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강좌/휴거 대환난

9장 마지막 때의 일

이요나 2007. 2. 14. 19:45

9장 마지막 때의 일

 

충성된 빌라델비아 교회에 주신 것으로 주님은 이르시기를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 즉 내가 또한 너를 지키어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 이는 장차 온 세상에 임하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시험할 때라”고 하셨다.


이 구절을 예수님께서 대환난 중에서 우리를 지켜주시고 하나님의 보호해 주시는 능력으로 우리들로 하여금 무사히 대환난을 통과할 수 있게 해주시겠다고 하신 약속으로 해석한다면 그것은 참으로 왜곡된 해석이라 아니할 수 없다.


그같은 해석이 야말로 해석하는 사람이 가지고 있는 기존 견해에 부합되도록 성경에 없는 말을 두드려 꿰맞추는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 계시록 그 어디에도 대환난 기간 동안 하나님이 교회를 보호해 주시리라고 하신 말씀은 찾아볼 수 없다.


무슨 보호가 언급되었다면 그것은 오직 하나님께서 144,000명의 이스라엘 자손을 인치심으로써 그 후에 올 일부분의 심판을 면하게 해주셨을 때 뿐이다. 또한 12장에 나오는 여자가 큰 독수리의 두 날개를 받아 광야로 도망했을 때에도 단지 3년 반 동안 용으 진노를 피하기 위해서였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에서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 교회가 어찌하고 있어야 하는가에 대해 쓰면서 이르기를 “하나님이 우리를 세우심은 노하심에 이르게 하심이 아니요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하신 것이라”(5:9)고 하였다.


내 죄를 인하여 내가 받아야 할 심판을 예수님께서 내 대신 전부 받으신 후에도 하나님께서 나를 이 악한 세상과 함께 심판하실 것이라면 그것은 하나님의 공의로운 성품에 비추어 볼 때 너무나 앞뒤가 맞지 않는 일이다.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은 그리스도를 거절한 세상을 향한 것이다. 하나님으 자녀인 나를 왜 하나님께서 불의한 자들과 함께 헤아리시겠는가? 하나님이 우리를 세우심은 노하심에 이르게 하심이 아니다.

이사야 26장 19-21절을 보면 또 한가지 매우 흥미로운 약속이 기록되어 있다. 먼저 죽은 자들의 부활에 대해 말씀하신 주님은 이어서 “내 백성아 갈지어다. 네 밀실에 들아가서 네 문을 닫고 분노가 지나기까지 잠간 숨을지어다. 보라 여호와께서 그 처소에서 나오사 땅의 거민의 죄악을 벌하실 것이라. 땅이 그 위에 잦았던 피를 드러내고 그 살해당한 자를 다시는 가리우지 아니하리라”고 하셨다.


이사야는 여기서 주님이 땅의 거민을 벌하기 위해 오실 날, 즉 대환난 기간을 예언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에게 그들의 밀실에 들어가서 문을 닫고 분노, 곧 대화난이 지나기까지 잠간 숨어있으라고 하셨다. 이 말씀은 유대인들에게 페트라 암벽 사이에 마련한 성채로 도망가서 그곳에 숨어 대환난을 피하라고 하신 말씀일 것이다.

이같으 내용은 16장에서도 언급되고 있다. “나의 쫓겨난 자들로 너와 함께 있게 하되 너 모압은 멸절하는 자 앞에서 그 피할 곳이 되라. 대저 토색하는 자가 망하였고 멸절하는 자가 그쳤고 압제하는 자가 이 땅에서 멸절하였으며 다윗의 장막에 왕위는 인자함으로 굳게 설 것이요 그 위에 앉을 자는 충실함으로 판결하며 공평을 구하며 의를 신속히 구하리라.”(16:4)

 

이 장에서 주님은 적 그리스도가 나타나 유대인들을 멸절시키려 할 때 그 쫓겨난 유대인들을 받아들이고 그들을 위해 셀라, 곧 페트라에 피난처를 제공해 주라고 모압 백성들에게 명하고 계신 것이다. 만약 이 약속이 유대인들에게 주신 것이라면 어찌 주님께서 유대인들은 대환난으로부터 보호해 주시면서 교회는 그대로 내버려 두시겠는가?

만일 주님이 대환난으로부터 교회를 보호해 주실 것이라면 그 약속들은 어디에 있는가? 도대체 성경 어디에서 하나님은 대환난 기간 동안 교회가 해를 입지 않도록 교회에 인을 치거나, 보호하거나, 표를 주시겠다고 하셨는가? 마지막 떼에 일어날 일들에 대해 그토록 자세히 적어놓은 계시록에서 대환난을 이기고 교회가 살아남을 것이라는 약속은 어디에 기록되어 있는가?


누가복음 21장에서 예수님은 다시 한 번 예수님의 재림과 대환난에 대하여 말씀하셨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 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 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 이 날은 온 지구상에 거하는 모든 사람에게 임하리라. 이러므로 너희는 장차 올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21:34-36)


여기서 예수님은 장차 올 무슨 일을 피할 수 있도록 기도하라고 하셨는가? 예수님은 절대로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는 일을 피할 수 있도록 기도하라고 하시지는 않았다. 예수님께서는 장차 올 저 대환난을 우리가 능히 피할 수 있도록 기도하라 하신 것이니, 우리에게 이것말고 더 피하고 싶은 것이 또 무엇이 있겠는가? 나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늘 깨어 기도하고 있다. “주님,저도 이 대환난을 능히 피하고 인자 앞에 설 저 복된 무리 중 하나가 될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나는 계시록 5장에 나와 있는 것처럼 예수님께서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 손에서 두루마리 책을 취하실 때 그 앞에 선 큰 무리의 한 사람으로서 나도 하나님으 보좌 앞에 서 있게 될 것을 믿는다. 일곱 인이 데어지고 하나님의 진노가 그리스도를 거절한 이 경건치 못한 세상 위에 퍼부어질 때 나는 지상에 남아있지 않을 것으로 믿는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다시 오신다는 사실은 모든 믿는 이들에게 복된 소망이 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위대하신 하나님이시요,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화로운 재림을 뜨겁게 사모하며 기다리고 있다. 구약은 하나님이 온 세상을 심판하셨던 두가지 사건을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다. 하나는 노아 시대에 임했던 대홍수요, 다른 하나는 롯이 살던 소돔을 멸했던 불과 유황이다. 예수님은 당신이 재림하실 때가 이 두 사건이 일어났던 당시와 비슷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마 24:37) “또 롯의 때와 같으리니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심고 집을 짓더니 롯이 소돔에서 나갇던 날에 하늘로서 불과 유황이 비오듯하여 저희를 멸하였느니라.”(눅 17:28-29) 두 사건 모두에서 의인은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기 전에 구원을 받을 수 있었다.


여기서 하나님께서 손수 방주의 문을 닫아주심으로써 물심판으로부터 보호해주셨던 노아가 하나님의 인치심을 받을 144,00명의 예표라 한다면, 롯은 대환난 전에 옮기워질 교회의 예표라 할까? 뿐만 아니라 다니엘서에서 세명으 히브리 소년들이 풀무불 속에서도 상하지 않고 하나님으 보호를 받았던 경우는 또 어떠한가?

 

여기서 우리가 궁금해하는 점은 바로 “이 때 다니엘은 어디에 있었는가?” 하는 것이다. 그 때 다니엘은 느부갓네살 왕의 신상에 절을 하였을까? 그랬을 리가 없다면 그는 왜 잡혀 친구들과 같은 벌에 처해지지 않았을까? 다니엘은 이 때 신비하게도 어디론지 그 행방을 감추어버렸다.

많은 사람들은 이 이야기 속에 나오는 느부갓네살 왕의 신상이 계시록 13장에 나오는 짐승의 우상의 예표이며, 세명의 흐브리 소년들은 대환난 기간 동안 하나님의 보호를 받을 충성된 이스라엘 자손들의 예표이고, 다니엘이야말로 대환난을 피해 휴거될 교회의 예표라고 말한다.


마지막으로, 교회사적으로 볼 때 휴거는 전통적인 교리가 아니었다는 견해에 대해 한마디 아니할 수 없다. 만일 우리가 전통적인 교회사를 논함에 있어 신약 성경 속에 등장하는 교회도 교회사의 일부분을 차지한다고 본다면, 초대교회가 예수님의 임박한 재림을 고대하고 있었다는 증거는 성경 속 여러 군데에서 찾아볼 수 있다.


초창기 크리스천들은 예수님께서 언제라도 그들을 데리러 올 것을 기대하고 있었다. 데살로니가전서 4장에서 그곳 교인들은 그들이 사랑했던 사람들이 예수님이 재림하시기 전에 죽어서 왕국시대의 복락을 누리지 못하게 되었음을 슬퍼하고 있었다.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빌 3:20-21)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기대가 교회 역사가 길어지면서, 특히 중세 시대에 접어들면서 급속히 식어갔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뿐만 아니라 교회 역사가 길어지면서 형성된 전통적 교리 가운데에는 많은 모순된 교리들도 포함되어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전통적 교리를 가르치는  교회(카톨릭)가 행하는 유아 세례를 통한 중생이 그 한 예이다. 그러나 나는 세례를 받음으로써 유아들이 거듭날 수 있다는 것은 성경이 가르치는 바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전통 교회들은 또 마리아와 죽은 성자들의 중보기도를 가르치고 있는데 이 역시 성경이 가르치는 바가 아니라고 본다.


전통 교회의 가르침에는 교황의 무오성도 포함되는데 나는 교황이 무오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같이 전통 교회의 교리에는 우리는 도저히 동의할 수 없는 비성경적인 것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음을 간과해서는 아니될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전통 교회의 교리들이 모든 면에서 완벽한 교리라고 보지 않으며, 전통 교회 자체를 우리가 본받아야 할 모범적 교회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우리의 모범이 될만한 교회는 오직 사도행전에 등장하는 교회 하나뿐이다.

 

그외의 교회들은 다 변질된 교리들을 안고 있다. 사도 요한이 계시록을 썼던 시점은 주후 1세기가 채 끝나기도 전이었다. 그러나 그 때만 해도 그동안 얼마나 많은 거짓 교훈들이 교회 안으로 몰래 숨어들어 왔으면 예수님께서는 계시록 2장과 3장에서 교회에 대고 거듭 꾸짖으시며 그들에게 회개할 것을 요구하고 계시지 않는가?

세간에는 또 휴거에 대한 열성과 그에 관련된 개념들이 ‘플리머스 형제들’사이에서 싹텄다는 주장이 있다.
이야기인즉 영국의 한 모임에서 어떤 여자가 예언의 은사를 받아 온 교회에 권면하기를 주님이 곧 교회를 데려가실 것이며, 그리하심으로써 다가올 진노로부터 교회를 구하실 것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나서 다비(J.N.Darby)나 스코필드(Scofield) 같은 이들이 이같은 견해를 널리 퍼뜨리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다니엘 12장에 보면 다니엘이 마지막 때에 있을 모든 일의 결국이 과연 어떠할지를 깨닫지 못하여 주님께 묻는 장면이 나온다. 그 때 주님은 다니엘에게 이르시기를 많은 사람이 빨리 왕래하며 지식이 더할 마지막 때까지 주님께서 들려주셨던 여러 말씀들을 봉함하여 간수하라고 하셨다. 다니엘서의 문맥으로 볼 때 ‘지식이 더함’은 마지막 때까지 봉해져 내려오던 예언적 진리들에 대한 지식이 늘어가는 것을 의미한다.

이제 바야흐로 주님이 당신의 교회를 이 세상으로부터 데려가실 그 날이 가까와 옴에 따라 주님께서 대환난 전에 교회를 들어올리실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로 하여금 점점 더 뚜렷이 의식하게 하시는 것이라면 그것은 매우 시기 적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왜 주님은 휴거의 진리를 루터나 칼빈, 혹은 다른 개혁 교회의 지도자들에게는 계시하시지 않았을까? 그들은 교회가 들림받을 시기에 살던 사람들이 아니였기 때문이다.


다니엘서는 마지막 때까지 그 의미가 봉해져 있어야 할 책이었다. 이제 우리가 바로 그 마지막 때를 살고 있으며, 우리 시대에 이르러 다니엘 12장4절에 나온 것처럼 예언에 대한 지식은 더해져 갈 것이다. 우리가 사는 이 마지막 때에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약속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새로운 눈을 뜨게 하시고 새로운 의미들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해주실 것이라고 보는 것은 타당한 주장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흥미롭게도 교회의 휴거를 믿는 자유주의 신학자는 하나도 없다. 반면에 우리 세대를 살고 있는 복음주의 교회의 절대 다수는 모두 휴거에 대한 복된 소망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진실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곧 오실 것을 믿으며, 그가 이제라도 우리들을 이 사악한 세상으로부터 데려가실 것을 고대하고 있다. 아멘, 주 예수여, 속히 오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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