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강해/창세기 강해

(창세기 50장) 하늘을 진동하는 노래

이요나 2007. 2. 15. 11:49

(창세기 50장) 하늘을 진동하는 노래

 

(창50:18-21) 그 형들이 또 친히 와서 요셉의 앞에 엎드려 가로되 우리는 당신의 종이니이다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두려워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당신들은 두려워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 하고 그들을 간곡한 말로 위로하였더라

 

야곱은 누구인가?

오늘의 이스라엘의 이름의 창시자이며 믿음의 조상에 반열에 오른 야곱, 그는 이삭의 장자도 아니면서 더욱이 형 에서의 장자권을 교묘한 방법으로 탈취한 완악한 속성을 지닌 인간임에도 불구하고 명실공히 아브라함과 이삭을 이은 믿음의 조상이 되었다. 그것은 오직 창조자의 전지하심 속에서 이루어진 주권적 택함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성경은 내가 야곱은 사랑하였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라고 하셨다.(롬 9:13)

 

지금도 그의 시체는 막벨라 굴에 안치되어 다른 시체들과는 달리 그의 형체를 그대로 보존하고 누워 있을 것이다. 그는 애굽 제왕이 아님에도 애굽의 왕들의 장례법에 따라 40일 간의 향료를 넣는 의식 속에서 미이라가 되어 명실공히 요셉의 유골과 함께 유일하게 이스라엘 열조의 무덤 가운데서 유골이 보존된 사람이다.

 

아직도 애굽의 신비의 염습은 미스테리 속에 있다. 그들은 죽은 사람들의 영혼이 다시 돌아올 날을 위하여 제왕들의 시신에 40일간 향료를 넣어 미이라로 만들었다. 이것은 21세기의 현대 의학과 과학으로도 접근하지 못하는 미스테리로 남아있다.

 

요셉은 아버지 야곱이 임종을 하자 아버지의 시신을 제왕의 예법을 갖추어 보존하게 하고 애굽의 대신들을 바로에게 보내어 자신이 아버지의 유언대로 가나안에 내려가 아버지의 시신을 안치하고 올 수 있도록 주선해 주기를 요청한다.

 

아마 이것은 그만큼 요셉이 애굽의 국가적 안위를 감당하는 중대한 치리자였기 때문에 자신의 요청이 거절될 수도 있다는 판단 때문에 국가의 대신들의 중론에 부치게 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처럼 요셉은 현실적인 문제를 해결하는데도 신중하게 대처하는 지혜의 사람이었다.

 

장엄한 행렬

대신들의 요청에 의하여 바로의 허락을 받은 요셉은 아버지의 야곱의 장례를 바로의 모든 대신들과 바로 궁의 장로들을 대동하여 국장을 치룬다. 참으로 엄청난 장례 행렬이었을 것이다. 요셉은 야곱의 자손들 중 어린 아이들과 짐승 떼만을 고센에 남겨두고 대대적인 병거와 기병을 대동한 엄청난 규모의 장례 행렬을 이끌고 가나안의 아브라함이 헷 족속에게 산 땅 막벨라 굴까지 갔다.

 

이 막벨라 땅을 가려면 후일 모세가 건넜던 홍해를 건너 사해 동편을 거쳐 요단강을 건너 이르게 되는데 후일 이 길은 모세의 후계자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돌아가게 된다.

 

그들은 모압 사람의 땅 아닷 곧 지금의 요르단 땅에 들어가 7일 동안 크게 호곡하였는데 당시의 가나안 사람들이 아닷 타작 마당의 애통함을 보고 애굽사람들의 큰 애통이라 하였다. 우리는 이것을 통하여 야곱의 장례의 행렬이 얼마나 장엄하였으며 그 장례를 행하는 의식이 얼마나 진실했었는 가를 알 수 있다.

 

한 사람의 지혜로 국가와 민족의 생명을 지키고 아직 국가의 안위가 요셉의 손에 달렸다고 볼 때 요셉의 슬픔은 곧 그들 전체의 슬픔이 아닐 수 없었다. 이렇게 하여 이스라엘의 12방백을 낳은 야곱의 유해는 그의 할아버지 아브라함과 이버지 야곱이 잠들고 있는 막벨라 굴에 안치되었다.

 

두려움과 죄사함

그러나 장례를 치르고 다시 애굽의 땅 즉 자기의 어린 자식들이 있는 고센 땅으로 돌아 온 요셉의 형제들은 아버지 야곱이 없는 자기들의 장래에 대한 불안에 사로잡히고 만다. 그들은 요셉의 앞에 나아가 자기들의 생명을 위하여“당신의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명하여 이르시기를 너희는 이같이 요셉에게 이르라 내 형들이 네게 악을 행하였을지라도 이제 바라건대 그 허물과 죄를 용서하라 하셨다”라고 고하며 요셉의 앞에 엎드려“우리는 당신의 종이다”라고 울부짖었다.

 

죄책감이란 것은 인간의 마음 속에서 떠나지 않는 형벌 중의 형벌이다. 이 사건은 이미 39년 전의 일인데도 그들 머리 속에서는 지워지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요셉은 형제들을 만류하며“두려워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 하리이까?”라고 답변함으로서 죄에 대한 형벌의 주권이 하나님께 있음을 알려주었다. 이것은 신약 시대에 해당하는 용어인데 요셉은 지금 그에 대한 대답을 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께서 중풍병자의 죄를 용서해 주시는 것을 보고 놀라는 서기관들에게“내게 죄 사하는 권세가 있음을 너희에게 알리고자 한다”(마 9:6)고 하셨다. 또 성경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이 인자됨을 인하여 세상의 모든 심판을 그에게 주셨다고 기록하였다.

 

요셉은“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셨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만민의 생명을 구원케 하셨다”라고 말함으로써 이 모든 일이 하나님의 손에서 이루어졌음을 설명하였다. 하나님의 사람들에 관한 모든 일은 하나님의 손에서 이루어지는 대 서사시일 뿐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 하여 선을 이루게 하신다.

 

무엇을 배우는가

최근 나는 요셉에 해당하는 칼럼을 쓰면서 참으로 큰 것을 배웠다. 인내라는 단어다. 특히 나는 조급한 성격 때문에 큰 것을 잃는 일이 많았었다. 이것은 우리 한국 민족의 대표적인 성격이기도 하다. 지나간 우리의 역사를 보면 우리 민족은 온유한 심령을 지닌 대기만성형 민족이었는데 근래의 한국인 속에서는 조급한 성품만 발견하게 된다.

 

교육 정책에서부터 하다 못해 도시 계획에 이르기까지 10년을 내다보지 못하고 정책을 집행하는 바람에 엄청난 국가 예산만 축내고 있다. 국가 예산은 모두 국민의 세금으로 거두어들인 것인데도 해마다 봄이면 산불에 신경을 곤두세워야 하고 여름이면 장마 때문에 하늘을 쳐다보아야 한다.

 

며칠 전 텔레비전에서 일본의 식수난을 해결하기 위한 정책으로 각 가정은 물론 비닐 하우스를 재배하는 농민으로부터 대 기업에 이르기까지 빗물이 지하로 잘 스며들게 하는 장치를 만들고 그 물들을 다시 여과하여 일상생활용수로 사용하는 것을 보고 참으로 재난을 대비하는 지혜있는 일본 국민들의 모습을 보았다.

 

우리나라의 텔레비전은 그 흔한 드라마 속에서도 식수는 물론 커피 물과 쌀 씻는 물까지도 상표가 붙은 생수를 사용하는 장면들로 일색이다. 무조건 사서 쓰기만 하면 된다는 의식이 만연되어 가고 있다.  

 

앞으로 세계 경제는 유럽의 완전한 통합정책이 이루어질 때까지 세계는 물리고 먹히는 불안 속에 몇 번의 재주를 넘어야할 것이며, 준비하지 못한 나라의 백성들은 땅 속 깊은 곳으로 꺼지는 지진을 수 차례 경험해야 할 것인데 이미 IMF를 경험한 우리나라는 이 문제가 끝나지도 않은 상태에서 과소비가 만연되고 있다.

 

이만큼 우리 민족은 아직 선진국 수준의 의식구조가 형성되지 못한 상태이다. 그런 중에서도 교회만 많이 설립하고 하늘 높이 치솟기만 하면 되는 것인지 우리나라 교회사에 성수대교와 삼풍백화점의 사건이 비화되지는 않을는지 자못 걱정스러워진다.

 

그리스도의 가르침

요셉은 자기 형제들을 위로하며“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겠다”고 하였다. 참으로 요셉은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이라고 할 수 있다. 오늘의 이 장면은 후일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에 그때서야 예수께서 메시야이셨음을 알고 그를 십자가에 못박도록 내어주었던 두려워서 떨고 울부짖는 자기 백성들에게“두려워 말라 하나님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기 위하여 나를 십자가에 다셨다”라고 하시며 그들을 용서하시고 도리어 위로하실 모형인 것이다. 따라서 오늘을 사는 우리 또한 세상이 우리를 어떻게 핍박하더라도 그것이 나를 부르시는 하나님의 계획이심을 깨닫고 참고 인내해야 할 것이다.

 

나는 최근 안양 교도소 재소자 정신 교육 강사를 맡던 중 내가 한국 교단의 교단 소속 목사가 아니라는 이유로 출입의 제지를 받았다. 물론 이 일의 발단은 어느 한 목사의 개인적 권위에서 시작된 것이었다.

 

얼마전 칼럼에 소개되었던 내용, 즉 그동안 내가 상담해온 18명의 교도소 재소자 성경 공부를 제지한 안양 교도소 교육부 과장의 처사에 대하여 항의한 독자의 편지를 받고 취해진 조치이다. 물론 나는 이에 대하여 문제를 제기할 수도 항변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전날 주께서는 내게 앞으로 일어날 일들에 대해 미리 말씀해 주셨었다.

 

이러한 일들이 어디 한두 번이었는가? 대교회 목사가 아니기 때문에 크리스천 교계신문의 칼럼에서 제지되었던 일, 박사 학위가 없다는 이유로 신학교에서 거절된 일, 어느 청소년 집회에서 강사초청에 거절된 일 등을 다 적을 수 없을 정도다. 그러나 나야 그럴만한 이유가 충분히 있기 때문에 참을 수밖에 없었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 어떻게 그러한 수모를 참으실 수 있으셨는지 자못 궁금하다.

 

이제 우리의 차례다

그 후 요셉은 애굽의 총리와 두 아들의 아버지, 그리고 이스라엘의 족장들을 보호하며 키우는 목자로서의 삶을 마치고 110세에 그 여생을 마감한다. 그러니까 야곱이 죽은 지 54년 후의 일이다.

 

그동안 요셉은 에브라임과 므낫세에게서 증손자들을 보았다. 그는 죽음 직전에 그의 형제들을 모아 놓고 다음과 같이 유언을 한다.“나는 죽으나 하나님이 너희를 권고하시고 너희를 이 땅에서 인도하여 내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땅에 이르게 하시리라 하고 요셉이 또 이스라엘 자손에게 맹세시켜 이르기를 하나님이 정녕 너희를 권고하시리니 너희는 여기서 내 해골을 메고 올라가겠다 하라” 임종 직전에 그는 자기의 잠든 시신에 대한 유언을 부탁하는 것이다.

 

이 유언을 하게 된 이유는 그가 비록 애굽 땅을 치리하는 지도자였으나 그의 영혼은 하나님의 나라인 가나안에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하여 히브리서는 아주 멋있는 표현으로 그의 죽음을 찬양하였다.“믿음으로 요셉은 임종시에 이스라엘 자손들의 떠날 것을 말하고 또 자기 해골을 위하여 명하였으며…”(히 11:22) 이처럼 요셉은 믿음의 사람이었다.

 

그는 자기의 시체에 대하여 명령할 정도로 그 일이 성취될 것을 믿고 있었던 것이다. 아무리 자기 민족이라도 애굽의 총리가 되어 애굽을 구한 국가적 지도자의 시신을 메고 천리 만리 타국으로 가지고 나간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더욱이 요셉의 예언이 어느 시대에 이루어질 것인지도 모르는 일이 아닌가? 지금 이 글을 보시는 여러분의 마음은 어떠한가? 여러분의 육체가 이 땅에서 고이 묻혀있기를 원하는가? 비록 우리는 이 땅에서 살고 있지만 우리의 영혼이 갈 하늘나라를 소망해야 한다.

 

우리의 믿음은 우리가 장차 주님과 함께 거할 날을 믿고 잠시 우리 육체를 이 땅에 묻는 것뿐이다. 아니 사실 우리의 육체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함께 이미 땅에 묻힌 것이다. 지금 살아 있는 우리의 몸은 살아있는 성령의 전으로 곧 다가올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의를 덧입기를 소망하는 의의 몸이 살아 있을 뿐이다.

 

막을 내리며

위대하시고 거룩하신 나의 하나님 아버지 우리에게 이처럼 위대하신 생명의 말씀을 주심을 감사합니다. 이제로부터 나의 영혼이 주의 말씀에 힘을 입어 말씀을 따라 살도록 인도하여 주옵시고, 세상사는 동안 힘들고 고통스러운 일들을 만날 때 나의 믿음이 떨어지지 않게 하셔서 성경에 기록된 모든 믿음의 선진들이 세상 가운데서 환란과 핍박을 받았음을 기억하게 하옵시고, 오직 주를 믿는 믿음으로 다음에 올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참고 인내하는 지혜를 갖게 하옵소서.

 

모든 것을 주께 맡기고 기쁨으로 주를 찬양하며 주께서 하신 모든 말씀들을 주야로 묵상하며 믿음의 사람으로 온전한 삶을 마치게 하옵소서. 또한 글을 읽는 모든 사람들과 함께 주의 영광을 보게 하여 주옵소서. 지금까지 우리에게 주신 이 모든 말씀에 감사를 드리오며 나의 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아멘!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