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47장) 나그네 인생길에 무엇을 하고 살 것이냐?
(창47:7-10) 요셉이 자기 아비 야곱을 인도하여 바로 앞에 서게 하니 야곱이 바로에게 축복하매 바로가 야곱에게 묻되 네 연세가 얼마뇨 야곱이 바로에게 고하되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일백 삼십 년이니이다 나의 연세가 얼마 못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세월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 하고 야곱이 바로에게 축복하고 그 앞에서 나오니라
속을 보이지 마라
이제 가나안 목동인 야곱이 세계를 지배하는 애굽의 바로의 궁으로 인도되어 바로 앞에 서게 된다. 바로 앞에 서기전에 요셉은 그들에게 바로에게 할 말을 미리 일러주게 되는데 요셉은 열한 명의 형제 중에서 다섯 명만을 바로에게 보인다. 이는 요셉이 형제 중에서 험하고 잘 생긴 사람들은 제하고 목동처럼 순진하게 생긴 형제들을 보여 바로의 환심을 사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이것 또한 세상을 대하는 우리의 지혜라고 하겠다.
이스라엘 히스기야 왕이 병이 나은 후 자기를 위로하러 온 바벨론 왕실의 사자들에게 궁전의 보물 창고를 몽땅 열어주는 객기를 부린 이유로 이사야 선지자는 당신이 성전의 내탕고를 모두 보여 주었으니 그 모든 보물이 그들에게 빼앗기고 당신들의 자손들이 모두 끌려 갈 것이다 라고 질책하였다.(왕하 20:12-18)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경솔할 때가 많다. 특히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혜에 대하여 자주 떠벌리고 자랑하는 편이다. 바울은 고린도교회 교인들에게 너희가 받지 않은 것이 무엇이기에 그리 떠벌리고 자랑하느냐고 책망하였다.
애굽에서의 오랜 세월 동안 터득한 애굽 사람들의 풍습과 민족성을 잘 아는 요셉은 자기 아버지 야곱과 그 형제들을 바로 앞에 서게 함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미 자신이 이스라엘 민족으로 우수성이 증명된 터라 만약에 자기들의 형제들 중에서 남다란 재능과 투기성을 발견한다면 결국 죽임을 당할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요셉은 아비와 형들에게 우리는 조상 대대로 목자로서 기근이 심하여 짐승들을 칠 곳이 없어서 잠시 우거하러 왔으니 고센 땅에 거하게 해 달라고 고하도록 당부하였다. 요셉의 말을 들은 바로는 그들을 고센 땅에 사는 것뿐이 아니라 왕실의 가축을 관리하는 직책까지 허락하였다.
왕을 축복하는 목자
이에 야곱과 그의 다섯 아들이 요셉의 인도를 받아서 바로 앞에 서게 되었다. 여기서 아주 놀라운 장면이 연출되고 있는데 일개 목자가 세계를 제패한 애굽의 바로를 축복하고 있는 것이다.
창세기를 보면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에게 복을 빌어주었는데 이에 대하여 성경은 큰 자가 작은 자에게 축복한다고 기록하였다. 그런데 먹을 것이 없어서 피난 온 일개 가나안의 목자가 대 애굽의 바로를 축복한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것은 바로가 요셉을 통하여 야곱은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자로 하나님을 경외하고 섬기는 족장임을 알았기 때문이며, 이미 요셉에게 임한 하나님의 지혜와 총명을 경험한 바로 왕은 그의 아비 야곱이 하나님의 택한 사람임을 인정하였을 것이다.
바로 앞에 선 야곱은 자기의 나이를 묻는 바로에게“내 나그네길의 세월이 일백 삼십 년이니이다. 나의 연세가 얼마 못되나 우리 조상의 나그네길의 세월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다”라고 고하였다.
그의 말처럼 그의 아버지 이삭은 180살을 살았고, 그의 조부 아브라함은 175세를 살았다. 그 후 야곱은 17년을 더 살기는 했지만 그가 자기의 선조들의 나이에는 미치지 못할 것을 알고 있었나 보다.
그는 자기의 인생을 설명하기를“험악했다”고 표현하였다. 또 야곱은 자기의 인생을“나그네”라고 표현하였다. 히브리서 기자도 이를 가리켜“그들은 이 땅에서 외국인과 나그네였다”(히 11:13)라고 증거하였다. 이것은 하나님의 사람으로 이 땅의 왕들을 축복할 민족이라도 인생은 이 땅의 나그네일 뿐이라는 것을 말한 것이다.
인생은 나그네 길
내가 고등학교 다닐 때 가수 최 희준씨가 부른‘인생은 나그네 길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로 시작되는 하숙생이라는 유행가가 유행하였었다. 노래 가사처럼 인생이 이 땅의 나그네일 뿐인데 인간은 왜 이처럼 먹고 사는 문제에 아등바등 다투며 살아가야 하는 것인지 회의를 느끼게 할 때가 있다. 나는 가끔 텔레비전을 보면서 나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님을 스스로 느끼게 된다. 세상 사람이 즐기고 있는 것에 나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고 그 삶에 동참하고 있지 않으니 말이다.
술 먹고 세상의 많은 오락과 즐거움에 도취된 사람들의 생태를 보면서 나는 과연 무엇 때문에 살고 있는가 하고 생각할 때가 있다. 어떤 때에는 한번도 병원에 가지 않으면서도 꼬박 꼬박 물어야 하는 의료보험 고지서를 보며 내가 이 나라 국민은 맞는가 하고 생각할 때도 있다. 어차피 우리는 공수래 공수거할 인생들이다.
욥이 모든 재산과 자식들을 잃고도“내가 벌거벗고 왔은즉 벌거벗고 돌아갈지라 주신 자도 하나님이시니 취하신 자도 하나님이시라”(욥 1:21)고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하였다. 바로 앞에서 면담을 마친 야곱과 그의 가족은 바로로부터 고센 땅 중에서 가장 기름진 곳 라암세스를 받게 된다. 후에 이 곳은 애굽의 국고성인 비돔과 라암셋이 세워진 곳이다.(출 1:11)
사랑은 질서가 필요
기근은 더욱 심하여졌고 온 세상은 희망이 없어 보였을 것이다. 요셉은 백성들에게 양식을 공짜로 나누어주지는 않았다. 요셉은 그들의 소와 말 등 가축을 바치게 하여 백성들에게는 양식을 짐승들로 축내지 않도록 하였고 짐승들은 짐승대로 잘 관리할 수 있도록 지혜를 냈던 것이다. 그러나 이것도 잠시뿐 백성들의 돈과 짐승들이 다 없어진 후에도 기근은 계속되어 요셉은 백성들의 토지 문서를 받고 양식과 종자들을 나누어주었다.
만약 요셉이 백성들에게 아무것도 받지 않고 무료로 구제 식량을 나누어주었다면 애굽은 국가 기강이 헤이 해져서 사회적 혼란이 일어날 것이고 나라는 곧 무정부 상태에 빠지게 될 것이다.
몇 년 전부터 무조건적 햇볕 정책을 시도하는 국가 정책을 우려했었다. 정계와 경제계, 그리고 종교계 일각에서 무조건적 동포애를 표명하며 이북 돕기에 나서는 것을 보며 과연 인간이 하늘로부터 오는 재난을 막을 수 있을 것인가 하고 생각하였다.
과거 동독과 소련 그리고 중국을 보건대 그들이 문호를 개방한 것은 결국 민생고를 해결할 수 없는데서 온 국가 체제의 붕괴였다. 이론적인 발상에서 단순히 생각할 때 공산주의 이데올로기는 어쩌면 타당하고 정당한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들의 이념은 하나님의 존재 그 자체를 부인하고 거부하였다. 따라서 공산주의의 이념의 붕괴는 천지 만물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은데서 비롯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나는 최근 김대중 대통령의 독일에서 발표한 대북 정책에 찬성을 한다. 왜냐하면 사랑은 질서가 수반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아담 이후 땅의 모든 인간은 땀흘린 대가를 받도록 명령되었다. 이 명령은 창조주로부터 주어진 삶의 원칙에 속한 것이기 때문에 인간이 땀 흘리지 않고 살려고 할 때 의식이 나태해져서 삶의 구조가 무너지게 된다.
또한 믿는 자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사랑도 엄청난 대가를 치른 것이다. 하늘의 영원한 생명을 주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세상의 것이 아닌 하나님의 아들의 생명을 희생하는 대가로 지불하셨다. 따라서 하나님의 지혜와 총명을 받은 요셉은 그 백성들로부터 자신들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하여 자신의 소유를 희생하도록 제도화한 것이다.
토지법에 속하지 않는 제사장
본문에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이 당시 애굽에 제사장 제도가 있었음을 본다. 바로는 요셉에게 제사장의 딸을 아내로 주었다. 이것은 국가적 종교가 있었음을 의미한다. 고대 문헌을 보면 애굽의 제사장은 국가적 종교 업무를 수행하며 왕실의 번영과 영화를 기원하는 국가차원의 고용인이었다. 이들은 국가의 행정 기관부와 별도로 왕실 직권제로 관리되고 있었는데 본문에서도 제사장은 바로에게서 녹을 받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들은 많은 토지를 가지고 있었으나 그들은 바로에게서 직접 급료를 받았기 때문에 그들의 토지를 팔지 않아도 되었다. 따라서 제사장 직책은 특별직으로 총리의 관할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요셉은 백성들의 토지를 모두 매입하고 그들에게 종자를 주어 농사를 짓게 하고 추수의 5분의 1을 바로에게 바치게 하는 새로운 토지법을 세워서 모든 백성들에게 국가의 토지를 경작하여 5분의 1을 세금으로 납세하게 하였다.
또한 요셉의 관할에 속한 모든 국가기관 수행원들에게는 20%의 세율을 적용되었다. 그러나 제사장은 토지법에 속하지 않게 하여 제사장이 국가의 체제에 묶이지 않는 속성을 가지고 있음을 나타내었다.
지금도 모든 민주 국가의 모든 종교는 그 활동의 자유와 세금을 면제받고 있다. 따라서 후일 이스라엘 민족 중 레위 지파는 국가적 행정범주에서 벗어나 오직 하나님만을 섬기는 별종직으로 발탁된다.
땅의 법도 그러한데 천국의 복음을 위하여 일하는 사람들은 어떠하랴! 성경은 이에 대하여“성전의 일을 하는 자는 성전에서 나는 것을 먹으며 제단을 모시는 이들은 제단과 함께 나누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이와 같이 주께서도 복음을 전하는 자들은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고전 9:13,14)고 기록하였다.
또한 에스겔서 45장을 보면 제사장들은 하나님의 성전에서 땀 흘리지 않도록 베옷을 입게 하였다.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땀을 흘려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다 이루어 놓으신 일에 땀흘릴 일이 그 무엇이랴! 우린 오직 그의 이름을 찬양할 뿐이다.
그 후 17년의 세월이 흘러 야곱의 나이가 140세가 되었을 때 이스라엘은 자기의 수명이 다 되었음을 느끼고 요셉을 불러서 자신의 죽음 이후의 거취를 부탁한다. 그는 요셉의 손을 자기 엉치뼈에 넣어 맹세케 하고 자기를 애굽에 장사하지 말고 조상의 선영에 장사하라고 유언을 한다.
그리고 나서 이스라엘은 침상에서 일어나 하나님께 경배를 드렸는데, 성경은 이에 대하여“믿음으로 야곱이 죽을 때에 요셉의 각 아들들에게 축복하고 그 지팡이의 머리에 의지하여 경배하였다”(히 11:21)라고 기록하였다. 70인 역에 의하면 여기서 말한 침상머리는 지팡이와 같은 의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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