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세례16> 흘러넘치는 성령(1)
*최대의 관심사 *
오늘은 요한복음 제 7장 37절의 말씀을 가지고 성령 충만과 성령세례에 대하여 공부하겠습니다. 오늘의 본문 속에서 사도 요한은 성령세례와 성령 충만 그리고 성령의 은사는 과연 어떤 경험인가를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 .」문맥을 볼 때 이것은 초막절임을 알 수 있습니다. 앞 문장을 살펴볼 때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오셔서 마지막 날 곧 큰 날이 이르기까지 주목할 만한 일을 행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께서는 명절 중간에 올라 가셨는데 수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행적이 최대 이슈가 되고 있었습니다. 이번 명절에도 예루살렘에서 기적을 행하실까 하는 생각들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러나 뜻밖에도 예수께서는 그들 속에서 아무런 기적을 행하지 않으시고 다만「너희가 나를 찾아도 만나지 못할 터이요 나 있는 곳에 오지도 못하리라」고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은 그 말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궁금증만을 더해 갔습니다. 예수께서는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최대 관심사를 유발시키고 있으셨는지도 모릅니다. 인간에게는 이러한 심리가 있기 때문이지요.
드디어 초막절 최고의 절정인 마지막 날 곧 큰 날이라고 불리는 8일째가 되었습니다. 이 때 예수께서는 군중의 한가운데 서서 큰 소리로 외치셨습니다. 장막절이라고도 부르는 초막절은 지나간 조상들이 광야를 40년 간 방황할 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지켜주신 것을 기념하는 이스라엘 3대 명절 중 하나입니다. 사실 광야에서 40년 간 백성이 살아남은 것은 하나님의 기적이었습니다.
오늘날도 이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정통파 유대교도들은 집에서 나와 야자수 잎으로 지붕을 엮은 작은 오두막을 만듭니다. 그리고 가족들은 일주일간 밖으로 나와서 야자수 잎으로 지붕을 엮은 작은 오두막에서 지냅니다. 지붕은 별들이 보이도록 야자수 나무 가지를 얼기설기 얹어 둡니다. 그렇게 하는 이유는 밤에 아이들이 「아아, 저기 별이 보이네」라고 할 때, 부모들이「우리의 조상이 40년 간 별을 보며 황야에서 살았을 때 하나님께서 40년 간 우리 조상들을 지켜주셨단다.」라고 말하기 위하여 입니다.
과거 40년 동안의 하나님의 은혜의 기억을 되살리기 위한 행사입니다. 그리고 낮이면 성전에서 예배드릴 때 제사장들은 금주전자를 어깨에 짊어지고, 성전의 안뜰에서부터 여러 계단을 내려가 아래의 기드론 골짜기에 있는 실로암 못으로 내려갑니다. 거기에는 이미 수천 명의 사람들이 운집하여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제사장이 금주전자를 메고 성전 안뜰을 향하여 갈 때 사람들은 제사장을 따라가며 일제히 시편 118편 할렐루를 부르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성전 마당에 도착하여 찬양이 절정에 이를 때에 제사장들은 어깨에 매고 온 주전자의 물을 마당에 쏟아 붓게 됩니다. 이것 또한 광야에서 조상들이 목이 말라 갈급할 때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물을 주셨음을 기억하게 한 것입니다.
*무엇이 갈급한가? *
결국 초막절은 과거 40년 간의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위하여 구원하신 일들을 기억하기 위한 축제이지요. 이 축제는 8일간 이어졌습니다. 그 8일째 되는 날을 그들은 큰 날이라고 부릅니다. 예수께서 큰 소리로 외친 때는 큰 날이라고 불리 우는 초막절 끝 날 즉, 8일째 되는 날이었습니다. 이 날은 제사장들이 실로암 연못으로 가는 행사는 없습니다. 이것은 이미 그들이 요단강을 건너 하나님께서 언약하신 안식의 땅, 가나안에 들어 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된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8일째 되는 날은 이미 7일 째에 하나님이 모든 것을 다 마치고 안식하신 날로서 하나님의 사람들은 안식을 누리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안식의 개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물이 풍부한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인도해 들이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이 있었습니다. 가나안 땅으로 들어 온 이스라엘 백성은 이제 기적을 통하여 바위에서 솟아 나오는 물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이미 약속의 땅에서 들어 왔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8일째의 명절에는 물주전자 행렬이 없었습니다.
이날에는 수천 명의 사람들이 안뜰에 운집하여 하나님께 예배하게 되는데, 그 때에 예수께서 서서 수천 명의 사람들을 향하여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셔라」라고 큰소리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기에 예수께서 서 계셨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들의 관습은 랍비는 앉아서 가르쳤고 학생은 언제나 서 있었습니다. 그러나 중대한 말씀의 포고나 선고를 할 때, 또는 진리를 선포할 때는 랍비는 회중들 앞에 일어서서 외쳤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그 때 그곳의 사람들은 목말라 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이해해야 합니다. 이스라엘은 아주 건조한 땅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갈증에 대하여 매우 민감합니다.
그 때 예수께서「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셔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이 갈증을 느끼고 있을 때 그리고 오늘은 실로암 못의 행렬이 없다는 인식이 있을 때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셔라"라는 외침은 충격적인 외침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지금 신체적인 갈증을 말씀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실 수천 년 동안 이스라엘 중에 선포되었던 하나님의 말씀이 끊어진지 이미 400년이 되었을 때였기 때문에 사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갈급한 상태에 있었습니다.
*인간의 삼각구조*
인간은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 지음 받은 인간은 영과 의식과 육체 안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육체와 정신과 영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성경은 사람이 죄 안에 있을 때 그 영은 죽은 것이라 가르칩니다. 죄로 인하여 죽은 영은 성령에 의해 다시 살아날 때까지는 살아나지 못합니다. 또한 우리의 육체는 70%의 수분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주기적으로 물을 공급하여 주지 않으면 우리는 심한 목마름을 느끼게 됩니다. 따라서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은 모두 신체적인 갈증을 잘 이해하고 있습니다. 물론 우리 육체는 목마름 이외에도 식욕과 성욕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육체가 가장 참지 못하는 신체적인 욕구는 목마름입니다. 아마 숨쉬고자 하는 욕구 다음으로 강한 큰 신체적인 욕구일 것입니다.
신체의 수분비율이 낮아지면 그를 방지하기 위해 하나님이 여러분의 몸에 내장시킨 수분 감지 장치가 작동하여 우리의 뇌와 목으로 신호를 보냅니다. 목이 건조하고 입이 마르는 것을 느끼면 「물 마시고 싶다」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어쩔 도리가 없습니다. 「물을 마셔야 하는데...」「어디 물 마실 데가 없을까. 목말라 죽을 것 같다」라고 갈급하게 됩니다. 우리의 신체 구조상 수분의 필요를 위해 그렇게 반응하지 않으면 안되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의학적 용어로 생체항상성(homeostasis)라고 합니다. 다시 말하면 신체의 밸런스인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갈증에 대한 욕구를 만드신 것으로, 몸의 수분비율이 위험할 정도로 낮아지면 그에 대한 욕구도 그만큼 커지게 한 것입니다.
*욕구의 밸런스*
이와 같이 인간에게는 사회적 욕구가 있습니다.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 사랑에 대한 욕구입니다. 인간은 사랑을 필요로 합니다. 사랑에의 욕구가 있다는 것은 인간은 사랑을 받아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어느 인간 생태 학자가 유아들을 상대로 실험을 했습니다. 유아들을 로봇에 의하여 신체적인 접촉 즉 쓰다듬어 주거나 안아주거나 하는 사람의 접촉이 없이 기계로만 우유병을 물려 6개월 동안 키웠습니다. 그 결과 그 아이들에게서 불가역성(不可逆性)의 돌이킬 수 없는 정신지체(情神遲滯)현상이 일어나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이처럼 인간에게 있어서 사랑은 절대성 필요인 것입니다. 이 실험을 통하여 어린아이들이 일반적으로 기계적인 캐어(care)만 있을 때, 6개월이면 죽게 된다는 것이 입증 되었습니다
. 또한 인간은 보증(保證)에의 욕구가 있습니다. 이것은 감정적인 욕구에 해당되는 것으로서 사람은 무엇인가에 필요한 사람이 되고 싶은 욕구가 있습니다. 몇 십 년을 간병하던 사랑하던 남편이 세상을 떠나면 그 아내도 얼마 살지 못하고 죽는다는 임상실험이 발표된 바 있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자신이 더 이상 필요 없다는 생각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병든 남편을 간병한다는 것은 죽기보다도 힘든 고역이지만 병든 남편은 그 아내에게 절대적 필요한 사람이라는 의욕을 주는 삶의 원동력인 것입니다. 이 소망이 끊어질 때 인간은 의욕을 잃고 체념의 상태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사회적 혹은 감정적인 욕구라고 합니다. 일본에 있을 때 수십 년 동안 직장을 위하여 충성하던 사람들이 퇴직한 후에 허탈함을 이기지 못하여 자살하는 사람들을 많이 보아 왔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어느새 이제 우리나라도 파급되고 있는 실정입니다.
*영적인 욕구 *
그러나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부분은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성의 통로인 영적인 충족입니다. 모든 사람의 영의 깊은 곳에서 하나님을 필요로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영과 혼과 육으로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창조로부터 우리의 육체가 물을 필요로 하듯이 하나님과의 교제가 필연적이 되도록 창조된 것입니다. 바울은 로마서 8장에서 피조물이 허무한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케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롬8:20 참조)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인간의 심령 깊은 곳에서부터 하나님과의 관계를 간절히 갈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모든 인간이 태어남으로부터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람은 하나님과의 관계성을 떠나서는 불안해 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없다고 해도 이미 그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체험하려하는 사모(思慕)와 욕구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 모두에게 있는 보편적인 현상입니다. 오늘 본문에서와 같이 예수께서「누구든지 목마르거든」이라고 하셨을 때, 주께서는 바로 이 영혼의 목마름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모든 인간의 영 깊은 곳에 있는 하나님과의 의미 있는 관계에 있어서의 목마름을 말씀 하셨던 것입니다.
*마음과 육체의 관계*
그러나 인간은 육체와 혼과 영으로 되어있지만 영과 혼적인 부분은 일반적으로 무엇이 혼적인 것인지 무엇이 영적인 것인지를 구별하기가 혼동될 만큼 서로 밀접하게 융화되어 있습니다. 또한 우리들의 육체와 혼과 영은 매우 밀접한 융화를 이루고 있어서 어떤 한 부분이 우리에게 신체적인 영향을 끼친다면 곧 감정적인 영향으로 타나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어떤 것이 당신에게 감정적으로 영향을 끼치면 신체적으로도 영향을 줍니다. 이것으로 사람의 감정과 신체적인 건강이 서로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성경의 말씀 속에 그것이 시사되고 있습니다.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라도 심령의 근심은 뼈로 마르게 하느니라 (잠17:22)」행복하고 즐거운 마음은 약과 같다고 하고 있습니다. 즉 치유의 힘이 있는 것입니다. 한편 걱정이나 근심 비통함은 신체에 많은 해를 미칩니다. 우리 신체 속에서 감정이 특정한 화학물질을 만들어 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에베소에서는 너희가 화를 내어도 밤을 새지 말라고 가르칩니다. 그러므로 사람에게 있어서 감정은 신체적인 건강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의학적으로도 우리가 마음을 기쁘게 하면 우리의 체내에서 엔트로핀이 많이 분비되어 사람을 건강하게 한다고 합니다.
또한 어떤 것이 영적으로 영향을 끼치는 것은 당신에게 감정적으로 또 신체적으로 영향을 미칩니다. 그러나 이 영적인 부분을 감지하기란 아주 미묘한 것입니다. 이 처럼 인간은 육체와 혼 그리고 영은 어느 만큼 융화되어 있어 그 일부에 영향이 오면 자신 전체에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만, 사실 엄격히 말하여 그것은 각각 서로 다른 부분입니다. 예를 들어 감정적인 필요를 영적인 체험으로 채우는 것을 할 수 없습니다. 이것을 쉽게 설명하면 우리는 물을 마셔야만 합니다. 그러나 이것을 사랑으로 대신 할 수는 없습니다.
또한 인간은 애정을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그 사랑을 빵으로 해결할 수는 없습니다. 만약 당신이 사막에서 물이 없어서 죽어 가는 한 사람을 만났다고 합시다. 그 사람에게 물 대신 성경말씀으로 그를 충족시켜서 회생할 수 있다고 고집을 부린다면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무지몽매함을 책망하실 것입니다. 따라서 배고픈 사람에게는 밥을, 목마른 사람에게는 물을, 그리고 지식이 필요한 사람에게는 지식을, 사랑이 부족한 사람에게는 애정이 필요합니다. 이와 같이 우리의 영은 하나님의 말씀을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감정과 영적인 관계 *
다시 말씀드리지만 그 어떤 것이 당신의 감정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영적 영향을 미칩니다. 또 영적인 공격은 당신의 감정과 건강에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이것들은 서로 밀접하게 융화되어 있어 우리 자신이 감정적인 공격을 받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영적인 공격인지를 분별하기가 곤란한 경우가 많습니다. 어느 때는 구별이 어렵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것을 구분 할 수 있도록 영 분별의 은사를 주시는 것입니다.
어느 때는「아아, 감정이 상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적의 영적(靈的)공격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사실 당신은 강한 영적인 공격을 받고 있는 것일 수 있습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에 대하여 성경은「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뜻과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히4:12)」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이처럼 예리합니다. 많은 경우 사람은 자신이 깊은 영적인 경험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사실은 단순히 감정적인 경험일 뿐인 경우가 있습니다. 감정을 다루고 있느냐 아니면 영적인 부분을 다루고 있느냐의 차이를 가르치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따라서 하나님 말씀이 정립되지 않았다면 그 사람이 분변한다는 영적인 부분에는 많은 오해의 소지가 있을 수 있습니다. 이로 인하여 우리 영이 갈급하다는 것은 이러한 부분을 충족하기 위한 하나님의 말씀에 갈급하다는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필요의 우선순위의 중요성 *
성령이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계시므로 우리는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영적인 문제에 대처하게 되는데 목이 마를 때, 물이 필요한 것처럼 영적인 갈급에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득 채워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말씀이 우리 안에 내재하지 않으면 우리의 영은 고갈 상태에 빠지게 되어 그 영혼의 만족을 채우기 위하여 갈망하고 노력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때 사람들은 사이비 종교활동이나 우상숭배에 빠지게 되며 믿지 않는 자들은 그 영적인 갈급을 채우지 못한 괴로움을 메꾸기 위하여 술과 마약, 그리고 SEX. 오락 등에 빠져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영혼은 계속 더 깊은 갈증 속으로 빠지게 됩니다. 더욱이 우리 크리스챤등은 이 갈증을 채우기 위하여 종교행위로 빠져든다는 데 있습니다. 또한 인간의 이러한 인간의 절대성 필요 욕구에는 우선 순위가 있습니다.
성경은 이에 대하여 "네 영혼이 잘 됨과 같이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기도하노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영혼이 하나님과 온전한 관계를 갖고 있을 때 그 은혜가 다른 부분에 미치는 결과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이 우리 마음과 육체에 미쳐서 인생을 복되고 아름답게 살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묵상을 위한 질문)
1. 초막절 행사를 설명하라.
2. 예수께서 서서 외친 것은 무엇을 말한 것인가?
3. 인간의 기본 욕구에 대하여 설명하라?
4. 왜 인간은 하나님을 갈망하는가?
5. 당신의 영적 갈급함을 무엇을 충족할 수 있는가?
6. 당신의 예배와 타종교의 예배를 비교해 보라.
7. 우리의 예배의 초점은 어떻게 되어야 하는가?
*최대의 관심사 *
오늘은 요한복음 제 7장 37절의 말씀을 가지고 성령 충만과 성령세례에 대하여 공부하겠습니다. 오늘의 본문 속에서 사도 요한은 성령세례와 성령 충만 그리고 성령의 은사는 과연 어떤 경험인가를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 .」문맥을 볼 때 이것은 초막절임을 알 수 있습니다. 앞 문장을 살펴볼 때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오셔서 마지막 날 곧 큰 날이 이르기까지 주목할 만한 일을 행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께서는 명절 중간에 올라 가셨는데 수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행적이 최대 이슈가 되고 있었습니다. 이번 명절에도 예루살렘에서 기적을 행하실까 하는 생각들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러나 뜻밖에도 예수께서는 그들 속에서 아무런 기적을 행하지 않으시고 다만「너희가 나를 찾아도 만나지 못할 터이요 나 있는 곳에 오지도 못하리라」고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은 그 말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궁금증만을 더해 갔습니다. 예수께서는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최대 관심사를 유발시키고 있으셨는지도 모릅니다. 인간에게는 이러한 심리가 있기 때문이지요.
드디어 초막절 최고의 절정인 마지막 날 곧 큰 날이라고 불리는 8일째가 되었습니다. 이 때 예수께서는 군중의 한가운데 서서 큰 소리로 외치셨습니다. 장막절이라고도 부르는 초막절은 지나간 조상들이 광야를 40년 간 방황할 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지켜주신 것을 기념하는 이스라엘 3대 명절 중 하나입니다. 사실 광야에서 40년 간 백성이 살아남은 것은 하나님의 기적이었습니다.
오늘날도 이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정통파 유대교도들은 집에서 나와 야자수 잎으로 지붕을 엮은 작은 오두막을 만듭니다. 그리고 가족들은 일주일간 밖으로 나와서 야자수 잎으로 지붕을 엮은 작은 오두막에서 지냅니다. 지붕은 별들이 보이도록 야자수 나무 가지를 얼기설기 얹어 둡니다. 그렇게 하는 이유는 밤에 아이들이 「아아, 저기 별이 보이네」라고 할 때, 부모들이「우리의 조상이 40년 간 별을 보며 황야에서 살았을 때 하나님께서 40년 간 우리 조상들을 지켜주셨단다.」라고 말하기 위하여 입니다.
과거 40년 동안의 하나님의 은혜의 기억을 되살리기 위한 행사입니다. 그리고 낮이면 성전에서 예배드릴 때 제사장들은 금주전자를 어깨에 짊어지고, 성전의 안뜰에서부터 여러 계단을 내려가 아래의 기드론 골짜기에 있는 실로암 못으로 내려갑니다. 거기에는 이미 수천 명의 사람들이 운집하여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제사장이 금주전자를 메고 성전 안뜰을 향하여 갈 때 사람들은 제사장을 따라가며 일제히 시편 118편 할렐루를 부르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성전 마당에 도착하여 찬양이 절정에 이를 때에 제사장들은 어깨에 매고 온 주전자의 물을 마당에 쏟아 붓게 됩니다. 이것 또한 광야에서 조상들이 목이 말라 갈급할 때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물을 주셨음을 기억하게 한 것입니다.
*무엇이 갈급한가? *
결국 초막절은 과거 40년 간의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위하여 구원하신 일들을 기억하기 위한 축제이지요. 이 축제는 8일간 이어졌습니다. 그 8일째 되는 날을 그들은 큰 날이라고 부릅니다. 예수께서 큰 소리로 외친 때는 큰 날이라고 불리 우는 초막절 끝 날 즉, 8일째 되는 날이었습니다. 이 날은 제사장들이 실로암 연못으로 가는 행사는 없습니다. 이것은 이미 그들이 요단강을 건너 하나님께서 언약하신 안식의 땅, 가나안에 들어 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된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8일째 되는 날은 이미 7일 째에 하나님이 모든 것을 다 마치고 안식하신 날로서 하나님의 사람들은 안식을 누리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안식의 개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물이 풍부한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인도해 들이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이 있었습니다. 가나안 땅으로 들어 온 이스라엘 백성은 이제 기적을 통하여 바위에서 솟아 나오는 물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이미 약속의 땅에서 들어 왔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8일째의 명절에는 물주전자 행렬이 없었습니다.
이날에는 수천 명의 사람들이 안뜰에 운집하여 하나님께 예배하게 되는데, 그 때에 예수께서 서서 수천 명의 사람들을 향하여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셔라」라고 큰소리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기에 예수께서 서 계셨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들의 관습은 랍비는 앉아서 가르쳤고 학생은 언제나 서 있었습니다. 그러나 중대한 말씀의 포고나 선고를 할 때, 또는 진리를 선포할 때는 랍비는 회중들 앞에 일어서서 외쳤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그 때 그곳의 사람들은 목말라 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이해해야 합니다. 이스라엘은 아주 건조한 땅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갈증에 대하여 매우 민감합니다.
그 때 예수께서「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셔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이 갈증을 느끼고 있을 때 그리고 오늘은 실로암 못의 행렬이 없다는 인식이 있을 때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셔라"라는 외침은 충격적인 외침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지금 신체적인 갈증을 말씀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실 수천 년 동안 이스라엘 중에 선포되었던 하나님의 말씀이 끊어진지 이미 400년이 되었을 때였기 때문에 사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갈급한 상태에 있었습니다.
*인간의 삼각구조*
인간은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 지음 받은 인간은 영과 의식과 육체 안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육체와 정신과 영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성경은 사람이 죄 안에 있을 때 그 영은 죽은 것이라 가르칩니다. 죄로 인하여 죽은 영은 성령에 의해 다시 살아날 때까지는 살아나지 못합니다. 또한 우리의 육체는 70%의 수분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주기적으로 물을 공급하여 주지 않으면 우리는 심한 목마름을 느끼게 됩니다. 따라서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은 모두 신체적인 갈증을 잘 이해하고 있습니다. 물론 우리 육체는 목마름 이외에도 식욕과 성욕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육체가 가장 참지 못하는 신체적인 욕구는 목마름입니다. 아마 숨쉬고자 하는 욕구 다음으로 강한 큰 신체적인 욕구일 것입니다.
신체의 수분비율이 낮아지면 그를 방지하기 위해 하나님이 여러분의 몸에 내장시킨 수분 감지 장치가 작동하여 우리의 뇌와 목으로 신호를 보냅니다. 목이 건조하고 입이 마르는 것을 느끼면 「물 마시고 싶다」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어쩔 도리가 없습니다. 「물을 마셔야 하는데...」「어디 물 마실 데가 없을까. 목말라 죽을 것 같다」라고 갈급하게 됩니다. 우리의 신체 구조상 수분의 필요를 위해 그렇게 반응하지 않으면 안되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의학적 용어로 생체항상성(homeostasis)라고 합니다. 다시 말하면 신체의 밸런스인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갈증에 대한 욕구를 만드신 것으로, 몸의 수분비율이 위험할 정도로 낮아지면 그에 대한 욕구도 그만큼 커지게 한 것입니다.
*욕구의 밸런스*
이와 같이 인간에게는 사회적 욕구가 있습니다.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 사랑에 대한 욕구입니다. 인간은 사랑을 필요로 합니다. 사랑에의 욕구가 있다는 것은 인간은 사랑을 받아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어느 인간 생태 학자가 유아들을 상대로 실험을 했습니다. 유아들을 로봇에 의하여 신체적인 접촉 즉 쓰다듬어 주거나 안아주거나 하는 사람의 접촉이 없이 기계로만 우유병을 물려 6개월 동안 키웠습니다. 그 결과 그 아이들에게서 불가역성(不可逆性)의 돌이킬 수 없는 정신지체(情神遲滯)현상이 일어나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이처럼 인간에게 있어서 사랑은 절대성 필요인 것입니다. 이 실험을 통하여 어린아이들이 일반적으로 기계적인 캐어(care)만 있을 때, 6개월이면 죽게 된다는 것이 입증 되었습니다
. 또한 인간은 보증(保證)에의 욕구가 있습니다. 이것은 감정적인 욕구에 해당되는 것으로서 사람은 무엇인가에 필요한 사람이 되고 싶은 욕구가 있습니다. 몇 십 년을 간병하던 사랑하던 남편이 세상을 떠나면 그 아내도 얼마 살지 못하고 죽는다는 임상실험이 발표된 바 있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자신이 더 이상 필요 없다는 생각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병든 남편을 간병한다는 것은 죽기보다도 힘든 고역이지만 병든 남편은 그 아내에게 절대적 필요한 사람이라는 의욕을 주는 삶의 원동력인 것입니다. 이 소망이 끊어질 때 인간은 의욕을 잃고 체념의 상태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사회적 혹은 감정적인 욕구라고 합니다. 일본에 있을 때 수십 년 동안 직장을 위하여 충성하던 사람들이 퇴직한 후에 허탈함을 이기지 못하여 자살하는 사람들을 많이 보아 왔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어느새 이제 우리나라도 파급되고 있는 실정입니다.
*영적인 욕구 *
그러나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부분은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성의 통로인 영적인 충족입니다. 모든 사람의 영의 깊은 곳에서 하나님을 필요로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영과 혼과 육으로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창조로부터 우리의 육체가 물을 필요로 하듯이 하나님과의 교제가 필연적이 되도록 창조된 것입니다. 바울은 로마서 8장에서 피조물이 허무한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케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롬8:20 참조)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인간의 심령 깊은 곳에서부터 하나님과의 관계를 간절히 갈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모든 인간이 태어남으로부터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람은 하나님과의 관계성을 떠나서는 불안해 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없다고 해도 이미 그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체험하려하는 사모(思慕)와 욕구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 모두에게 있는 보편적인 현상입니다. 오늘 본문에서와 같이 예수께서「누구든지 목마르거든」이라고 하셨을 때, 주께서는 바로 이 영혼의 목마름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모든 인간의 영 깊은 곳에 있는 하나님과의 의미 있는 관계에 있어서의 목마름을 말씀 하셨던 것입니다.
*마음과 육체의 관계*
그러나 인간은 육체와 혼과 영으로 되어있지만 영과 혼적인 부분은 일반적으로 무엇이 혼적인 것인지 무엇이 영적인 것인지를 구별하기가 혼동될 만큼 서로 밀접하게 융화되어 있습니다. 또한 우리들의 육체와 혼과 영은 매우 밀접한 융화를 이루고 있어서 어떤 한 부분이 우리에게 신체적인 영향을 끼친다면 곧 감정적인 영향으로 타나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어떤 것이 당신에게 감정적으로 영향을 끼치면 신체적으로도 영향을 줍니다. 이것으로 사람의 감정과 신체적인 건강이 서로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성경의 말씀 속에 그것이 시사되고 있습니다.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라도 심령의 근심은 뼈로 마르게 하느니라 (잠17:22)」행복하고 즐거운 마음은 약과 같다고 하고 있습니다. 즉 치유의 힘이 있는 것입니다. 한편 걱정이나 근심 비통함은 신체에 많은 해를 미칩니다. 우리 신체 속에서 감정이 특정한 화학물질을 만들어 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에베소에서는 너희가 화를 내어도 밤을 새지 말라고 가르칩니다. 그러므로 사람에게 있어서 감정은 신체적인 건강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의학적으로도 우리가 마음을 기쁘게 하면 우리의 체내에서 엔트로핀이 많이 분비되어 사람을 건강하게 한다고 합니다.
또한 어떤 것이 영적으로 영향을 끼치는 것은 당신에게 감정적으로 또 신체적으로 영향을 미칩니다. 그러나 이 영적인 부분을 감지하기란 아주 미묘한 것입니다. 이 처럼 인간은 육체와 혼 그리고 영은 어느 만큼 융화되어 있어 그 일부에 영향이 오면 자신 전체에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만, 사실 엄격히 말하여 그것은 각각 서로 다른 부분입니다. 예를 들어 감정적인 필요를 영적인 체험으로 채우는 것을 할 수 없습니다. 이것을 쉽게 설명하면 우리는 물을 마셔야만 합니다. 그러나 이것을 사랑으로 대신 할 수는 없습니다.
또한 인간은 애정을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그 사랑을 빵으로 해결할 수는 없습니다. 만약 당신이 사막에서 물이 없어서 죽어 가는 한 사람을 만났다고 합시다. 그 사람에게 물 대신 성경말씀으로 그를 충족시켜서 회생할 수 있다고 고집을 부린다면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무지몽매함을 책망하실 것입니다. 따라서 배고픈 사람에게는 밥을, 목마른 사람에게는 물을, 그리고 지식이 필요한 사람에게는 지식을, 사랑이 부족한 사람에게는 애정이 필요합니다. 이와 같이 우리의 영은 하나님의 말씀을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감정과 영적인 관계 *
다시 말씀드리지만 그 어떤 것이 당신의 감정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영적 영향을 미칩니다. 또 영적인 공격은 당신의 감정과 건강에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이것들은 서로 밀접하게 융화되어 있어 우리 자신이 감정적인 공격을 받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영적인 공격인지를 분별하기가 곤란한 경우가 많습니다. 어느 때는 구별이 어렵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것을 구분 할 수 있도록 영 분별의 은사를 주시는 것입니다.
어느 때는「아아, 감정이 상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적의 영적(靈的)공격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사실 당신은 강한 영적인 공격을 받고 있는 것일 수 있습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에 대하여 성경은「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뜻과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히4:12)」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이처럼 예리합니다. 많은 경우 사람은 자신이 깊은 영적인 경험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사실은 단순히 감정적인 경험일 뿐인 경우가 있습니다. 감정을 다루고 있느냐 아니면 영적인 부분을 다루고 있느냐의 차이를 가르치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따라서 하나님 말씀이 정립되지 않았다면 그 사람이 분변한다는 영적인 부분에는 많은 오해의 소지가 있을 수 있습니다. 이로 인하여 우리 영이 갈급하다는 것은 이러한 부분을 충족하기 위한 하나님의 말씀에 갈급하다는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필요의 우선순위의 중요성 *
성령이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계시므로 우리는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영적인 문제에 대처하게 되는데 목이 마를 때, 물이 필요한 것처럼 영적인 갈급에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득 채워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말씀이 우리 안에 내재하지 않으면 우리의 영은 고갈 상태에 빠지게 되어 그 영혼의 만족을 채우기 위하여 갈망하고 노력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때 사람들은 사이비 종교활동이나 우상숭배에 빠지게 되며 믿지 않는 자들은 그 영적인 갈급을 채우지 못한 괴로움을 메꾸기 위하여 술과 마약, 그리고 SEX. 오락 등에 빠져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영혼은 계속 더 깊은 갈증 속으로 빠지게 됩니다. 더욱이 우리 크리스챤등은 이 갈증을 채우기 위하여 종교행위로 빠져든다는 데 있습니다. 또한 인간의 이러한 인간의 절대성 필요 욕구에는 우선 순위가 있습니다.
성경은 이에 대하여 "네 영혼이 잘 됨과 같이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기도하노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영혼이 하나님과 온전한 관계를 갖고 있을 때 그 은혜가 다른 부분에 미치는 결과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이 우리 마음과 육체에 미쳐서 인생을 복되고 아름답게 살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묵상을 위한 질문)
1. 초막절 행사를 설명하라.
2. 예수께서 서서 외친 것은 무엇을 말한 것인가?
3. 인간의 기본 욕구에 대하여 설명하라?
4. 왜 인간은 하나님을 갈망하는가?
5. 당신의 영적 갈급함을 무엇을 충족할 수 있는가?
6. 당신의 예배와 타종교의 예배를 비교해 보라.
7. 우리의 예배의 초점은 어떻게 되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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