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강좌/성령세례

<성령세례23>영적성장(2)

이요나 2007. 2. 14. 12:18
<성령세례23>영적성장(2)

*육체의 일*
바울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지 않으려 하는 육체의 속성 속에서 고민하는 성도들을 향하여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서 저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듯이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롬8:12-14) 하였으며 다시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롬13:14)고 경고하였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관능적인 육적인 생활을 살기를 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주를 믿음으로 우리 안에 내재하시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생활하기를 원하고 계신 것입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갈5:16) 말하였습니다. 먼저 우리가 알 것은 우리 육체 안에는 두 영이 다투고 있음입니다. 즉 세상의 영과 하나님의 영이 다투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갈5:17)과 같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았다"(갈5:24) 그러면 성경이 죽이라고 하는 육체의 욕심은 과연 무엇일까요? 성경은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골3:5)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 바울은 계속하여 "너희가 전에 그 가운데 살 때는 행하였으나 이제는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벗어 버리라 곧 분과 악의와 훼방과 너희 입의 부끄러운 말이라 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말라 옛 사람과 행위를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은 자니라"(골3:7-10)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옛 사람의 모습 *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옛 사람, 즉 옛 성질, 습관들로부터 벗어 나와 새로운 그리스도의 옷을 입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요3:3)하셨고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5:17)고 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인은 옛 사람을 벗고 새로운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우리의 힘으로 이러한 일들을 할 수 있을까요? 아닙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이러한 고통에 대하여 자신이 겪은 체험을 통하여 로마서 7장을 통하여 신랄하게 술회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크리스챤이 된 후에도 선을 행하려는 마음과 선한 것을 하려하지 않는 육체의 성질이 다투고 있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성질은 우리 안에서 끊임없이 서로 다투고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예수를 바라 볼 때에는 우리 안에 사랑과 청결한 마음과 인내와 자비와 온유한 심령으로 들끓게 됩니다. 그런데 실상 우리의 삶을 돌이켜 보면 정말로 어처구니없는 일들이 나타날 때가 많습니다.

생활 속에서 내가 싫어하는 것들이 나타나면 나는 그것을 참지 못하고 분노하고 거절하고 피해 버리기 일 수입니다. 그런데 내 육체가 좋아하는 것들이 나를 유혹하면 그것이 하나님이 원하는 것이든 아니든 좇아 가버리고 맙니다. 그리고 그 쾌락의 결과가 눈앞에 나타나 내 양심을 괴롭게 할 때면 그 때서야 주께 무릎을 끓고 회개를 합니다.

*모든 종교의 문제들 *
하나님을 믿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사랑과 동정심과 친절과 온유함이 있습니다. 성경도 이에 대하여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다"(롬7:18)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떻게 선을 행하느냐가 문제입니다. 우리에게 선을 행하고자하는 마음은 있습니다. 그러나 선을 실행하는 것은 우리의 육체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육체는 이것을 거부하고 오히려 그 원하지 않는 것을 행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종교들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또한 선을 달성하고자 하는 것은 인간의 기본적 욕망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어떻게 선을 달성하느냐는 모든 종교의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에게는 그것에 대한 근본적인 욕구가 있으나 또한 우리의 육체 속에는 그것을 하고 싶지 않은 또 다른 힘이 역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부처는 이 문제에 대하여 나름대로 터득한 현인입니다. 부처는 인간의 문제는 물질적 욕심에 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사람이 물질적인 욕망에 사로잡혀 있는 한 늘 불안 초조하게 되고 분노하게 되고 염려하고 적대심에 빠지게 됩니다. 성경에도 "돈을 사랑하는 것이 일만 악의 뿌리"(딤전6:10)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돈에 대한 욕망으로 대립과 원망과 질투심으로 가득 차게 됩니다. 그래서 불교신도들은 인간의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으로 물욕으로부터의 해방을 주창합니다. 즉 그 물욕에서 완전히 해탈할 수 있다면 열반에 들어간다고 말합니다.

*종교가 할 수 없다!*
  그들은 많은 고행을 통하여 이러한 욕망으로부터 벗어나려고 고행을 하기도 합니다. 그들이 말하는 열반이란 완전한 평안에 이루는 복으로서 "최고의 행복, 완전한 만족, 무욕심"을 성취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예수님의 가르침도 이와 유사함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불교의 가르침으로 우리 육체 안에 처음부터 존재하는 육체의 소욕들을 그들이 주장하는 고행과 가르침으로 해결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는 대단히 중요합니다. 그에 대하여 그들은 확실한 대답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끊임없는 고행과 깨달음의 길을 제시할 따름입니다. 이와 같이 다른 종교들도 인간의 더러움에서 벗어나 선을 이루기 위한 인간의 방법을 제시하고 있으나 결론은 결국 '인간은 할 수 없다'에 도달하고 맙니다. 이 결론에 대하여 성경도 동의를 합니다. '사람으로는 할 수 없다'라고 하는 것이 성경의 대답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해결의 방법을 제시하고 있으면 또 실증하고 있습니다. 성령은 인간의 몸으로 할 없어서 죽음의 저편으로 문제를 떠밀어 버리는 다른 종교의 방법이 아니라 살아 있는 우리로 믿음 안에서 이룰 수 있는 길을 제시한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인간으로는 할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의 신은 능치 못함이 없느니라" 고 말씀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신은 능치 못함이 없다"라는 말씀은 절망 가운데 있는 사람들에게 유일한 소망입니다. 즉 아무도 해결할 수 없는 이 문제를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께서 해 주시는 것이고 주께서는 우리에게 이 성령을 부어 주신 것입니다.

부처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열반에 들어가야 한다고 하지만 그 열반의 도에 이르기 위한 능력을 제공하지 못하였습니다. 따라서 인간은 선을 찾아 헤매이다가 중도에서 좌절하게 됩니다. 따라서 우리는 불교도들에게서 "나는 온전한 평안에 들었다, 나는 행복하다. 만족하다, 나는 아무런 욕심이 없다. "라는 대답을 듣지 못합니다. 따라서 열반이라는 개념은 인간이 죽어서나 가는 곳이 되었습니다.

*성령이 할 수 있다!*
만약에 기독교가 죽어서 천국에 가는 것뿐이라면 우리는 불교도들에게 아무런 할 말이 없습니다. 그들이 말하는 것처럼 '네 스스로 육체의 욕심을 버리라'라는 제안이 아니라 '나는 이미 소욕을 품고 있는 육체가 죽고 새로 태어났다'의 개념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부처는 스스로 열반에 들어 갔지만 예수는 이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고 그를 따르는 자들에게 자기와 같은 동일한 부활의 영광을 나누어주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마16;24)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의 영광을 함께 받기 위하여 먼저 선행하여야 하는 것은 나 즉 육체를 부인하고 자기를 십자가를 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그래서 주께서는 "내가 가서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라 저는 진리의 영이라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요14:16,17)고 완전한 방법을 제공해 놓으신 것입니다.

이것이 모든 종교가 해결하지 못한 인간이 선을 이루는 방법을 해결하여 놓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 세상에 예수 그리스도 이 외에 구원받을 다른 이름을 허락하지 않았다고 기록한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예수를 우리의 구원자로 영접하고 내 삶을 그에게 맡길 때 하나님의 위대한 능력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우리와 함께 사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성령께서 우리를 돕는 보혜사가 되시어서 우리가 할 수 없는 것을 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약속 *
주께서는 우리에게 이것을 약속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성령은 우리 안에 거하시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소망하시는 삶을 살아가도록 능력을 발휘하여 우리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들을 하도록 이끌어 가시어 죄로 말미암아 잃어버렸던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은 우리의 결심과 나의 노력의 결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욥은 "누가 깨끗한 것을 더러운 가운데서 낼 수 있는가 하나도 없다"(욥14:4)고 고백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더러운 것에서 깨끗한 것을 낼 수 있는 능력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다윗도 자신이 자기를 지킬 수 없어서 "내 길을 굳게 정하사 주의 율례를 지키게 하소서"(시119"5) 하였고 다시 "내가 주의 법도를 사모하였사오니 주의 의에 나를 소성케 하소서"(시119:40)고 울부짖었습니다. 이것은 인간이 할 수 없는 것을 시인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도움을 청하는 하나님의 사람들의 고백이며 소망인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그러나 늘 실패하고 절망하지요. 그럴 때마다 우리는 좌절감에 빠지고 믿음에서 멀어지게 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성령은 쉬지 않고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자신의 믿음생활 속에서 실패하여 고민하고 괴로워하는 중에도 주의 영은 하나님의 계획안에서 우리를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내일로 이어집니다)

(묵상을 위한 질문)

1. 육체의 욕심은 무엇인가?

2.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원하시고 계시는가?

3. 종교의 고민은 무엇인가?

4. 왜 종교는 육체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가?.

5. 육체를 해결하기 위하여 인간이 할 것은 무엇인가?

6. 성령은 우리 안에서 무엇을 하도록 하는가?

7. 주님의 약속은 무엇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