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강좌/성령세례

<성령세례 21>그리스도의 참된 증인(2)

이요나 2007. 2. 14. 12:19
<성령세례 21>그리스도의 참된 증인(2)

*그리스도의 본 *
예수께서는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 날밤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 만찬을 드신 후 친히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면서 내가 너희의 주인과 스승으로서 너희의 발을 씻긴 것은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본을 보이셨다고 말씀 하셨습니다.(요13:14,15) 또 바울은 그의 제자 디모데에게 "믿는 자에게 본이 되라"(딤전4:12)고 가르쳤습니다. 또 그는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에게 "범사에 너희에게 모본을 보였노니 곧 이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을 돕고 또 주 예수의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라"(행20:35)고 가르쳤습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우리가 진리를 받은 사람들임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계시록 3장 14절을 보면 예수께서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께서도 충실하고 참된 하나님 아버지의 증인이셨습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가를 알고자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알 수 있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은 그의 삶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의와 사랑과 기쁨과 평안이 흘러 넘쳐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 중 빌립이 예수님에게 "주여 우리에게 하나님을 보여 주소서"하였을 때 주께서는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요14:9)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그가 충실되고 진실된 하나님 아버지의 증인이셨음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크리스챤이란 말의 시작*
크리스챤이란 새로운 단어는 바나바와 바울이 개척한 이방인 선교의 전초지 안디옥 교회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이것은 세상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의 생활을 보고 칭한 새로운 단어입니다. 지금 우리들처럼 크리스챤들이 자신들을 가리켜 말한 것이 아니라 세상 사람들이 자신들과 다른 그리스도인들의 온전한 삶의 모습을 보고 칭한 신조어였습니다. "이들은 참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닮은 사람들이다"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그런데 요즘에는 어디에 가서 자신이 그리스도인인 것을 말하기 꺼리는 세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그만큼 크리스챤의 삶의 모습이 세상 가운데서 온전하게 보여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세상에서 "저 사람은 진실 된 크리스챤이다"라고 불리우는 사람이야말로 그리스도의 증인인 것입니다.

예배를 많이 들이는 사람이 크리스챤이 아니고 찬송을 잘하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이 아니고, 설교를 잘하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이 아니며, 오직 그의 말과 행실 속에서 그리스도의 삶이 나타나야 되는 것입니다. 주께서도 내 말을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자기 자신이 과연 그러한 사람인가를 관찰해 보기 위하여 재미있는 테스트를 해 볼 수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3장에 나오는 "사랑"이라는 말에 자신의 이름을 넣어보고 음미해 보십시오. "요나는 오래 참고 요나는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요나는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부분의 말씀을 끝까지 읽지 못한 채, 아! 나는 정말로 한심한 하나님의 사람이로다! 누가 나를 정말로 크리스챤이라고 부를 수 있는가? 하고 탄식을 하게 될 것이다.

*인간은 할 수 없다*
그러면 과연 우리가 크리스챤으로 살아갈 방법은 없는 것일까요? 우리가 성경이 요구하는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살아 갈 수 있는 것일까요? 이에 대한 인간의 대답은 "NO"입니다. 만약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가 사함 받았다고 할 때 그로부터 우리가 죄 없는 사람으로서 성경이 요구하는 의로운 삶을 영위 할 수 있는 것일까요? 이에 대한 우리의 대답도 "NO"입니다. 왜냐하면 아직 우리는 죄를 잉태한 육체 속에 살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죄가 없는 것하고 죄가 없는 것으로 여김은 전혀 다른 의미입니다.

만약 인간이 우리의 노력이나 어떠한 힘에 의하여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가 나타내신 삶을 살수 있는 것이라면 예수께서는 구태여 이 땅에 오실 필요조차 없으셨을 것입니다. 이 땅에는 의인으로 살아가는 율법을 주신 바 되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우리가 우리의 노력으로 온전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 갈 수가 있다고 생각한다면 주께서 우리에게 명령하신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5:44) 하신 말씀대로 일생을 살아 갈 수 있는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바울은 자기의 체험을 통하여 로마서 7장 15절에서 "나의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원하는 이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그것을 함이라"고 고백하였습니다. 그는 또 계속하여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내가 이로서 율법의 선한 것을 시인하노니 이제는 이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롬7:16-18)고 탄식했습니다. 우리에게 선을 행하고자 하는 의사는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가 원하는 바는 행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원하지 않았던 것을 행하는 또 다른 육체의 속성이 우리 속에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바울은 인간의 선한 의지와 관계없이 인간이 죄에 이끌리고 있음을 한탄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서 싸우는 것*
우리도 바울의 이 고충을 지금 겪고 있습니다.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결국 그것을 행한 후에야 탄식하고 괴로워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바울은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롬7:21)외친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의 재미있는 발견은 "내가 원치 않는 것을 했을 때 율법의 선한 것을 시인하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아이들이 부모가 하지 말라고 금한 일을 처음에는 이해하지 못하다가 그것을 행한 후 부모로부터 벌을 받게 될 때 그 일이 왜 잘못된 것인지를 알게 되는 것과 같다고 하겠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이 정하신 율법을 듣습니다. 우리가 성경의 말씀을 들을 때 '네 맞습니다. 나는 그렇게 살고 싶습니다. 성경의 가르침대로 사람들을 용서하고 사랑하고 친절하고 동정하는 그러한 삶을 살고 싶습니다'라고 고백하게 됩니다. 이처럼 내 속 사람으로서는 선한 일을 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는데 우리의 몸 안에는 또 다른 법이 있어서 우리의 마음을 주장하는 선한 법을 무시하고 내가 원하지 않는 일을 하게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에 대하여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서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도다"(롬7:22,23)고 설명하며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하고 한탄하였습니다. 이것은 다른 말로 표현한다면 내 육체 속에 있는 또 다른 법이 하나님께서 내 삶을 위하여 세우신 권위와 방법들을 거부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에 대하여 반항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도 육신의 연약함을 이기지 못하는 베드로를 향하여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마26:41)고 하셨습니다. 이처럼 영과 육간의 다툼은 치열한 것입니다. 이 두 가지의 성질이 서로 대립하고 있음에 대하여 성경은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갈5:17)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듀나미스의 뜻 *
그러면 우리는 이 문제를 영원히 해결할 수 없는 것일까요? 아니요, 있습니다. 인간의 이러한 연약함을 해결하기 위하여 주께서 우리에게 성령을 부어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직 성령에 의하여 가능한 것입니다. 다만 우리가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서 성령에 자신을 복종시키면 되는 일입니다. 성경은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갈5:16)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래서 주께서 제자들에 말씀하신 것입니다.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너희가 내 증인이 되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말씀하신 '권능'이란 그리스어 "듀나미스"로서 영어의 다이나믹(dynamic)에 해당하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받는 능력은 엄청난 힘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충성되고 진실된 증인이 되기 위하여는 우리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오직 성령의 능력에 의하여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일에 대한 성경적 증거는 베드로의 삶을 통하여 살펴 볼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정말로 예수님을 사랑하였고 그의 충성된 제자로서 일생을 살고 싶은 욕망으로 가득한 사람이었습니다. 예수께서 잡혀가신 날 저녁 주께서 너희가 나를 다 버리리라고 하셨을 때 베드로는 선뜻 나서서 "다 버릴지라도 나는 그렇지 않겠다"고 호언장담합니다. 그 때 주께서 "오늘 이 밤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고 하셨습니다. 그 때 베드로가 무어라고 하였던가요?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베드로뿐이 아니라 다른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나 조금 후에 예수께서 잡혀가실 때에 그들은 예수님께서 예고하신 말씀처럼 모두 도망하였고 주께서 잡혀가신 후 베드로는 대제사장 집 마당에서 불을 쪼이고 있었습니다. 그 때 그 집 여종이 '너도 갈리리 사람이 아니냐'라고 말할 때 베드로는 거듭 부인하면서 나는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도무지 알지 못하겠다고 저주하며 맹세하였습니다. 그 때 닭이 울었습니다.

*닭 울 때의 베드로가 바로 네 모습이다*
사실 이러한 모습은 우리들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늘 말씀대로 살겠다고 작정을 하고 새벽기도회에 나가고 금식을 하고 매일 아침저녁 성경을 읽기도 합니다. 그러나 며칠이 못되어 우리의 믿음의 행로는 다시 중단하고 맙니다. 그러나 성령세례를 받은 후 베드로와 제자들은 어떠했습니까? 대제사장들과 종교지도자 회의 앞에 서서 담대히 복음을 전하는 충실되고 진실된 증인들로서 일생을 마치게 됩니다.

결국 베드로는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라"는 말씀대로 복음의 증인의 일생을 마쳤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여 베드로는 이처럼 담대해 질 수 있었을까요? 베드로가 이처럼 변할 수 있었던 것은 예수께서 약속하신 것, 즉 성령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너희 위에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내 증인이 되리라"고 말씀하신 성령의 권능을 받은 것입니다.

우리가 사도행전 4장을 보면 베드로가 얼마나 대담한 사람이 되었는가를 여실히 볼 수 있습니다. 성경은 사도들을 통하여 나타난 성령의 능력에 대하여 "베드로가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였다"(행4:31)고 기록하였습니다. 성령이 우리에게 임하시면 우리는 이처럼 자신의 연약한 육신의 대적을 물리치고 담대한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령의 능력 없이는 아무도 그리스도의 증인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도 이와 같이 성령의 능력을 받도록 힘써서 주께 간구하십시다.

(묵상을 위한 질문)

1. 충성된 증인의 모본에 대하여 설명하라.

2. 크리스챤이란 말의 시작을 설명하라.

3. 크리스챤의 위치는 무엇으로 지킬 수 있는가??

4. 성령이 우리 안에 있어야 하는 이유(롬7장)?.

5. 듀나미스를 설명하라?

6. 베드로의 실패의 원인은 무엇인가?.

7. 모세, 요셉의 첫 번 째 실패의 원인을 비교 분석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