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세례28> 성령충만의 삶을 위하여(2)
*성령의 근심*
바울은 우리에게"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속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엡4:30)고 권면하고 있습니다만 문맥을 따라 살펴보면 우리가 성령을 근심시키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25절에서 "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으로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이는 서로 지체가 됨이라. 따라서 성령을 근심케하는 일 중의 하나가 거짓입니다.
율법에도 "이웃에게 거짓증언하지 말라"(출20:16)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는 진실을 요구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계속하여 성경은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엡4:26)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분노는 하나님을 슬프게 하는 또 하나의 원인입니다. 사실 우리의 삶 속에서 나타나는 우리의 분노로 하여 슬픔을 경험하게 합니다. 작은 일로 부부가 다투고 그것을 이기지 못하여 큰 소리를 지른다던가 아이들에게 화를 내고 나면 얼마 못가서 우리는 슬픔에 빠지고 맙니다.
우리 안에서 성령이 탄식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최근 안양교도소에 정신교육을 나가면서 느낀 것입니다. 그곳에서 만나는 형제들을 보면 그들은 모두가 천사 같았습니다. 더욱이 예수를 믿는 그들은 모두 진실되고 선한 모습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도 세상에서 자기 자신의 분노를 참지 못한 결과 남을 때리고 더 나아가 살인을 하므로서 그곳에 들어와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일순간의 분노가 사람으로 엄청난 문제를 발생하게 하는 것입니다.
또 성경은 "도적질하는 자는 도적질하지 말고 돌이켜 빈궁한 자에게 구제할 것이 있게 하라"(28절) 또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밖에도 내지 말고"(29절)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도적질과 더러운 말도 성령을 근심케 하는 행동들입니다. 바울은 이러한 것들 즉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훼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라"(31절)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죄를 다스릴 수 있는가?*
성경은 인간이 분을 내는 것에 잘못된 것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인간은 분을 낼 수 있는 상태에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것은 성경에서 분노에 대한 말은 창세기 4장에서 처음 언급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에덴동산에서 추방된 이후에 가장 처음 일어난 사건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 분노가 하나님을 향하여 나타난 것입니다. 가인이 제물을 하나님께 드렸고 그의 동생 아벨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는데 하나님께서는 가인이 드린 예물을 받지 않으셨습니다. 이 때 나타난 가인의 반응이 분노였습니다. 성경은 "가인이 심히 분하여 안색이 변하였다"(창4:6)고 기록하였습니다.
이 때 하나님께서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리라"(창4:7)고 나무라셨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야 하는 것은 인간은 선악과 사건 이후 선과 악을 아는 일에 하나님과 같이 되었음(창3:22)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은 인간이 분명하게 '선과 악'을 식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또 하나의 것이 내주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죄의 소원'입니다.
인간의 불순종 이후 인간의 속에는 죄를 향한 소원이 끊임없이 용솟음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너는 그것을 다스리라고 하셨습니다. 이제 에덴 동산을 다스리는 권세를 잃은 인간은 그 결과로 생긴 자기 자신 속에 있는 죄의 소원을 다스려야 하는 신세가 되고 만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린다"고 경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인간은 오직 선을 선택하여 살아야만 했던 것입니다.
*정당방위라해도..*
우리가 누구를 근심케 하는 것은 나를 향한 상대의 행위에 대한 나의 반응이므로 내가 다른 사람을 근심케 하는 행위는 어쩌면 정당방위 일 수도 있습니다. 또한 당신은 그럴 수 있는 권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남을 근심시키고자 하는 당신 마음 속에 그 근심이 살아 있다는데 있습니다. 따라서 성경에서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라는 말에는 커다란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 분노 속에서 죄는 서서히 자라고 있는 것이며 그 죄는 점점 커져서 당신으로 감당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는 것입니다. 결국 그 분노는 당신을 파멸시키고 맙니다. 형무소에 한번 가보십시오.
그들이 범한 죄는 모두 그들 안에서 성장된 상대를 향한 분노의 결과였던 것입니다. 그 분노가 당신 속에 있는 한 성령께서는 근심하고 계십니다. 성령은 당신의 선택을 방해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는 그러한 당신의 모습을 보며 한없이 근심하고 계실 뿐입니다. 만약 당신이 분노를 갖고 있을 때 마음 한편에서 아품을 느낀다면 속히 회개하고 성령의 도움을 청하십시요. 그러면 성령께서는 당신을 위로하고 그 분노의 사슬에서 풀어 주실 것입니다.
성경은 "그의 음성을 듣거든 격동하지 말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의 음성은 사단을 통해서도 나타날 수 있습니다. 욥기에 자세히 나와 있지 않습니까? 이와 같이 분노는 죄를 범하는 것뿐이 아니라 당신의 안에 있는 성령을 근심시키므로 당신의 영에게 화가 미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훼방고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라"(엡4:31)고 권면한 것입니다.
*좋은 관계를 맺자!*
이러한 것들을 버리지 않으면 어떠한 결과로 이어질까요? 바울은 성도의 마땅히 할 바에 대하여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은 너희 중에서 그 이름이라도 부르지 말라"(엡5:3)고 하였고 다시 "음행하는 자나 더러운 자나 탐하는 자 곧 우상숭배자는 다 그리스도와 하나님 나라에서 기업을 얻지 못한다"(엡5:4)하였습니다. 결국 우리 안에 있는 분노가 쌓여서 하나님의 진노를 쌓고 마는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진노가 불순종의 아들들에게 임한다"(엡5:6)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러므로 저희와 함께 참예하는 자 되지 말라"(엡5:7) 하였으며 "너희가 그 안에서 구속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다"고 말한 것입니다.
구속의 날까지 인쳤다는 말은 우리가 그의 날에 하나님의 아들로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받을 기업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성령과 좋은 관계를 맺을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것일까요? 성경은 이에 대하여 "빈궁한 자에게 구제할 것이 있기 위하여 제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엡4:28) 하였고 다시 "오직 덕을 세우는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엡4:29) 하였으며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엡4:32)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결국 가장 큰 방법은 용서에 기준을 두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분노가 상대성 원리 속에서 타인에게 상처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저는 과거에 참으로 분노가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아직도 분노가 많이 있음을 발견합니다. 아직도 나를 무시하는 사람들을 참지 못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지나간 일들을 생각해보면 분노를 참지 못함으로 잃은 것이 참으로 많았습니다.
성경은 이러한 우리를 가리켜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었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모두 세상사람들과 같이 참지 못하고 분노하는 그러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리스도의 날까지 성령으로 인침을 받은 자들입니다. 성경은 또 우리에게 "그러나 책망받는 모든 것이 빛으로 나타나나니 나타나지는 것마다 빛이니라"(엡5:13)고 기록하였습니다. 따라서 아직도 나의 속에 하늘나라를 기업으로 받지 못할 부분들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고 성경에 이르는 경책을 받아서 하루 속히 성령으로 하여 기쁨의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노력하여야 할 것입니다.
*어떻게할꼬!*
그러나 자신의 육체의 속성을 이길 수 있는 방법은 오직 성령을만 가능합니다. 우리가 아무리 자신을 고쳐 나가려해도 여전히 실패하고 말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성령 안에서 살고자 하면 성령께서 우리의 육체의 죄성들을 불태워버리고 우리를 성령의 열매를 향한 삶으로 이끌어 가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꼭 알아 두어야 할 것은 성경에 기록된 것 즉 하늘나라를 기업으로 물려받기 위한 조건들을 이루는 것을 그것이 자신의 노력과 뜻대로는 절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라면 성경에 이렇게 기록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악한 영이 인간의 육체를 따라 주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아직 우리의 육체 속에는 죄의 소욕이 살아 있습니다. 따라서 이 문제는 오직 성령께서만이 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오직 모든 일에서 성령에게 의존하십시오. 위대하신 하나님의 성령이 당신을 하나님의 아들로 만들어 가실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오직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라"(엡5:18)고 말한 것입니다. 이것은 성경의 명령입니다. 우리가 우리를 이길 수 있는 힘은 오직 성령의 충만함을 받는 길뿐입니다. 여기서 성령충만하라고 하지 않고 '성령충만함을 받으라'는 말에 주의하십시오.
성령충만은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와 어떠한 관계를 갖어야 할지 깊이 생각하여야 할 때입니다. 이제 곧 거짓 것들은 물러 갈 것입니다. 하나님은 더이상 만홀이 여김을 받지 않으실 것입니다. 이제 불법을 행하는 자들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산 우리를 찾으실 때가 된 것입니다.
로마서 13장에는 "그러므로 너희가 자다가 깰 때가 되었나니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다"고 기록되었습니다. 이제 우리 교회에서 성령세례에 관한 부분은 다시 재 조명되어야 할 것입니다. 또 주께서는 그 시대를 열어 가실 것입니다. 이제 잠에서 깨어 나십시요. 그리고 주의 뜻이 무엇인가를 이해하십시요. 성경은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 것을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 같이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 같이 하여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내일부터는 성령의 은사로 이어집니다)
*성령의 근심*
바울은 우리에게"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속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엡4:30)고 권면하고 있습니다만 문맥을 따라 살펴보면 우리가 성령을 근심시키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25절에서 "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으로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이는 서로 지체가 됨이라. 따라서 성령을 근심케하는 일 중의 하나가 거짓입니다.
율법에도 "이웃에게 거짓증언하지 말라"(출20:16)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는 진실을 요구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계속하여 성경은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엡4:26)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분노는 하나님을 슬프게 하는 또 하나의 원인입니다. 사실 우리의 삶 속에서 나타나는 우리의 분노로 하여 슬픔을 경험하게 합니다. 작은 일로 부부가 다투고 그것을 이기지 못하여 큰 소리를 지른다던가 아이들에게 화를 내고 나면 얼마 못가서 우리는 슬픔에 빠지고 맙니다.
우리 안에서 성령이 탄식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최근 안양교도소에 정신교육을 나가면서 느낀 것입니다. 그곳에서 만나는 형제들을 보면 그들은 모두가 천사 같았습니다. 더욱이 예수를 믿는 그들은 모두 진실되고 선한 모습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도 세상에서 자기 자신의 분노를 참지 못한 결과 남을 때리고 더 나아가 살인을 하므로서 그곳에 들어와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일순간의 분노가 사람으로 엄청난 문제를 발생하게 하는 것입니다.
또 성경은 "도적질하는 자는 도적질하지 말고 돌이켜 빈궁한 자에게 구제할 것이 있게 하라"(28절) 또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밖에도 내지 말고"(29절)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도적질과 더러운 말도 성령을 근심케 하는 행동들입니다. 바울은 이러한 것들 즉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훼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라"(31절)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죄를 다스릴 수 있는가?*
성경은 인간이 분을 내는 것에 잘못된 것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인간은 분을 낼 수 있는 상태에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것은 성경에서 분노에 대한 말은 창세기 4장에서 처음 언급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에덴동산에서 추방된 이후에 가장 처음 일어난 사건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 분노가 하나님을 향하여 나타난 것입니다. 가인이 제물을 하나님께 드렸고 그의 동생 아벨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는데 하나님께서는 가인이 드린 예물을 받지 않으셨습니다. 이 때 나타난 가인의 반응이 분노였습니다. 성경은 "가인이 심히 분하여 안색이 변하였다"(창4:6)고 기록하였습니다.
이 때 하나님께서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리라"(창4:7)고 나무라셨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야 하는 것은 인간은 선악과 사건 이후 선과 악을 아는 일에 하나님과 같이 되었음(창3:22)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은 인간이 분명하게 '선과 악'을 식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또 하나의 것이 내주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죄의 소원'입니다.
인간의 불순종 이후 인간의 속에는 죄를 향한 소원이 끊임없이 용솟음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너는 그것을 다스리라고 하셨습니다. 이제 에덴 동산을 다스리는 권세를 잃은 인간은 그 결과로 생긴 자기 자신 속에 있는 죄의 소원을 다스려야 하는 신세가 되고 만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린다"고 경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인간은 오직 선을 선택하여 살아야만 했던 것입니다.
*정당방위라해도..*
우리가 누구를 근심케 하는 것은 나를 향한 상대의 행위에 대한 나의 반응이므로 내가 다른 사람을 근심케 하는 행위는 어쩌면 정당방위 일 수도 있습니다. 또한 당신은 그럴 수 있는 권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남을 근심시키고자 하는 당신 마음 속에 그 근심이 살아 있다는데 있습니다. 따라서 성경에서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라는 말에는 커다란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 분노 속에서 죄는 서서히 자라고 있는 것이며 그 죄는 점점 커져서 당신으로 감당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는 것입니다. 결국 그 분노는 당신을 파멸시키고 맙니다. 형무소에 한번 가보십시오.
그들이 범한 죄는 모두 그들 안에서 성장된 상대를 향한 분노의 결과였던 것입니다. 그 분노가 당신 속에 있는 한 성령께서는 근심하고 계십니다. 성령은 당신의 선택을 방해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는 그러한 당신의 모습을 보며 한없이 근심하고 계실 뿐입니다. 만약 당신이 분노를 갖고 있을 때 마음 한편에서 아품을 느낀다면 속히 회개하고 성령의 도움을 청하십시요. 그러면 성령께서는 당신을 위로하고 그 분노의 사슬에서 풀어 주실 것입니다.
성경은 "그의 음성을 듣거든 격동하지 말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의 음성은 사단을 통해서도 나타날 수 있습니다. 욥기에 자세히 나와 있지 않습니까? 이와 같이 분노는 죄를 범하는 것뿐이 아니라 당신의 안에 있는 성령을 근심시키므로 당신의 영에게 화가 미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훼방고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라"(엡4:31)고 권면한 것입니다.
*좋은 관계를 맺자!*
이러한 것들을 버리지 않으면 어떠한 결과로 이어질까요? 바울은 성도의 마땅히 할 바에 대하여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은 너희 중에서 그 이름이라도 부르지 말라"(엡5:3)고 하였고 다시 "음행하는 자나 더러운 자나 탐하는 자 곧 우상숭배자는 다 그리스도와 하나님 나라에서 기업을 얻지 못한다"(엡5:4)하였습니다. 결국 우리 안에 있는 분노가 쌓여서 하나님의 진노를 쌓고 마는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진노가 불순종의 아들들에게 임한다"(엡5:6)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러므로 저희와 함께 참예하는 자 되지 말라"(엡5:7) 하였으며 "너희가 그 안에서 구속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다"고 말한 것입니다.
구속의 날까지 인쳤다는 말은 우리가 그의 날에 하나님의 아들로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받을 기업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성령과 좋은 관계를 맺을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것일까요? 성경은 이에 대하여 "빈궁한 자에게 구제할 것이 있기 위하여 제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엡4:28) 하였고 다시 "오직 덕을 세우는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엡4:29) 하였으며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엡4:32)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결국 가장 큰 방법은 용서에 기준을 두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분노가 상대성 원리 속에서 타인에게 상처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저는 과거에 참으로 분노가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아직도 분노가 많이 있음을 발견합니다. 아직도 나를 무시하는 사람들을 참지 못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지나간 일들을 생각해보면 분노를 참지 못함으로 잃은 것이 참으로 많았습니다.
성경은 이러한 우리를 가리켜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었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모두 세상사람들과 같이 참지 못하고 분노하는 그러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리스도의 날까지 성령으로 인침을 받은 자들입니다. 성경은 또 우리에게 "그러나 책망받는 모든 것이 빛으로 나타나나니 나타나지는 것마다 빛이니라"(엡5:13)고 기록하였습니다. 따라서 아직도 나의 속에 하늘나라를 기업으로 받지 못할 부분들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고 성경에 이르는 경책을 받아서 하루 속히 성령으로 하여 기쁨의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노력하여야 할 것입니다.
*어떻게할꼬!*
그러나 자신의 육체의 속성을 이길 수 있는 방법은 오직 성령을만 가능합니다. 우리가 아무리 자신을 고쳐 나가려해도 여전히 실패하고 말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성령 안에서 살고자 하면 성령께서 우리의 육체의 죄성들을 불태워버리고 우리를 성령의 열매를 향한 삶으로 이끌어 가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꼭 알아 두어야 할 것은 성경에 기록된 것 즉 하늘나라를 기업으로 물려받기 위한 조건들을 이루는 것을 그것이 자신의 노력과 뜻대로는 절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라면 성경에 이렇게 기록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악한 영이 인간의 육체를 따라 주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아직 우리의 육체 속에는 죄의 소욕이 살아 있습니다. 따라서 이 문제는 오직 성령께서만이 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오직 모든 일에서 성령에게 의존하십시오. 위대하신 하나님의 성령이 당신을 하나님의 아들로 만들어 가실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오직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라"(엡5:18)고 말한 것입니다. 이것은 성경의 명령입니다. 우리가 우리를 이길 수 있는 힘은 오직 성령의 충만함을 받는 길뿐입니다. 여기서 성령충만하라고 하지 않고 '성령충만함을 받으라'는 말에 주의하십시오.
성령충만은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와 어떠한 관계를 갖어야 할지 깊이 생각하여야 할 때입니다. 이제 곧 거짓 것들은 물러 갈 것입니다. 하나님은 더이상 만홀이 여김을 받지 않으실 것입니다. 이제 불법을 행하는 자들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산 우리를 찾으실 때가 된 것입니다.
로마서 13장에는 "그러므로 너희가 자다가 깰 때가 되었나니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다"고 기록되었습니다. 이제 우리 교회에서 성령세례에 관한 부분은 다시 재 조명되어야 할 것입니다. 또 주께서는 그 시대를 열어 가실 것입니다. 이제 잠에서 깨어 나십시요. 그리고 주의 뜻이 무엇인가를 이해하십시요. 성경은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 것을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 같이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 같이 하여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내일부터는 성령의 은사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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