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강해/창세기 강해

(창세기 42장) 인간은 포맷할 수 없는 컴퓨터인가?

이요나 2007. 2. 15. 12:27

(창세기 42장) 인간은 포맷할 수 없는 컴퓨터인가?

 

(창42:19-23) 너희가 독실한 자이면 너희 형제 중 한 사람만 그 옥에 갇히게 하고 너희는 곡식을 가지고 가서 너희 집들의 주림을 구하고 너희 말째 아우를 내게로 데리고 오라 그리하면 너희 말이 진실함이 되고 너희가 죽지 아니하리라 그들이 그대로 하니라 그들이 서로 말하되 우리가 아우의 일로 인하여 범죄하였도다 그가 우리에게 애걸할 때에 그 마음의 괴로움을 보고도 듣지 아니하였으므로 이 괴로움이 우리에게 임하도다 르우벤이 그들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내가 너희더러 그 아이에게 득죄하지 말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래도 너희가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러므로 그의 피 값을 내게 되었도다 하니 피차간에 통변을 세웠으므로 그들은 요셉이 그 말을 알아들은 줄을 알지 못하였더라

 

말씀 음미의 중요성

이 당시의 기근은 전 세계적으로 일어났었던 모양이다. 가나안 땅에 사는 야곱의 가족에게도 기근의 영향이 미쳐 식량을 구하러 아들들을 애굽으로 보내지 않으면 안되었기 때문이다. 야곱은 식량을 구하기 위하여 요셉의 동생인 막내아들 베냐민을 제외한 10명의 아들들을 애굽으로 보낸다. 이것으로 보아 야곱은 요셉을 잃은 후 아들들 가운데서 막내아들인 베냐민을 더욱 편애하였던 것 같다.

 

40장과 41장에서 우리가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은 요셉은 애굽의 총리에 오른 후에도 자기의 소식을 아버지 야곱과 그의 형제들에게 알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우리 같으면 벌써 자기의 위치를 과시하기 위해서라도 사람들을 보내고 난리 법석을 떨었을터인데 말이다. 우리는 성경을 살펴볼 때 표면에 나타나지 않은 말씀을 찾아내야 한다.

 

유대인들의 성경학자들은 성경의 기록을 음미하여 말씀 속에서 기록되지 않은 감추어진 내면적인 내용을 발견하기 위하여 많은 묵상을 한다.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겉으로 표출된 내용에 치우치다 보면 그 말씀이 의미하고 있는 전체적인 뜻을 잃게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성경을 읽을 때 문맥을 따라 살피며 그 핵심을 찾고 그 속에 감추어진 의미를 깨달을 수 있도록 말씀을 깊이 음미하여야만 한다.

 

우리가 진정한 마음으로 그 지식을 바로 깨닫고자 할 때 성령께서 우리의 생각을 깨우쳐 주시는데 그 해석에 있어서는 확실한 의미가 내려지기까지는 조심하여야 한다. 그래서 성경의 예언은 그 믿음의 분량에 맞게 하라고 가르치고 있다.

 

성경공부의 중요성

요셉은 총리가 된 후 바로 자기 앞에 있을 일들에 대하여 깊이 생각해 보았을 것이다. 이미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2번의 꿈을 주셨기 때문이다. 따라서 요셉은 지금까지 자기의 인생을 이끌어오신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미리 하신 일들을 성취하실 것을 믿고 그 일을 자기 스스로 성취할 생각을 하지 않고 하나님의 때를 기다렸던 것이다.

 

 요셉은 자기 할아버지 아브라함과 사라가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깨닫지 못하고 자기 임의로 이루려고 하다가 이스마엘을 낳고 13년 간 하나님과의 교제가 단절되는 고통을 겼었던 일들을 묵상하였을 것이다. 또한 자기 아버지 야곱이 하나님께서 미리 주신 자기에게 관한 일들을 자기 임의로 성급히 이루려다가 20년 간의 고난을 치렀던 일들을 묵상하였을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을 믿는 자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삶의 지혜인 것이다. 성경은 하나님을 아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요셉은 갑자기 자기에게 닥친 고난 속에서 지금까지 기록되어 온 자기의 조상들의 삶 속에 살아있는 말씀들을 묵상하면서 그 말씀이 자신의 삶에 나타날 것을 믿고 신뢰하면서 하나님이 자신의 인생을 이끌어 가기까지 인내하였던 것이다.

 

이제 주의 오심을 기다리는 우리들도 경거망동한 언행을 하여 화를 자초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미리 하신 말씀을 음미하여 그 말씀이 우리의 삶 속에 친히 나타날 때까지 기다려야 할 것이다. 바울은 주의 날이 모든 사람에게 도적같이 이를 것이나 너희는 빛의 아들이니 너희에게는 그 날이 도적같이 임하지 않을 것이라(살전 5:2-4)고 경고하였다.

 

하나님의 독실한 자?

이제 야곱의 아들들인 요셉의 형제 열 명이 요셉의 앞에 엎드리어 식량 구입을 청하게 된다. 아마 요셉은 외국인들에게는 총리의 승낙이 없이는 식량을 매매하지 못하도록 무슨 특별법을 제정하였을 것이다.

 

요셉은 형제들을 알아보았으나 그의 형제들은 감히 애굽의 총리 앞에 고개를 들 수 없었고 또한 통역을 통하여 서로 의사를 소통하게 하였으므로 그 형들은 요셉을 알아볼 수 없었다. 요셉은 자기 발 앞에 엎드린 형들을 보고 과거의 꿈을 생각하며 그들에게“너희는 정탐들이라 이 나라를 엿보러 왔구나”하고 호통쳤다.

 

이에 그 형제들은“우리는 다 한사람의 아들로서 독실한 자라”고 하였다. 독실하다는 뜻은 강직하고 청렴결백하다는 뜻이다. 그 말을 들은 요셉은 내심 코웃음을 쳤을 것이다. 이에 그들은 자신들의 말을 믿지 않는 요셉을 향하여“우리들은 12형제로서 가나안 땅의 한 사람의 아들로서 막내는 지금 아버지와 있고 또 하나는 없어졌다”라고 역설하기에 이른다.

 

이 말을 들은 요셉은 만약에 그것이 사실이라면 너희 중 하나를 여기다 두고 가서 그 막내를 데리고 오라고 명령하며 그들을 모두 3일간을 옥에다 가두었다. 요셉의 3년 간의 옥고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지만 3일간의 옥살이 속에서 지난날 자신들의 잘못을 생각하기에 충분하였을 것이다.

 

3일 후 요셉은 그들에게“나는 하나님을 경외하니 너희는 내가 한 대로 하여 생명을 보전하라”고 명령하였다. 이 말을 들은 형제들은 내심 놀라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애굽은 다신교를 믿는 나라인데 그 총리가 하나님을 경외한다니 이해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요셉의 말속에는 뼈가 있었다.

 

요셉의 말속에는 하나님은 생명의 창조자요 주관자로써 생명을 귀히 여긴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따라서 너희는 독실한 하나님의 자녀로써 어찌 형제의 생명을 보전하지 못하였느냐는 의미가 포함된 것이다. 어쩌면 요셉의 언행은 보복적인 냄새가 다분히 풍기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없어지지 않는 죄책감

요셉이 다시“너희가 독실한 자이면 너희 형제 중 한 사람만 그 옥에 갇히게 하고 곡식을 가지고 가서 너의 집들의 주림을 구하고 너희 말 째 아우를 데리고 오면 너희가 살리라”고 말하자 그들은 요셉이 자기들의 말을 알아듣는지도 모르고“우리가 아우의 일로 범죄 하였도다 그가 우리에게 애걸할 때에 그 마음의 괴로움을 보고도 듣지 아니하였음으로 이 괴로움이 우리에게 임하였다”라고 탄식하였다.

 

여기서 우리는 인간의 죄책감에 대하여 생각해 보자. 인간의 뇌는 대단한 기억 능력이 있어서 어려서부터 행한 모든 일들을 저장하고 있다. 마치 인간의 뇌는 방대한 컴퓨터 같아서 작은 일에서 큰 일까지 모두 메모리 되어 있다.

 

우리는 세월 속에서 우리가 저지른 죄를 잊어버리고 희희낙락하며 자기의 죄책감 속에서 해방된 것으로 알지만 우리 머리 속에 저장돼 있는 죄책감은 그와 비슷한 환경이 닥치면 다시 살아나게 되어있다. 그래서 죄악을 범한 사람들이 죄책감에 눌려서 고통을 받는 것이다.

 

다윗은 범죄 한 후“내가 죄를 토설 치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화하였고 주의 손이 주야로 나를 누르시오니 내 진액이 화하여 여름 가뭄에 마름같이 되었다”(시 32:3,4)라고 고백하였다.

 

이와 같이 죄책감은 인간에게 정신불안, 신경쇠약, 노이로제를 일으켜 자신을 자학하게 되고 그 고통을 잊으려고 술과 마약에 빠지게 되고 종래는 정신이상 등을 일으켜 파멸하게 된다. 이러한 인간의 죄를 해결할 길은 이 세상에는 없다.

 

오직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한 길뿐이다. 성경은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 외에 다른 이름을 주신 일이 없다고 기록하였다.(행 4:12)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용서의 길은 인간의 어떠한 죄라 하더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에 의지하여 자신의 죄를 고백하면 그 죄는 도말되고 그 즉시로 죄의 고통으로부터 해방된다. 이에 대하여 성경은“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고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라”(요일 1:9)고 기록하였다.

 

생명은 생명으로

그들 중 가장 큰 형인 르우벤이 자기 형제들에게“내가 너희에게 그 아이에게 득죄하지 말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러므로 이제 우리가 그의 피 값을 내게 되었도다”라고 탄식하였다. 이를 보아 르우벤은 요셉을 살리기 위하여 많이 말렸었던 것 같다.

 

그의 고백 속에서 우리는 죄의 값으로 피 값이 따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성경은 죄의 값은 사망이라고 기록하였다. 죄지은 자는 모두 죽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땅의 모든 인간은 죄인임으로 모두 죽어야 한다.

 

피 값을 내야 한다는 말은 무엇인가? 성경은 형제를 죽인 인간을 향하여 이미“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였다”(창 4:10)라고 기록하였고 또 다시“너희 피 곧 너희 생명의 피를 찾으리니 짐승이면 짐승에게서 사람이나 사람의 형제이면 그에게서 그의 생명을 찾으리라 무릇 사람의 피를 흘리면 사람이 그 피를 흘릴 것이니 이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었음이니라”(창 9:5-6)고 말하였다.

 

이제 이들은 성경에 기록한 대로 자신들의 죄 값을 치러야 할 때가 온 것이다. 이제 이들은 자신들의 하소연이나 후회와 관계없이 요셉의 명령대로 시행되어 20년 전 요셉을 묶어 구덩이에 넣을 때 주동자였던 시므온을 묶어서 옥에 넣고 곡식 자루와 함께 고국으로 돌려보내졌다.

 

또한 그들이 돌아오는 길에서 곡식 자루 속에 있는 돈 뭉치를 발견하고 그 영문을 알 수 없는 이들은 두려움에 떨면서 아버지에게 그동안의 과정을 토로하였다. 이에 야곱은 너희가 요셉이 없어지게 하더니 시므온도 없어졌고 이제 베냐민마저 없애려 하느냐고 몸을 떨며 울부짖었다. 만약에 야곱이 이 모든 사실의 전말을 알 수 있었다면 그는 애통하지도 놀라지도 않았을 것이다.

 

이처럼 인간은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알지 못하여 애통하며 어찌할 바를 모르고 고통의 삶을 사는 것이다. 또한 마지막 절에서 우리는 르우벤의 경솔함을 다시 보게 된다. 그는 조급한 성격을 가진 자로 마음에 일어나는 생각을 깊이 사유하지 못하고 경솔히 나서서 장자의 위치를 지키지 못하였다. 그는 아버지 야곱에게 나아가“내가 베냐민을 데리고 가서 시므온을 구출해 올 터이니 그렇지 못하면 내 두 아들을 죽이소서”하고 그 문제의 해결 방법을 제시한다.

 

그러나 그 두 아들은 누구인가? 야곱의 사랑하는 손자들이 아닌가? 이처럼 하나님 앞에 지각을 갖추지 못한 인간은 삶 속에서 발생하는 문제를 해결하려는데 실패를 하게 마련이다. 이것이 인간의 생각이요 한계인 것이다.

 

이 말씀 속에서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는 인간의 생명을 구하기 위하여 인간의 생명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과거에는 인간의 죄를 사함 받기 위하여 1년에 1번 제사장이 짐승의 피를 가지고 지성소에 들어가 자기와 백성의 죄 사함을 위한 제사를 드렸다. 그러나 이것으로는 인간의 죄를 영원히 사할 수 없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다른 길을 예비하시고 흠 없는 어린양이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생명의 값으로 내어 줌으로써 그의 이름을 믿는 모든 사람들을 죄 없다 하시고 영원한 생명을 주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