 교회와 성도들을 외식케 하는 유혹의 누룩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I. 이방인의 구원과 신학적 논쟁(1-18)

하나님이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주신 것과 같은 선물을 저희에게도 주셨으니 내가 누구관대 하나님을 능히 막겠느냐(17)

 

A. 유대인들의 힐난(1-3)

11장 서두에는 가이사랴 고넬료의 집안을 구원하고 예루살렘에 돌아 온 후 베드로의 증언으로 시작된다. 할례자들이 반발하고 일어나 베드로가 이방인의 집에 들어가 그들과 함께 식사한 일을 문제 삼았다. 

 

여기서 할례자들이란 바리새인과 제사장 중에서 주께 돌아 온 사람들을 말한다. 그들은 성령강림으로 예루살렘의 교회에 나타난 이적들을 보고 전향한 유대인들이었다. 그들의 숫자가 많아지자 그들은 사도들과 동등한 위치에서 교회의 지도자로 자청하기 시작했다(행6:7). 결국 이 일은 후일 이방인 구원에 관한 커다란 신학적 논쟁의 실마리가 되었다(행15:1,5).

 

유대인에게 있어 이방인과의 식사의 문제는 율법으로 금해진 것이다. 주님의 생전에도 예수님과 제자들이 레위를 제자로 삼고 그의 집에 들어가 함께 식사를 한 일을 가지고 바리새인들이 일어나 어찌 너희가 죄인과 함께 밥을 먹느냐 하고 힐난하였다. 이 때 주님은 의원은 병자에게 필요한 것이라 하시며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하셨다. 

 

이와 같이 이방인들과의 식탁을 함께 하는 것은 유대인에게 있어 하나님의 거룩한 제사장 나라라는 명분을 무시하는 것과 같았다. 조상으로부터 택함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이란 자존심에 관한 문제였다. 그들이 비록 나사렛 예수를 메시야 곧 그리스도이심을 인정하고 그를 주로 믿더라도 조상으로부터 지켜 온 율법은 그대로 갖고 싶었던 것이다. 이러한 마음이 사도된 베드로의 마음 속에까지 굳게 남아 있었기 때문에 주님은 베드로의 완고한 마음을 깨뜨리기 위해 세번이나 같은 환상을 보이시고 그를 고넬료에게 보내셨던 것이다.

 

B. 베드로의 증언(4-17)

유대의 할례자들의 논란에 휩쌓인 베드로가 일어나 욥바에서 체험한 환상과 성령의 인도로 가이사랴의 고넬료 백부장의 가솔들에게 내려가 그들 중에서 있었던 일들을 진솔하게 증거하기에 이르렀다.

 

베드로는 그들에게 욥바에 있을 때 기도 중에 하늘로서 드리운 보자기 같은 그릇에 네 발가진 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의 나는 것을 보았는데 하늘로서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 먹으라는 소리가 있어 주여 그럴 수 없습니다. 속되거나 깨끗지 아니한 물건은 언제든지 내 입에 들어간 일이 없습니다 대답하였더니 또 하늘에서 두번째 소리로 하나님이 깨끗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말라 하셨다.

 

이 일이 세 번 있은 후 깨어나니 고넬료가 보낸 세 사람이 집 앞에 와 있었더니 성령께서 아무 의심 말고 함께 가라 하시어 여섯 형제들이 함께 고넬료 집에 가니 고넬료가 말하기를 천사가 내 집에 서서 네가 사람을 욥바로 보내어 베로로라 하는 시몬을 청하라 그가 나와 네 온 집의 구원 얻을 말씀을 네게 이르리라 증거하였다.

 

이에 내가 그들 중에 서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말씀을 전하기 시작하였을 때 성령이 저희기에 임하기를 우리에게 하신 것 같았다. 이때 주께서 요한은 물로 세례 주었으나 너희는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신 말씀이 생각났다.

 

 그런 즉 하나님이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주신 것과 같은 선물을 저희에게도 주셨으니 내가 누구관대 하나님을 능히 막겠느냐 증거하였다. 그로 하여 할례자들은 더 이상 반론을 제기하지 못하고 교중 사람들이 모두 일어나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을 얻는 회개를 주셨다 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었다.

 

II. 바나바의 권고 (19-24)

바나바가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자라 이에 큰 무리가 더하더라(24)

 

A. "굳은 마음 의 필요

스데반의 일로 예루살렘과 유대에 핍박이 일어나자 수많은 성도들이 환난을 피하여 베니게와 구부르와 안디옥으로 흩어졌다. 이들이 가는 곳마다 예수의 이름을 전파하여 구브로와 구레데와 안디옥에 살던 헬라인들이 주를 믿게 되었다.

 

이러한 소문이 예루살렘교회에 들리자 바나바를 안디옥으로 보내게 되었다. 예루살렘교회에서 다른 사도를 제쳐놓고 바나바를 파송한 것은 그가 착하고 성령이 충만하고 믿음이 신실하여 선한 그리스도의 마음을 따라 사람들을 위로하는 특별한 은사가 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가 구브로에서 태어난 사람으로 헬라 문화에 익숙하였기 때문이었다.

 

오늘날 우리나라 많은 교회에서 동남아 여러 곳으로 선교사를 많이 파송하고 있다. 그런데 그 파송의 근거가 성경적이지 못하고 각 사람의 소명이라는 명분에 맞추고 있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본문에서 왜 예루살렘교회에서 왜 수많은 사람들을 제치고 바나바를 안디옥에 파송하였는 가를 상고하여 선교사 파송의 근거를 삼아야 할 것이다. 성경은 바나바가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자라 이에 큰 무리가 더하더라(24) 기록하였다.

 

안디옥에 들어간 바나바는 그들 가운데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하여 모든 사람에게 굳은 마음으로 주께 붙어 있으라(23) 권하였다. 오늘 이 말씀은 종말을 사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과연 오늘날 우리는 온전한 마음으로 주께 붙어 있는가 생각해 보아야 겠다.

 

먼저 우리가 주께 붙어 있기 위해서는 굳은 마음이 필요하다. 이것은 비장한 결단의 마음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사실 사단의 세력 속에 살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서두에서 살펴 보았듯이 예루살렘교회 조차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의 복음을 외곡하려는 할례자들과 극단적 대립 속에 있었다.

   

이처럼 그리스도인의 삶을 사는 것은 쉽지 않다. 세상과 육신과 마귀를 대항하여 싸워야 한다. 사단이 아직 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단은 재물과 명예와 지위를 이용하여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그 영혼을 파멸시키고 있다.

 

사람들은 세상의 철학을 격언으로 삼아 출세와 재물을 향하여 달려가고 있다. 그들은 돈이면 무엇이든지 해결할 수 있다 능력이 있을 때 돈을 많이 벌기를 힘쓰라 하며 내일이면 죽을 것이나 오늘 실컷 먹고 마시며 즐기자 유혹한다. 이것은 모두 주님의 가르침과 상반된다, 주님은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셨으며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하셨다.   

 

B. 육신은 영적 삶과 전쟁 중이다

성경은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하느니라 기록하였다. 육신은 연약한 우리의 마음을 부추겨 세상과 짝짓게 하고 세상의 풍습에 빠져 육신적 크리스챤의 길로 이끌어 간다. 주님은 잠든 베드로에게 네가 한 시간동안도 나와 함께 있을 수 없더냐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셨다. 이처럼 세상은 우리를 넘어뜨리고자 한다.

 

C. 마귀의 유혹

또한 마귀는 우리의 약점을 들춰내어 주님 앞에 다가서지 못하게 하고 있다. 하나님은 뱀이 너의 발뒷굼치를 물어 넘어지게 할 것이라 하셨다. 또한 시편기자는 나를 넘어 뜨리는 자가 나와 함께 밥을 먹던 친구라 하였다. 그는 진리를 왜곡하여 거짓말로 우리를 미혹한다. 성경은 옛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간이라고는 하는 온 천하를 꾀는 자라(계12:9) 기록하였다. 이처럼 사단은 광명한 모습으로 우는 사자와 같이 두루 삼킬 자들을 찾고 있다.

 

D. 우리는 결심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우리는 마음을 굳게하여 늘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을 지켜 그리스도의 영광에 들어가고자 애를 쓰고 있다. 날마다 새벽기도를 나가기도 하고 주일마다 열심히 봉사를 하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는 눈 앞에 다가오는 문제들 속에서 넘어지고 결국 세상과 타협을 하게 된다. 이로서 우리는 늘 자신이 믿음 없음을 한탄한다. 과연 무엇이 문제일까? 내게 무엇이 부족한 것일까?

 

오늘 우리는 바나바의 가르침대로 굳은 마음으로 주를 떠나지 말아야 한다. 이것은 나의 굳은 의지를 말한 것이다.  다윗은  내가 결심하고 입으로 범죄치 아니하리이다 하였으며 다니엘은 뜻을 정하여 왕의 진미로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기로 했음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과 같이 굳건한 마음을 지키지 못하고 작심삼일 만에 넘어져 버린다. 우리가 빈번히 그 결심한 바를 지키지 못하는 이유중의 하나는 그것이 감정적인 결정이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들의 마음의 굳은 결심이 아니라 이지적인 결정이었던 것이다.

 

바울은 우리에게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른다(롬10:10) 가르치고 있다. 이것은 우리 마음의 믿음이 머리로 믿는 것보다는 훨씬 더 온전한 믿음이기를 가르친다. 그러나 머리로 믿는 것과 마음으로 믿는 것의 차이는 한치 차이다. 이것의 차이는 "나는 그것을 다시는 하지 않겠다 하는 것과 내가 살아있는 동안 절대로 그것을 하지 않기로 마음을 작정했다 고 하는 말과 다른 것과 같다.

 

III. 주께 붙어 있기 위한 방법은 무엇인가? (25-30)

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가서 만나매 안디옥으로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 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서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행11:25,26)

 

A. 생명의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바른 지식

흥미롭게도 25절에는 바나바가 다소에 머물고 있는 사울 곧 바울 사도를 찾으러 간 내용이 기록되었다. 이때 바울은 예루살렘에서 환영을 받지 못하고 아라비아를 거쳐 그의 고향 다소에서 7년동안 머물고 있었을 때였다.

 

그러나 우리가 주목하여야 할 것은 바나바가 사울을 데리러 다소에 내려간 일이다. 바나바가 안디옥에 들어서자 그의 권면으로 안디옥 사람이 몰려들어 큰 무리를 이루었는데 왜 그는 사울을 데리러 다소로 내려 간 것일까?

 

아마 우리 같았으면 절대로 그러지 않았을 것이다. 바나바는 이미 예루살렘교회에서 인정받은 지도자로서 성도들 사이에 권위자 곧 바나바라는 칭송을 얻고 있었다. 더욱이 구브로에서 태어난 그는 헬라어와 풍습과 문화에 익숙하여 안디옥의 성도들을 이끌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그러나 바나바는 큰 무리가 모여들면서 자신의 한계를 느끼기 시작했다. 그들에게 굳은 마음으로 주께 붙어 있으라 권면하였지만 인간의 의지로 믿음을 견고하게 할 수 없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는 그를 위하여 주께서 각 사람에게 성령을 부어주신 것을 알고 있었다. 자신은 위로와 권면의 은사가 있었으나 성도들의 믿음을 견고케 하여 주께 붙어 있게 할만한 믿음이 허락하지 않음을 알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 속한 것이기 때문이다.

 

바나바는 오직 구원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음을 알고 있었다. 예수께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베드로는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라고 증거하였으며 바울은 나님은 한 분이시오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하고 증거했다. 그러므로 그는 성도들이 굳은 마음으로 주께 붙어 있기 위해서는 성도의 믿음이 그 마음으로부터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야 된다는 진리를 깨닫게 되었다.

 

성경은 주 여호와를 아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다 기록하였다. 그를 위해서 태초에 말씀되신 예수께서 육신으로 오신 것이다(요1:1)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1:14) 증거하였다.

 

또한 주님은 십자가를 눈 앞에 두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아버지께 기도하여 나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말씀들을 저희에게 주었으며 저희는 이것을 받고 내가 아버지로부터 나온 줄을 참으로 아오며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줄도 믿었사옵나이다 (요17:8) 하셨다. 삼년 동안 주님은 성경의 말씀을 그들에게 모두 가르치셨던 것이다.

 

계속하여 주님은 제자들을 위해 기도하여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입니다(요17:17) 중보하셨다. 지금도 주님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가 거룩해 지기를 원하신다.

 

바울은 에베소 장로들에게 너희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좇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 날 줄을 내가 아노라(행20:30) 경계하며 지금 내가 너희를 주와 및 은혜의 말씀께 부탁하노니 그 말씀이 너희를 능히 든든히 세우사 거룩케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하시리라(행20:32) 권고 하였다.

 

B. 그리스도인의 실패의 원인

많은 사람들이 크리스천의 삶을 시작했으나 후에 믿음에서 떨어져 나갔다. 이미 우리는 성경에서 그런 사람들을 만이 알고 있다. 가룟 유다는 주께서 부르신 열두 사도 중 한 사람이며, 니골라는 초대교회의 성령이 충만한 일곱 집사 중 한 사람이지만 후일 니골라 당의 교주가 되었고(계2:2,6) 바울의 제자 데마는 세상을 사랑하여 돌아갔다(골4:14, 딤후4:10).

 

나는 전도집회 후에 모여든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삶을 예수 그리스도께 헌신하려고 앞으로 나갔지만 그들이 주님과 동행하는 삶이 더 이상 진전이 없음이 많이 보아왔다. 나 역시 십여년 간을 신학을 하며 굳은 마음으로 주께 붙어 있기를 힘썼지만 결국 무너지고 말았다.

 

나는 갈보리채플로 인도함을 받은 후에야 내 믿음이 얼마나 감정적이고 이지적인가를 깨달았다. 그 당시 내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기초로 하지 않고 있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 교회의 보편적인 상황이다.

 

주님은 씨 뿌리는 자의 비유로 천국의 비밀을 말씀하시며 뿌리는 자는 말씀을 뿌리는 것이라(막4:14) 하시며 돌밭에 떨어진 씨앗처럼 깊이가 없으므로 햇빛이 뜨거울 때 오래 견디지 못한다 하셨다. 또한 좋은 땅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 결실하여 혹 백배, 혹 육십배, 혹 삼십배가 된다(마13:23) 하셨다.

 

또한 바울은 그의 제자 디모데에게 내가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변하며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군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딤후2:15) 말하며 망령되고 헛된 말을 버리고 청년의 정욕을 피하라 하였습니다.

 

C. 장차 우리가 받을 하늘나라의 상은 매우 크다. 

 여기서 우리의 구원은 영원한 생명을 바탕으로 된 것이며 또한 장차 우리가 받아야 할 상급에 관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기를 따르는 거룩한 무리들과 자신의 영광된 하나님의 기업을 함께 받고자 십자가를 지셨다.

 

바울은  자녀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생각건데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롬8:17,18) 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