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강좌/성령세례

<성령세례18> 교회를 도우시는 성령(1)

이요나 2007. 2. 14. 12:21
<성령세례18> 교회를 도우시는 성령(1)

*또다른 보혜사 *
지금까지 성령 충만, 성령은사 성령세례라는 감격적인 제목을 가지고 살펴보았습니다만 그것은 한마디로 말하여 성도들의 삶으로부터 밖으로 표출되는 성령의 능력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이것을 한마디로 넘쳐 흐른다라고 할 수 있지요. 그러나 성령이 임재하심과 넘쳐 흐르는 것은 전혀 다른 현상입니다. 오늘은 우리 생활 속에 임재하신 성령의 역사에 대하여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 볼 말씀은 요한복음 14장입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요14:16-17) 위의 본문 속에서 "또 다른"(another)라는 그리스어는 "아로스"입니다.

이것은 완전한 같은 종류, 즉 질적으로 동등한 것을 말합니다. 다시 말하여 같은 등급 내지 같은 종류의 "또 다른"인 것입니다. 또 "또 다른"의미로 사용되는 "헤데로스"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이것은 같은 모양의 모델이라도 전혀 다른 품질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또 예수께서 성령을 소개하실 때 성령의 신성(神聖)에 대하여 언급하였습니다.

성령은 "하나님이시다" 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즉 이 부분에서도 성령과 예수님은 동질의 하나님이심을 언급하시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성령을 소개하시기를 "아버지께서 보혜사"를 보내 주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보혜사"란 "파라클레토스"라는 그리스어로서 "옆에" 또는 "변호해주다, 도와주다, 간구해 주다"라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지금까지 내가 너희를 도와준 것처럼 너희 옆에서 여러 가지 방법으로 도와 준다는 의미입니다


*근심이 밥주냐? *
지금까지 예수께서는 여러 번 제자에게 배반당하여 팔릴 것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가시는 곳에는 제자들이 올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 때까지 이 말에 대하여 제자들은 납득할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제자들은 메시야이신 예수께서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시러 오신 것으로 믿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지고 있는 일반적인 메시야관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갑자기 예수께서 자기는 제자에게 팔리어 십자가에 죽게 될 것이며 제자들을 따나게 될 것이라는 말에 제자들은 불안해 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에게 아직 이 말씀은 이해 할 수 없는 부분이었습니다. 그들이 고대하고 있는 것은 다윗의 천년시대의 부활이었습니다. 그동안 예수님과 함께 생활하면서 보고들은 모든 것을 통하여 예수께서는 지금 이스라엘을 회복하고도 남음이 있으신 데 십자가 위에서 죽으신다니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14장 서두에 "너희는 근심하지 말라" 하셨지만 제자들은 자신들의 앞날을 생각할 때 정말로 처량한 달밤이었습니다.

예수님 없이 살아갈 생각을 하니 이젠 죽었구나하는 생각이 앞설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실 그동안 예수님은 그들의 실제적인 보호자였습니다. 의식주는 물론 유대인들의 모든 공격으로부터 그들을 지켜주는 절대적 보호자이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스라엘은 유대교라는 절대적 종교권 앞에 복종하며 살아가는 민족임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 당시 로마 정부도 그들의 민족적인 종교활동을 합법화한 상태에서 지배한 것입니다.

유대인에게 있어 하나님을 향한 종교활동은 그들의 생명과도 같은 절대적인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은 그 누구라도 이 종교적 테두리를 벗어나서는 살아 갈 수 없습니다. 유대교로부터 출교를 당한 사람은 이스라엘 속에서 어떤 명목으로도 살아 갈 수 없는 존재인 것입니다. 그러한 절대적인 종교 앞에 맞서서 일어선 신흥종교인 예수교는 이스라엘 전체를 뒤흔드는 민족적인 문제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당시 종교권을 주관하던 지도자들로부터 예수님과 그 제자들은 늘 감시를 받아야 했고 공격을 받아 왔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들의 어떠한 공격으로부터도 제자들을 지켜 주셨습니다.

*최고의 해결사*
마가복음 9장을 보면 예수께서 3명의 제자들을 데리고 변화상상에서 내려 왔을 때 산아래 있던 9명의 제자들이 바리새인과 율법학자들에게 둘러싸여 공격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너희가 무엇을 저희와 변론하고 있느냐고 물으셨습니다. 그 때 제자들은 벙어리 귀신들린 어린아이를 데리고 와서 쫓아 달라는 아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기에 수모를 당하고 있었습니다.

사실 제자들은 예수님으로부터 권세를 받아서 마을을 돌아다니며 귀신을 쫓기도 하고 병을 고치기도 한 경험이 있었지요. 그런데 그 날은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해도 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 상황을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도 없고 수제자인 베드로나 야고보와 요한도 없는 상태에서 많은 사람들 앞에서 율법학자들에게 공박을 당하던 제자들은 아마 땀을 질질 빼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 때 주께서 나타나셔서 귀신을 쫓아 주신 것입니다. 또 어디 그것뿐입니까,

마태복음 12장을 보면 안식일 날 들판을 걷다가 제자들이 시장해서 벼이삭을 비벼서 먹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이 때에도 기회를 놓치지 않고 제자들을 정죄하기 시작했습니다. 안식일 날 율법을 어기는 것은 유대인으로서는 용납할 수 없는 죄였기 때문이지요. 이 때에도 예수께서는 제사장 밖에 먹지 못하는 떡을 다윗이 먹었던 성경의 기록된 말씀을 가지고 그들의 주장을 물리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당당하게 나는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선포하셨습니다. 또 세금문제를 거론할 때에도 예수께서는 초자연적인 방법을 통하여 물고기 속에서 돈을 꺼내어 해결하셨습니다. 먹을 것이 없어서 굶주리는 백성에게는 오병이어와 칠병이어의 기적을 베푸셨습니다. 가족의 질병은 물론 밤새도록 고기를 잡지 못하고 실의에 찬 제자들에게 그물이 찢어지도록 고기를 잡는 기쁨을 안겨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신이 내 안에? *
그야말로 제자들에게 있어서 예수님은 요술 방망이와 같았습니다. 예수님만 옆에 있으면 아무것도 걱정을 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떠나신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제자들은 늑대 속에 버려진 고아의 신세가 되고 유대인의 공동체 속에서 돌에 맞아 죽을 것이 뻔한 이치입니다. 정말로 심각한 상태인 것입니다. 이 때 예수께서는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 두지 아니하신다고 하시며 "또 다른 보혜사"에 대한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지금까지 너희 옆에서 도와주던 나와 동질(同質)의 '보혜사' 즉 '옆에서 돕는 자'를 보내주시도록 아버지께 구하시겠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 때 예수께서는 '보혜사"를 '영'이라 하셨습니다.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말씀이지요. 영이라니요? 제자들 옆에서 지금까지 실제로 도와 주시던 예수와 동질의 '보혜사'가 오신 다고 하셨는데 '영'이라니 이것 정말 이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아마 제자들은 '영이 어떻게 우리 옆에서 도울 수 있을까?' 하고 놀라서 말도 못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더군다나 주께서는 그 영이 '너희와 함께 하시며' '또 너희 속에 계실 것이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영'은 다름 아닌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그들에게 있어서 새로운 개념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성령이라면 과거 이스라엘 선지자들에게 임하셨던 하나님의 신(神)을 말씀하시는 것인데 자기들과 같은 평범한 사람들 속에 임한다니 쉽게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었습니다.

*교회의 개념*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치 못하리라"(요15:12)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한계 속에 있는 인간을 말로 온전히 가르치기에는 부족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이심에도 육체의 한계 속에 계셨습니다. 그래서 어떠한 기적을 행하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하실 수 있으나 사람의 지식적인 부분을 깨우치는 일에는 사람이 한계 속에 있는 관계로 그들이 받아 드리고 이해 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할 수 있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어린아이들이 그들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문제를 질문할 때 우리는 그것을 설명할 길을 찾지 못하여 망설이게 됩니다. 이와 같이 인간은 모든 것을 한꺼번에 수용할 수 없는 한계에 속하여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의 어려운 부분을 가르치기 위하여는 특별한 성령의 역사가 필요한 것인데 이것이 성령의 기름부음인 것입니다. 그러한 이유로 보혜사 성령께서는 옆에 와서 도와주시는 것뿐이 아니라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요14:26)고 하신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이에 대하여 "너희 안에 기름부음이 있으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수 없다"고 설명한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다"는 말은 참으로 흥미롭기도 하지만 오해의 소지를 불러 일으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지금 성경을 누구에겐가 가르침을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요한 계시록을 보면 "누구든지 성령이 교회에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라는 말씀이 여러 번 나오고 있습니다.

사실 교회(敎會)라는 곳은 글자 그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기 위하여 세워진 곳입니다. 요즘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곳이라는 것보다는 예배를 드리는 신전(神殿)과 같은 의미가 더 부각되어 있지만 교회는 분명히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기 위하여 세우신 하나님의 집입니다. 그래서 성령께서는 그의 종들에게 기름을 부어 주셨는데 그 직책인 목사 또는 성경교사(pastor-teacher)인 것입니다.

(묵상을 위한 질문)

1. 제자들의 근심은 무엇인가?.

2. 이스라엘의 종교적 상황을 설명하라.

3. 아로스와 헤데로스를 설명하라.

4. 보혜사의 원어적 의미를 설명하라.

5. 보혜사는 원초적으로 누구인가?

6. 보혜사는 우리 안에서 무엇을 가르치시는가?

7. 나는 지금 보혜사의 인도를 받고 있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