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이 주는 이미지는 참 큽니다. 내가 일본에서 나올 무렵 "일본은 없다"라는 책이 뜨고 있었습니다. 얼마 후 그 책 옆에는 "일본은
있다"라는 책이 나란히 버티고 있었습니다. 얼마전 "노자와 21세기"라는 책이 뜨자 어떤 분이 또 그 내용을 반박하는 책을 써서 흥미를 불러
일으켰습니다. 나도 이 참에 "예수는 있다"라는 책을 한번 써 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드는군요. 그러나 중요한 것은 "예수는 없다" "예수는
있다"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예수가 없다고 하여 예수가 없는 것이 아니고 예수가 있다고 하여 예수가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불가에서는 부처는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라 네 마음에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예수께서도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눅17:20-21) 이 말씀을 부처를 믿는
사람들이 보면 예수가 부처보다 몇백년 늦게 낳으니 예수가 그에게 배워서 한 말이라고 할 것입니다. 사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의 12살 이후의
행적이 성경에서 묘연한 것으로 예수께서 인도에 가서 부처의 가르침을 받고 왔다고 궤변을 늘어 놓습니다.
물론 진리는 영원해야지요
예수는 없다고
하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종교 연구가들입니다. 그들은 자기가 믿는 종교의 철학적 바탕을 가지고 설명하면서 꼭 중요한 대목에서는 예수를 끌어
들입니다. 그 이유는 자기가 믿는 것을 가장 위대한 진리로 설법하여야 하는데 그 기준의 최고치를 설정해야 하는데 그 기준의 최고치가 이 세상에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도 두려워 하는 창조자 하나님의 진리를 들먹여야 하는데 그의 아들 예수가 사람으로 버티고 있으니 그를 밟고 지나가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지요. 성경은 나를 통하지 않고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자가 없다 하셨기 때문이지요.
석가도 공자도, 노자도, 마호멧도 그 진리를 연구하다가 완성하지 못하고 모두 죽음의 세상으로 불려 갔습니다. 사실 진리를
증명하려면 자신들이 영원히 살아 있어야만 했습니다. 그 이유는 진리는 살아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어떤 진리가 학문적인 논리로 끝나는
것이라면 그것은 결국 진정한 진리가 되지 못합니다. 그 누가 발견했다고 하는 그 진리는 다시 후세 사람들에게 분변과 판단을 받아 결국 그
진리들은 재수정됩니다. 물론 공자나 석가의 가르침처럼 그 세계에서 더이상 진보될 수 없는 완전한 설법이라고 그들의 가르침은 가르침의 논리를
실제로 증명하여야 하기 때문이지요.
나는 개인적으로 석가나 공자의 가르침에 대하여 매우 존경하며 그 가르침들은 위대한 유산들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의 가르침은 모두
선한 인간의 모델을 제시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선하고 좋은 가르침이라도 그 가르침으로 실제로 온전한 인간을 이룰 수 없다면 그것은 논리에 불가한
것이 되고 맙니다. 만약 석가나 공자의 가르침이 최고의 법이라서 그들의 가르침으로 인간이 온전케 될 수 있는 것이라면 그들을 따르는 사람들이
석가나 공자의 가르침으로 석가와 공자와 같은 반열에 올랐어야 합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그들을 능가한 사람들은 아무도 없습니다. 성경에는 사람이
열심히 하면 스승과 같이 될 수 있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보다 더 큰일을 할 것이다 라고 말씀하셨고
제자들은 큰 일들을 하였습니다. 따라서 아무리 좋은 이상과 비전이라도 인간이 성취할 수 없는 것이라면 그것은 빛좋은 개살구에 지나지 않습니다.
(내일로 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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