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강해/창세기 강해

(창세기 48장) 태어나면서부터 기르신 하나님

이요나 2007. 2. 15. 12:12

(창세기 48장) 태어나면서부터 기르신 하나님

 

(창48:15-16) 그가 요셉을 위하여 축복하여 가로되 내 조부 아브라함과 아버지 이삭의 섬기던 하나님, 나의 남으로부터 지금까지 나를 기르신 하나님 나를 모든 환란에서 건지신 사자께서 이 아이에게 복을 주시오며 이들로 내 이름과 내 조부 아브라함과 아버지 이삭의 이름으로 칭하게 하시오며 이들로 세상에서 번식되게 하시기를 원하나이다

 

어린이들의 기억

야곱은 죽기 전에 노환이 들어 누워 있었는가 보다. 그래서 그의 시종들이 이 사실을 요셉에게 알렸을 것이다. 아마 요셉은 애굽의 총리로서 업무에 바빠 아버지가 계신 곳을 자주 들러보지는 못하였을 것이다.

 

이때 요셉은 56세 정도였고, 그의 아들 므낫세와 에브라임은 20대 청년이 되었을 것이다. 우리가 어려서 주일 학교 공과를 보면 구약의 인물들이 소개될 때 그 상황들이 모두 어린이들로 소개되고 있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다.

 

세 명의 동방박사가 예수 그리스도를 찾아가 경배하였을 때도 구유에 누운 갓난아기 예수님이 아니라 예수께서는 그 당시 두 살 정도였고 그의 부모들과 어느 집에 기거하였을 때였다. 또 이삭이 아버지 아브라함에 의하여 모리아 산에서 제물로 바쳐질 때에도 그는 서른 살 정도의 장정이었다.

사실 이러한 것은 성경을 보는 독자의 층이 어린이인 것을 감안하여 그렇게 연출시킨 것인데 내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이러한 일에 대하여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어려서부터 머리 속에 기억된 성경의 지식이 그들의 생각을 사로잡기 때문이다.

 

만약에 어려서부터 성경의 진리가 바로 아이들에게 기억되었다고 하자. 그것은 그 아이들을 지키는 위대한 하나님의 능력의 말씀이 될 것이다. 이처럼 우리 교회 속에서는 온전치 않은 잘못된 가르침들이 교회 밑바닥에서부터 진을 치고 있다.

 

교회의 주일학교 교육은 어린이들에게 성경의 내용을 이해시키는데 주력해야 한다. 어떠한 영적인 지식을 터득하는 것보다 그 역사적 배경 속에 일어났던 사실들을 그대로 전달해 줄 필요가 있다.

 

나 역시 초등학교 1학년 때 받은 누가복음에서 본 아기 예수는 내가 갈보리채플에 오기 전까지도 그러한 지식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각 교회에서는 그러한 성경적 사실을 그대로 가르치기보다는 교회의 목적과 목사의 생각에 설교의 포인트를 맞추기 때문에 어려서 입력된 잘못된 내용은 잘못된 지식으로 그대로 남아 있게 마련이다.

 

고향은 가슴이다

요셉이 왔다는 소리를 듣자 병석에 누웠던 이스라엘이 벌떡 기운을 차리고 일어섰다. 이처럼 사랑하는 아들은 아버지의 기쁨과 소망인 것이다. 야곱은 사랑하는 아들 요셉에게 지나간 시절 벧엘, 즉 루스에서 겪었던 하나님과의 만남 속에 있었던 일들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물론 이 이야기는 요셉에게 이미 들려준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이가 든 아버지들에게 사랑하는 아들들 앞에서 지나간 날의 무용담을 전하는 것은 무한한 기쁨이다.

 

야곱은 요셉에게“이전에 가나안 땅 루스에서 전능한 하나님이 내게 나타나 복을 허락하여 내게 이르시되 내가 너로 생육하게 하며 번성하게 하여 네게서 많은 백성이 나게 하고 내가 이 땅을 네 후손에게 주어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리라 하셨느니라”고 하나님의 기업에 대하여 말을 꺼냈다.

 

지금 요셉이 처한 환경 속에서 볼 때 이스라엘이 말하고 있는 이야기는 지나간 넋두리에 불과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땅이라도 기근을 당하여 애굽에 기거하는 거류민이 되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들에게 있어 지금의 현실은 지상 낙원일 수 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들에게 현실은 늘 나그네길일 뿐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택한 민족으로 그들의 이상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나라, 즉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 있다. 또한 이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주신 언약의 땅이 있었다. 비록 그곳에 기근이 들어서 애굽으로 피난 온 처지이기는 하지만 그들의 마음은 하나님께서 주신 가나안 땅에 있다. 이것은 오늘을 사는 그리스도인에게도 마찬가지이다. 비록 우리가 세상에서 살고 있지만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나라가 있다.

 

요셉은 17세의 어린 나이에 고향에서 떠나왔지만 어릴 때의 고향은 내가 어떠한 화려한 곳에 있다 하더라도 돌아가고 싶은 평온한 곳이다. 어떠한 사람도 자기의 고향을 원망하는 사람은 없다. 자기가 살아온 고향은 어린 시절 자기의 꿈이 자라던 어머니의 품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슬픈 추억은 그 평안함에 묻혀 잊어버리게 마련이다.

 

두배의 상속자 장남

그 가나안 땅은 아브라함으로부터 언약된 것으로 이스라엘과 그의 후손들에게 주신 영원한 기업이다. 그래서 아직도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이 주신 그 땅을 완전히 회복하기 위하여 중동의 팔레스타인들과 싸우고 있는 것이다.

 

야곱은 요셉의 두 아들이 자기가 낳은 열두 아들과 같이 자신의 아들이라고 하였다. 이것은 요셉을 장자로서 인정하는 것이 된다. 왜냐하면 장자는 다른 아들의 두 배를 상속받기 때문이다. 장자 르우벤은 욕정을 이기지 못하고 아버지의 첩과 통간하여 장자권에서 탈락되었고 시므온과 레위도 세겜의 사건으로 장자의 구도에 들지 못하였다.

 

이스라엘의 열두 아들은 이스라엘의 12 지파의 족장들이 되는데,‘12’라는 숫자는 인간 통치의 상징적인 개념을 내포한다. 즉 넘지 못하는 경계라고 할 수 있다. 낮이 열두 시간이고 밤이 열두 시간이며 1년이 열두 달인 것과도 같다.

 

그런데 후일 성경에서 이스라엘 민족이 거론될 때에는 13지파가 등장한다. 왜냐하면 요셉의 아들 에브라임과 므낫세가 야곱의 아들로 간주되어 다른 지파와 함께 동등한 선상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12지파에 두 지파가 더하여지면 14 지파가 되는데 성경에서는 이스라엘 지파를 거론할 때마다 한 지파가 제외되었다.

 

어떤 때에는 단 지파가 빠지고, 어떤 때에는 에브라임 지파, 또 어떤 때에는 레위 지파가 제외되는데 주로 레위 지파가 많이 제외되고 있다. 레위 지파는 사실상 땅을 분배받을 때 그들의 종교적 지위 때문에 제외되었는데 이로써 가나안 땅의 분배는 13 지파가 분배받게 된다. 이러한 것은 본문에서와 같이 야곱이 요셉의 아들들을 자기의 아들들의 위치에 세웠기 때문이다.

 

눈은 어두워도

사실 에브라임은 후일 북 왕국 10지파 중에 가장 강력한 지파가 된다. 야곱은 이렇게 하여야 하는 정당한 이유를 설명하기 위하여 자기의 사랑하던 처이자 요셉의 어머니 라헬의 이야기를 꺼낸다.

 

“내가 밧단 아람에서 올 때 라헬이 노중 가나안 땅에서 죽었는데 그곳은 에브랏까지 길이 오히려 격한 곳이라 내가 그를 에브랏에 장사하였다”(에랏은 베들레헴). 이 말은 라헬이 격한 여행길만 아니었으면 아들을 더 낳았을 것이고 자신도 그것을 원했다는 것이다.

 

이제 이스라엘은 요셉이 데리고 온 두 아들을 축복하기에 이른다. 야곱은 이때 눈이 어두워서 그들을 자세히 볼 수가 없었는가 보다. 나이가 들면 모든 인간에게는 3가지 증상이 나타나는데 첫째는 눈이 어두워지고, 둘째는 머리가 벗겨지고, 세째는 생식 능력을 잃는 것이다. 할아버지 아브라함은 130세에도 회춘을 하여 첩을 보았는데 야곱은 147세에 눈이 어두웠다.

 

아마 이삭도 눈이 어두워진 것을 보아 야곱의 집안은 시력이 약한 유전 인자를 소유한 집안인가 보다. 요셉은 장남 므낫세는 야곱의 오른손 앞으로 에브라임은 야곱의 왼손 앞에 세워 아버지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영적인 축복을 받도록 하였다.

 

그런데 이것이 웬일인가? 이스라엘이 손을 어긋 맞추어 오른손을 차자 에브라임의 머리에 왼손을 장남 므낫세 위에 올려놓지 않는가? 순간 요셉은 아버지께서 눈이 어두워서 망령이 나셨는가 하였을 것이다.

 

성경의 기초

이스라엘은 그 아들들에게 손을 얹어“내 조부 아브라함과 아버지 이삭의 섬기던 하나님, 나의 남으로부터 지금까지 나를 기르신 하나님”이라고 축복하기 시작하였다. 여기서“기르신”이란 히브리어는‘라아’라는 단어로‘목자’를 가르친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나의 목자가 되셔서 나를 기르셨다는 의미이다. 이 때부터 이스라엘과 하나님의 관계는 양과 목자의 개념이 이루어지게 되었는데 목자란 양의 모든 것을 책임지는 직분이다. 다윗도“주는 나를 지키시는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시 23:1)라고 노래하였다.

 

성경에서 목자이신 하나님으로 처음 나타나는 곳이 바로 여기이다. 계속하여 이스라엘은“나를 모든 환란에서 건지신 사자께서”라고 하였다. 이것이 성경 상 처음으로 나타나는 구속사적인 단어이다. 먼저 잠깐 언급하였지만 성경해석의‘최초 언급 원칙’에 의하여 환란에서 인간을 건지시는 사자는‘예수 그리스도’를 지칭한다.

 

따라서 위에서 말한 두 부분을 종합하여 신학적으로 말하면‘나를 창조하신 하나님 그리고 나를 기르신 성령 하나님, 그리고 나를 구속하신 예수 그리스도’라고 말할 수 있다.

 

요셉은 아버지가 손을 어긋 맞춰서 에브라임에게 장자의 축복을 하는 것을 보며 시종 마음이 불편하였는가 보다. 그래서 축복이 끝나자 아버지의 손을 옮기려하자 야곱은“나도 안다”고 말하였다.

 

즉 이 말은 이러한 축복은 내가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나를 주관하셔서 하시는 것이라는 말이다. 결국 야곱의 축복대로 에브라임은 므낫세보다 더 큰 세력을 지닌 지파로 성장한다. 그런데 우리가 이상한 예언을 하나 발견하게 된다.

 

“내가 네게 네 형제보다 일부분을 더 주었나니 이는 내가 칼과 활로 아모리 족속의 손에서 빼앗은 것이다”이 부분은 구약 어느 부분에도 나오지 않는다. 야곱이 언제 아모리 족속과 싸웠는지 다만 요한복음 4장에 수가성 우물가에서 만난 여인이 예수님께 말하는 장면 속에서만 나올 뿐이다.(요 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