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강좌/성령세례

<성령세례15> 성령세레의 체험(2)

이요나 2007. 2. 14. 12:23
<성령세례15> 성령세레의 체험(2)


*2% 부족할 때*
최근 10여년 만에 처음으로 감기를 앓았습니다. 아직도 앓고 있는 중입니다. 하루 이틀을 기도의 배짱으로 버티다가 항복하고 약국으로 달려갔습니다. 지난 화요 강좌와 목요강좌는 완전히 마귀 할멈의 목소리로 죽을 쑤었었습니다. 아마 그 날 테이프는 제 목회생활 속에 또 다른 기념품이 될 것입니다. 머리에서는 열이 나고 목에는 무엇인가 붙어 있는 것 같은 기분이었습니다. 약을 먹었더니 얼마나 물이 먹히는지 저는 오십 평생 이처럼 물을 많이 먹어 본일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티비 선전에서 2%부족할 때라는 Refreshing Water가 나를 유혹해 왔습니다. 그래서 핑계 김에 한 병을 사들었더니 이제는 아침저녁으로 다른 물을 거부하는 증세가 생기는 것이었습니다. 복숭아 향료에 시큼 달콤한 매력이 내 입맛을 봍잡고 목을 매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하루에 2통씩 8통을 마셔댔습니다. 참 이름을 아주 잘 지었다고 생각되었습니다.

우리의 믿음생활에도 이와 같이 2% 부족할 때가 있습니다. 분명이 무엇인가가 결여된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저는 많은 것이 결여 된 상태에서 갈보리채플의 사역자로 부름 받았습니다. 왜냐하면 나 역시 다른 사람들과 같이 한국교회의 신학적 풍토 속에서 성장했기 때문에 성경적인 풍족한 지식을 얻지 못하였었습니다. 그런데 갈보리채플의 사역자를 만나면서 그들과 교제 속에서 나의 부족함이 채워지기 시작했습니다.

최근 많은 사역자들을 만나면서 그들의 가르침 속에서 무엇인가 결여된 것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자신은 성령을 받았다고 하지만 기쁨이 없다던가, 입으로는 크리스천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만 얼굴에는 교회에 너무 열심한 나머지 세상에 대하여는 노여움을 서려 있었습니다. 사랑이 부족합니다. 필요 이상으로 비판적이었습니다. 또한 삶에 성실하지 못합니다. 어떤 이는 하나님을 향한 열정이 뜨겁지도 차지도 않고 그저 미적지근한 사람도 있습니다.

*고넬료 가정의 경험*
사도행전 10장에서 베드로는 가이사랴에 있는 고넬료라고 불리는 백부장의 집에 가도록 주께 명령을 받았습니다. 베드로가 고넬료의 집에 갔을 때, 고넬료는 많은 친구들을 불렀습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그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를 전도하였습니다. 그러자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왔습니다(10:44) 즉 에피의 관계가 이루어 진 것입니다. 성경의「베드로와 함께 온 할례 받은 신자들이 이방인들에게도 성령 부어주심을 인하여 놀라니(10:45)」라는 기록으로 보아 이 사람들은 그들에게 성령의 선물을 부으셨음을 알아차렸습니다.

그것은 이들이 방언을 말하며 하나님 높임을 들었기 때문이었습니다(10:46) 다음의 기록들로 보아 이들에게 성령 세례는 물세례 받기 전에 이루어졌습니다. 즉 이들에게 임한 성령의 선물은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이루어진 것으로서 베드로는 이미 이들에게 하나님께서 성령을 선물로 주셨기 때문에 이방인에게도 세례를 베풀어도 좋다고 결정하셨습니다.

고넬료의 집의 경우는 성령 충만과 회심은 동시에 일어났던 체험인 듯 싶습니다. 그들은 이미 회심하였고 성령충만 되었습니다. 이에 대하여 베드로는 예루살렘 공회에서 이 사건에 대하여 「내가 말을 시작할 때에 성령이 저희에게 임하시기를 처음 우리에게 하신 것과 같이 하는지라 내가 주의 말씀에 요한은 물로 세례를 주었으나 너희는 성령으로 세례 받으리라 하신 것이 생각났노라(11:15-16)」 그렇기 때문에, 베드로는 「나는 그저 그들에게 말을 전한 것뿐입니다.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모두 성령께서 하신 일이십니다」고 말한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요한은 물로 세례를 주었으나, 너희는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라 하신 것"이 생각났다는 베드로의 증언에 귀를 기우릴 필요가 있습니다. 그들은 이미 성령으로 충만되어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성령의 선물」,「성령의 세례」,「성령충만」이라는 용어는 같은 사건을 묘사하고 호환적 용어로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학자 아볼로의 경험*
사도행전 19장에서 사울은 에베소로 갔습니다. 에베소는 아시아의 통로이었습니다. 아시아에서 유럽의 산물은 모두 에베소를 거쳐 나갔습니다. 이 때 바울이 에베소에 간 것은 처음이 아니었습니다. 사도행전 18장을 보면 바울은 고린도에서 장막치는 사람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를 만났습니다. 이들이 예루살렘으로 되돌아가기 위해 고린도를 출발했을 때 바울은 유대인의 축제를 위해 예루살렘에 돌아갔지만 그들은 에베소에 머물렀습니다. 그들이 그곳에 있을 때 어떤 유대인으로 총명한 웅변가 한사람을 만났습니다. 그 사람은 에집트 알렉산드리아 출신으로 성경에서 예수가 메시아인 것을 증명할 수 있는 성경을 정통한 학자였습니다.

그 사람은 에베소에서 유대인에게 예수가 메시아인 것을 성경에 의해서 증명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듣자니 그 사람의 신학 중에서 완전하지 않은 부분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아볼로를 데려다가 자신들이 바울을 통하여 배운 진리를 자세히 풀어 가르치므로, 아볼로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확실한 지식을 터득하였습니다. 우리에게 무엇인가 결여된 것이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아볼로는 당대 학자였습니다. 애굽에서 공부한 유대인으로서 대단한 지식가였습니다. 성경으로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가르칠 수 있는 학자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무언가 결여된 것이 있었습니다.

*믿을 때냐, 믿은 후냐?*
또한 바울이 에베소에 이르렀을 때 주의 일을 하는 제자들을 만났을 때, 그들에게서 주님과의 필연적 체험의 관계가 결여된 것을 발견한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것이 무엇인가를 파악하려고 「뭔가 이상한데」라고 생각하면서"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Since you believed) 어떤 학자들은 이 부분이 「믿을 때의(Since)」가 아니라 오히려 「믿었을 때(When), 성령을 받았느냐」라고 번역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만 이것은 어떻게 번역을 해도 크게 문제되지 않습니다. 양쪽 같은 의미의 해석입니다. 모두 다 성령을 부으심, 성령의 선물, 세례, 충만함은 믿은 후에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령 충만 즉 성령세례를 받지 않고서도 믿는 것은 가능합니다. 물론 「믿은 후에 성령을 받았느냐」라고 말한다면, 후에 있었던 것은 더더욱 명백합니다. 「믿을 때, 성령을 받았느냐」라고 말한다면 받아들일 수 있었지만, 아직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따라서 여기서도 성령세례, 성령 충만은 믿은 후의 일임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때 그들은 「우리는 성령이 있음도 듣지 못하였노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에 이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안수를 주자 그들에게 성령이 임하여 그들은 방언도 하고 예언을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베드로의 경우에는 베드로가 고넬료 사람들에게 설교를 할 때 성령이 임했기 때문에 나중에 물세례를 주었었는데 반면 에베소에서는 물세례를 준 후 안수를 통하여 성령의 충만함이 나타났습니다.

*모두 다른 체험이다 *
이와 같이 사도행전에서의 성령 충만의 상태를 묘사한 사건들은 똑 같은 체험은 아닙니다. 어떤 경우도 되풀이되어 일어났던 경험은 아닙니다. 가장 근접한 사건으로는 고넬료의 집의 체험과 제자들의 체험이지만 그 경우는 급한 강한 바람 같은 것도 없었고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것도 없었습니다. 단지 그들은 방언을 말한 것뿐이었습니다. 이것으로부터 하나님은 어떤 특정한 방식이나 방법에 묶여져 있는 분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생각하시는 방법대로 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이 누군가 다른 사람의 체험을 경험해 보려고 하는 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특히 교회생활 속에서 그러한 가르침은 매우 위험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의지대로 각 사람의 개성과 기질대로 그 사람에게 가장 적절한 방법으로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을 다루고 계십니다. 하나님을 공식화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다른 사람의 체험을 듣고 「아, 이러한 일이 일어나는구나. 이와 같이 하나님을 느낄 수 있는 것이구나」라고 생각하는 것은 위험합니다. 어떤 사람은 머리의 꼭대기에서 발끝까지 몸 안을 전류가 흐르는 것과 같았다 라고 말하는 사람을 들어 본적이 있습니다.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아직 그와 같은 경험을 한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적 사역*
나는 한 두 번 기절을 한 일이 있었습니다만 그것을 성령에 의한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나는 가끔 어떠한 힘에 이끌리어 기도에 몰입하게 되는데 그 때마다의 나타나는 느낌도 각각 달랐습니다. 어떤 때에는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은 아픔이 계속되기도 하고 어떤 때는 어떠한 향기에 휩싸인 것 같은 상태가 될 때도 있습니다. 의식이 있을 때도 있고 전혀 의식을 느끼지 못한 체 몇 시간이 흐렀을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내가 무엇인가를 생각하려하여도 그것이 집중되지 않고 오히려 내가 감지할 수 없는 그 무엇을 위하여 기도하고 있다는 감각만이 느껴 올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나는 가끔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인가하고 의심을 할 때도 있지만 어쨋든 나는 그 시간을 사모하고 있고 그 시간이 있음으로 하여 믿음을 충전받고 있습니다. 만약 내게서 그 시간을 빼앗아 간다면 나의 믿음의 생활은 걷잡을 수 없는 혼란으로 빠져들 것만 같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체험도 다른 사람들과 똑 같은 것은 아닙니다.

나도 때때로 미국의 전도자 페니가 겪었던 것처럼 몸이 거대한 바람에 부딛겨 밀쳐보았으면 하는 충동을 갖을 때도 있지만 저에게는 한번도 그러한 충격적인 체험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어떤 특정한 체험을 요구하는 것이 틀린 것이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너무 특정한 체험을 요구하여 체험신앙에 치우치기는 것은 잘못될 소지가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했던 비슷한 체험이 없었다고 해서, 하나님의 성령이 당신의 생활 가운데 역사하지 않고 계시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 해서 당신이 성령으로 충만하지 않다고 하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우리가 사도행전에서 나타난 많은 사건들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각 사람을 다르심에 있어서 그분의 주권적 사역을 하시고 계신다는 것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어떠한 경험과 체험을 통해서든 지 하나님은 성령의 체험을 원하는 당신에게 합당한 성령의 선물을 주실 것이라는 확신과 그 성령의 체험은 많은 사람들 가운데 역사하는 강력한 하나님의 능력이심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또한 이 능력은 그리스도의 증인에게 주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묵상을 위한 질문)

1. 요한의 물세례(침례)의 목적은 무엇인가?

2. 예수 그리스도의 세례(침례)의 목적은 무엇인가?

3. 그리스도인은 모두 거듭난(신생) 사람들인가?

4. 나의 구원과 거듭남은 어떻게 이루어졌는가?

5. Para와 En의 Epi의 상태를 설명하라

6. 당신은 성령세례의 체험을 한 일이 있는가?

7. 당신에게 있어 부족한 2%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