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44장) 모든 것을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손
(창44:32-33) 주의 종이 내 아비에게 아이를 담보하기를 내가 이를 아버지께로 데리고 돌아오지 아니하면 영영히 아버지께 죄를 지리이다 하였사오니 청컨대 주의 종으로 아이를 대신하여 있어서 주의 종이 되게 하시고 아이는 형제와 함께 도로 올려 보내소서
막다른 골목까지
20년 만에 만난 형제들의 해후는 즐거움의 자리는 되지 못하였다. 아직 요셉이 자신이 누구임을 밝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요셉은 그 형제들이 하는 이야기를 다 알아들을 수 있었지만 그들 사이에는 통역관들이 있었고 애굽 사람들은 가나안 사람들을 미천하게 생각하여 같은 위치에서 밥을 먹지도 않았었다. 그처럼 자기를 내세우고 자랑을 일삼아 형제들로부터 미움을 샀던 요셉이 이처럼 인내심 많은 사람이 되었다는 것은 참으로 이해하기 힘들다.
나는 몇 년 전에 척 스미스 목사의 저서‘왜 은혜가 모든 것을 변하게 하는가?’는 저서를 접할 기회가 있었다. 번역을 해놓고도 아직 한국어로 출간을 못하고 있지만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위대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다시 체험하게 되었다.
우리는 한 세상 살면서 많은 것을 걱정하며 많은 염려로 살아간다. 주께서는 네가 염려함으로 네 키를 한 자라도 크게 할 수 있느냐고 말씀하셨다. 성경의 해답은 네 모든 염려를 주께 맡기라는 것이다. 그런데도 그 말씀을 아침저녁으로 외우며 사는 우리네 크리스천도 걱정을 만나면 그것을 자기가 해결하려고 한다. 성경은 촐랑이 요셉이 어떻게 그처럼 인내심 많은 양반이 되었느냐에 대하여 별다른 대답을 하지 않고 있다. 다만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하나님이 함께 하셨다”는 기록뿐이다.
내 안의 두 인간
우리는 성경에서 또 하나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기억한다.“임마누엘”즉“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라는 의미이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름보다 임마누엘 하나님의 이름에 더 친밀하게 느껴진다.
이미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은혜 가운데 있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난 임마누엘 하나님을 사랑한다. 지나간 나의 인생을 돌아보건대 오늘의 내 모습이란 원래 내 사전에는 없었던 것이다. 나라는 인간은 원래 고약스럽고 돼먹지 못하고 추악하고 더럽고 추잡하여 한마디로 지랄같은 인생이었다.
마주 오던 사람도 만나기조차 역겨워 비켜섰던 그런 인생이었다. 생각하기조차 끔찍스러웠던 시절이었다. 그런데 이 순간 문득 떠오르는 생각은 법적으로 또는 물리적으로 나는 태어나 지금까지 그대로인데 지금의 나는 예전의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돼 있는 것이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우리에게 첫 번째로 주어지는 은혜가 다시 태어남이다. 즉 거듭남이다. 어떤 이들은 이 거듭남에 대하여 구원의 확신을 깨닫고 자신의 거듭남의 사실이 성경 속에서 발견되는 날에 비로소 거듭난다고 말하고 있지만 그들의 주장은 사실과 다르다.
그들의 이야기대로 한다면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이 아닐 수도 있다. 즉 인간의 행위만으로도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결론이 된다. 우리의 구원은 영원 속에서 결정된 그리스도안의 비밀이다.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지는 선물이다. 다만 나는 성령의 권고하심에 내 의지로 동의하였을 뿐이다. 그러나 나의 동의도 그의 인도하심이 없이는 이루어 질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오늘의 나의 거듭남은 순전한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다.
함께 하신 은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이 천지간에 하나님보다 더 큰 신이 어디에 있으며 그 누가 그의 계획하심과 그의 뜻을 거역할 수 있으랴! 그래서 척 스미스 목사는 은혜가 모든 것을 변화시킨다고 하였던 것이다. 요셉이 인간의 조급함이 없는 온전하고 정결한 처음의 사람의 모습이 된 것은 그의 고난의 시작과 함께 하나님이 함께 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알기까지 그에게 바탕을 형성케 한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었다. 오래 참으시는 스스로 계획하시고 스스로 이루시며 모든 천지 만물을 이끄시는 하나님의 손을 요셉이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요셉은 오직 인생을 창조하신 하나님께 자신의 일생을 맡겼다. 그래서 요셉의 일생을 살펴보면 그의 삶 가운데서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를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는 이 땅의 최대의 왕국 애굽을 치리 하는 총리 대신으로 그 시대에 임한 대환란을 이겨나가는 지혜와 지략의 소유자였다. 그는 애굽의 학문을 배운 일이 없으며, 정치적 경제적 지략을 배운 일조차 없었다. 그러나 그는 환란 속에서 애굽을 통치해 나가는 바로의 일등 공신이 되었다.
짜여진 각본
요셉은 그 형제들을 돌려보면서 마지막 시험을 한다. 과연 그들의 마음 속에 형제의 생명을 아끼는 진정한 사랑이 있는가를 시험한다. 요셉은 청지기에게 자기의 막내 동생 베냐민의 자루에다 자기의 은잔을 넣게 하여 떠나 보냈다. 그리고 그들이 성을 나서자마자 요셉의 청지기가 쫓아와서 주인의 점치는데 쓰는 은잔을 누가 훔쳤느냐고 다그쳤다. 이에 그 형제들은 그것이 누구의 손에서 발견되든지 죽을 것이요 우리가 모두 종이 될 것이라고 말하면서 결백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짜여진 각본이 어찌 달라지겠는가? 그들의 자루를 펴자 은잔이 막내 베냐민의 자루에서 나오는 것이 아닌가? 이에 그들은 일제히 옷을 찢고 난 후 짐을 싣고 요셉의 집으로 돌아왔다. 어쩌면 청지기는 베냐민 만을 데리고 가려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 형제들이 일제히 자기 옷을 찢으며 함께 요셉 앞에 와서 엎드린 것이다. 그들에게 요셉은“너희가 어찌하여 이런 일을 하였느냐 내가 점을 잘 치는 줄 몰랐느냐?”라고 호통을 쳐댔다. 참으로 기가 막힐 일이 아닌가? 아니 땐 굴뚝에 연기가 나고 있으니 그들로써는 도저히 설명할 길이 없게 되었다.
멋쟁이 유다
일이 이 지경에 이르자 그들은“우리가 무슨 설명을 하오리까? 어떻게 우리의 정직을 나타내리이까?”하며“잔이 발견된 자와 우리가 다 주의 종이 되리이다”라고 통곡할 뿐이다. 그러나 요셉은 그럴 필요없이 이 잔이 발견된 자만 나의 종이 되고 너희는 너희 아비에게 돌아가라고 한다. 이때 유다가 요셉 앞에 나선다.
역시 사리에 맞게 말할 줄 아는 사람이 이럴 때 필요한 것이다. 호랑이 굴에 끌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살아난다는 말처럼 유다는 요셉 앞에 나아가서 베냐민의 구명을 위하여 애걸하기 시작한다. 유다는 지금까지 있었던 모든 일을 조목조목 일목요연하게 설명하여 자기들이 말째 아우 베냐민을 데려오기까지의 내막을 자세히 설명하였다.
그리고“이 아이의 생명과 아비의 생명이 서로 결탁되었으니 우리가 아비에게 돌아 갈 때 이 아이가 우리와 함께 하지 않으면 주의 종 우리 아버지의 흰머리로 슬피 음부로 내려가게 하는 것이니 내가 아비 집을 떠날 때 내 몸으로 이 아이를 담보하여 이 아이를 데려 가지 못하면 영영히 아버지께 죄를 짓기로 하였으니 나로 하여 주의 종이 되게 하시고 아이는 형제와 함께 돌려 보내달라”고 애걸을 하였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로 나타나는 유다의 멋진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예수께서는 우리의 죄를 대신 걸머지시고 친히 갈보리 언덕의 십자가의 죽음을 감당하셨다. 따라서 예수께서는 이처럼 형제의 생명을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스스로 담보한 유다의 후손 즉 유다의 지파를 통한 육신을 입고 오셨던 것이다.
이제 이들은 시기와 질투의 사람들이 아니라 모름지기 능히 하나님의 택한 민족이 되어 이방 속의 빛으로 살아갈 이스라엘의 민족을 이끌고 나갈 열두 지파의 두령의 모습이 된 것이다. 이것이 어찌 사람의 힘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랴!
요셉과 함께 하신 하나님께서는 형제의 생명을 가벼이 여기고 은 이십 개에 팔아먹은 그의 형제들 속에 고통의 양심으로 역사하셔서 이십 년이란 세월 속에서 오늘의 새로운 사람들이 되도록 이끄신 것이다.
성경은 조급한 인생의 삶을 살아가는 우리를 향하여“무엇이든지 전에 기록한 바는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우리로 하여금 인내로 또는 성경의 안위로 소망을 가지게 함이니라 이제 인내와 안위의 하나님이 너희로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 서로 뜻이 같게 하여 주사 한 마음과 한 입으로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노라”(롬 15:4-6)고 말한다.
또한 야고보는“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함이라”(약 1:4)하였고, 또다시“형제들아 주의 이름으로 말한 선지자들로 고난과 오래 참음의 본을 삼으라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우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이 여기는 자시니라”(약 5:11)고 하였다.
오늘의 본문이 우리에게 주는 내용은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의 각본에 짜여진 인생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그 각본을 쓰시고 연출하시는 창조자의 은혜의 손에 사람이 온전히 맡겨질 때 주께서 완성하시는 것이다. 당신은 지금 그의 손에 온전히 맡겨져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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