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강해/창세기 강해

(창세기 43장) 생명을 구하는 지혜

이요나 2007. 2. 15. 12:23

(창세기 43장) 얽힌 것을 풀고 생명을 구하는 지혜

 

(창43:11-14) 그들의 아비 이스라엘이 그들에게 이르되 그러할진대 이렇게 하라 너희는 이 땅의 아름다운 소산을 그릇에 담아가지고 내려가서 그 사람에게 예물을 삼을지니 곧 유향 조금과 꿀 조금과 향품과 몰약과 비자와 파단행이니라 너희 손에 돈을 배나 가지고 너희 자루 아구에 도로 넣여 온 그 돈을 다시 가지고 가라 혹 차착이 있었을까 두렵도다 네 아우도 데리고 떠나 다시 그 사람에게로 가라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그 사람 앞에서 너희에게 은혜를 베푸사 그 사람으로 너희 다른 형제와 베냐민을 돌려보내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내가 자식을 잃게 되면 잃으리로다

 

인생의 연륜

어떠한 일이 있어도 더 이상 자식을 잃지 않겠다는 야곱의 결심 속에 세월은 흘러가고 기근은 점점 더 심해져 애굽으로부터 가져온 양식도 동이 나버렸다. 아버지 앞에 발언권을 상실한 장자 르우벤은 더 이상 나서지 못하고 그 형제 중 하나님의 섭리를 체험한 유다가 아버지 앞에 나섰다.

 

유다는 이미 아내를 잘못 얻어 두 아들을 잃는 뼈아픈 체험을 하였고 또 집념의 여인 며느리 다말을 범하는 부끄러움 속에도 장차 메시야를 낳는 가문의 시조가 되어 메시야의 혈통을 이어가는 하나님의 섭리를 겪었다. 사람이 산전수전을 겪으면 두려움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삶의 체험은 인생의 최고의 스승인 것이다.

 

스펄전 목사는 눈물의 빵을 먹어 보지 못한 사람과 고통의 밤을 지새어보지 못한 사람은 인생을 말하지 말라고 하였다. 또 어느 학자는 인생에 대하여 공부를 하려거든 하나님 앞에서 오랜 연단을 받은 사람들의 전기를 읽으라고 하였다. 먹을 것이 풍족한 이 시대 젊은이들은 지금 야곱의 집에 닥친 기근이 쉽게 이해되지 않을지도 모르나 각기 처자들을 거느린 열한 명의 대가족에게 닥친 기근은 실로 풍전등화가 아닐 수 없다.

 

필요한 잔소리

야곱은 양식이 떨어지자 아들들에게 애굽에 다시 가서 식량을 사오라고 한다. 그러자 유다는 아버지께 막내 동생 베냐민을 데리고 가지 않으면 양식을 절대로 사올 수 없는 이유를 자세히 설명하기에 이른다.

 

우리가 성경 공부를 하면서 느낄 수 있는 것은 성경의 기록은 너무 자세하고 상세하다는 것이다. 어떤 부분은 더 이상 설명이 필요하지 않은 것 같은데도 여러 차례 언급되어 있다.

역대기를 살펴보면 열왕기서에 기록되어 있는 것을 거의 다시 설명해 놓았고 어떤 일들은 이사야서에 또 다시 기록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이처럼 하나님은 수 차례 반복해서 말씀하신다. 반복해서 가르치는 것이 유대인들의 교육 방법이다. 어려서 우리 어머니는 유난히도 같은 말을 여러 번 하셨다. 방학을 끝내고 서울로 올라가는 길에서 어머니는 동구마을 버스를 탈 때까지 똑같은 말씀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하셨다. 그 때는 그러한 어머니의 말씀이 잔소리로만 들려 왜 그렇게 듣기 싫었는지….

 

그런데 그러한 모습이 오늘 내 입에 있음을 발견한다. 성경을 가르치면서도 같은 말을 여러 번 반복하여서 어떤 때는 예정된 시간을 훨씬 초과하여 식상한 듯 슬금슬금 꽁무니를 빼는 젊은이들을 보고서야‘또 내가 오버하고 있구나’라고 생각하면서 끝내는 경우가 있다.

 

조리있는 설득력

유다의 설명을 들은 이스라엘은 너희가 어찌하여 아우가 있다고 하여서 나를 해롭게 하느냐고 다그치자 유다는 그가 우리의 친족을 자세히 물으며“너희 아버지가 그저 살았느냐 너희에게 아우가 있느냐?”고 묻기에 조목조목 대답한 것인데 그가 어찌 아우를 데려 오라고 할 줄을 알았겠느냐고 답하였다.

 

이에 유다는 아버지에게“아버지께서 저 아이를 나와 함께 보내시면 우리와 아버지와 우리의 어린 것이 다 살고 죽지 아니하리니 내가 아우의 몸을 담보하여 그 아이를 다시 아버지 앞에 데려 오지 아니하면 내가 영원한 죄를 짓겠다”라고 설득하며 다시“우리가 지체하지 아니 하였다면 벌써 두 번 갔다 왔겠습니다”라고 아버지의 결단을 촉구하였다.

 

이스라엘은 가족의 생명을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거는 아들 유다의 조리있고 책임성 있는 말을 듣고 결국 허락하기에 이른다. 이처럼 이치에 맞는 대답은 잘 박힌 못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평소에 얽힌 사람과의 관계를 푸는데 술수가 밝은 야곱은 이 때에도 세상을 푸는 방법을 가르쳐 준다.

 

“너희는 이 땅의 아름다운 소산을 그릇에 담아 가지고 가서 그 사람에게 예물을 삼을 지니 곡식 유향 조금과 꿀 조금과 몰약과 비자와 파단행 이라 또 너희 손에 돈을 배나 가지고 너희 자루에 도로 넣었던 그 돈을 다시 가지고 가라” 이것은 어쩌면 세상을 살아가는 기본적인 삶의 방법이라고 보아야겠다.

 

우리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 중에는 무례한 사람들이 꽤 많다. 특히 주의 종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중에는 사람들로부터 자기가 마땅히 받아야 할 것처럼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나는 종종 나와 전혀 관계없는 사람들이 와서 막무가내로 억지를 부리는 것을 보는데 기가 막힐 때가 있다.

 

세상을 사는 지혜

이처럼 자기 아들들에게 세상 사람을 대하는 법을 가르친 후에 이스라엘은 베냐민의 생명을 내주면서“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그 사람 앞에서 너희에게 은혜를 베푸사 그로 하여 너희 다른 형제와 베냐민을 돌려보내시기를 원하노라”고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께 아들들의 생명을 의탁하였다.

 

여기서 우리가 배울 것은 사람과의 얽힌 것은 사람 사이의 사는 법으로 풀어야 하며 하나님에게 속한 것은 하나님의 법으로 풀어야 한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내게 전쟁터에 나가서 우리가 적군과 마주 섰을 때 총을 쏘아서 죄 없는 상대를 죽여야 하는가를 물어왔다.

 

성경에는 살인하지 말라 하였는데 어떻게 살인을 하느냐는 질문이다. 성경은 이에 대하여“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굴복하라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의 정하신 바로다”(롬 13:1)라고 하였다. 성경은 살인하지 말라고 가르친다. 그러나 또 세상의 권세에도 복종하라고 가르친다. 이것은 세상에는 세상을 사는 질서가 있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세상에 속한 일은 세상의 질서를 따르는 것이 지혜라고 할 수 있다. 한 예로 고린도전서 11장에는 여인이 예언을 하려면 머리에 수건을 써서 천사들을 인하여 권세 아래 있는 표를 그 머리 위에 두라고 기록되었다.

 

 

어떤 무지한 사람들이 이 말씀을 해석함에 있어 역사인 배경과 상황을 살피지 않고 이 말씀만을 뚝 떼어서 해석하므로 여자들이 예배볼 때에는 천주교와 같이 머리에 수건을 써야 한다고 억지를 쓴다.

 

이것은 고린도 교회에만 국한된 사항으로써 그 당시 헬라에서는 예의바른 여인들은 외출을 하려면 머리에 수건을 쓰고 다녔고 기생들이나 창녀들은 수건을 쓰지 않았다. 또 여신을 섬기는 이방 신전의 여 사제들은 밤이면 창녀로 활동을 하였는데 그들은 수건을 쓰지 않았기 때문에 생긴 시대적 상황 속의 문제 해결 방법으로 제시된 것으로 모든 교회에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바울은 다시“모든 성도의 교회에서 함과 같이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 저희의 말하는 것을 허락함이 없나니 율법에 이른 것 같이 오직 복종할 것이라”(고전 14:34)고 여자들이 모든 교회에서 지켜야 할 규범에 대하여도 말하였다.

 

죽으면 죽으리라

이스라엘은“내가 자식을 잃게 되면 잃으리로다”라고 결심하며 아들들을 애굽으로 보낸다. 이러한 내용은 에스더서에서도 볼 수 있는데, 이것은 모든 사람을 구하기 위한 한 사람의 죽음을 예고하는 것이다.

 

모든 사람의 생명을 구하기 위한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예표 한다고 할 수 있다. 이런 각오는 전능자이신 하나님께 맡긴다는 순종적 결단이며, 순종의 결단은 종말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종종 필요하다.

 

인간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일이라고 판단될 때 우리에게‘죽으면 죽으리라’는 믿음의 결단이 필요하다. 그러나 어떤 일이라도 모두 하나님께서 해주실 것이라고 생각하는 태도는 하나님께 순종하는 믿음이라고 할 수 없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할 일과 하나님의 하실 일을 구분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행함이 세상의 질서와 섭리를 벗어나지 않기를 원하신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는 하나님의 질서가 태초로부터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제 형제들과 함께 선 동생 베냐민을 본 요셉은 청지기에게 그들을 자기 집으로 인도하고 짐승을 잡으라고 명령한다. 그리고 점심을 그들과 함께 할 것이라고 전한다. 일이 이 지경에 이르니 앞뒤 전말을 알지 못하는 그 형제들은 이제 죽었구나하고 두려워하기 시작한다.

 

4천만분의 1의 확률

형제들은 청지기에게 나아가서 자기들의 변명을 늘어놓는다. 지난 날 자기들 자루 속에 있었던 돈으로 인하여 혹시 누명을 쓰지 않을까 하여 그 전말을 설명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청지기는“안심하라 두려워 말라 너희 하나님 너희 아버지의 하나님이 재물을 너희 자루에 넣어 너희에게 주신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애굽 사람인 청지기가 어떻게 하나님을 알고 있었는가? 이것으로 보아 요셉은 자신의 삶 속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모습을 통하여 자기 식솔들에게 하나님의 이름을 나타냈음을 알 수 있다.

 

청지기는 그동안 갇혀있던 시므온을 데리고 와서 그들의 발을 씻을 물을 내주었다. 상황이 이쯤 되면 앞의 일을 모르는 사람들로서는 참으로 난감한 처지에 이르게 된다. 드디어 점심 시간이 되자 요셉이 돌아와 그들 앞에 서자 그들은 그에게 줄 예물을 정돈하고 요셉에게 절을 하기에 이른다.

 

요셉이 어린 시절에 꾸었던 꿈이 실현되는 순간이다. 자기를 알아보지 못하는 형제들에게 요셉은 먼저 그들의 아버지의 안부를 묻고 어머니 라헬에게서 태어난 동생 베냐민을 보며 이가 너희의 동생이냐고 물었다. 그리고 그에게“소자여 하나님이 네게 은혜를 베푸시기를 원하노라”고 축복하였다.

 

그러나 요셉의 인내도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감정을 추스르지 못하여 방안에 들어가 울음을 토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얼굴을 씻고 나와서 그들 앞에 음식을 차린 후 그 형제들을 차서(次序)대로 상 앞에 앉혔다. 이에 그 형제들이 얼마나 놀랐겠는가? 이처럼 11명을 나이 순서대로 앉히려면 39,941,000대 1의 확률이 필요하다.

 

이것은 신통력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다. 아직 그 형제들은 요셉을 알아보지 못하고 있지만 오늘의 자리는 20년 만에 처음으로 갖는 회포로써 향후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어갈 열두 지파의 족장들의 자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