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강해/창세기 강해

(창세기 41장-1) 중앙무대의 스타가 될 때까지

이요나 2007. 2. 15. 12:46

(창세기 41장-1) 중앙무대의 스타가 될 때까지

 

(41:12-16) 그곳에 시위대장의 종 된 히브리 소년이 우리와 함께 있기로 우리가 그에게 고하매 그가 우리의 꿈을 풀되 그 꿈대로 각인에게 해석하더니 그 해석한 대로 되어 나는 복직하고 그는 매여 달렸나이다 이에 바로가 보내어 요셉을 부르매 그들이 급히 그를 옥에서 낸지라 요셉이 곧 수염을 깎고 그 옷을 갈아입고 바로에게 들어오니 바로가 요셉에게 이르되 내가 한 꿈을 꾸었으나 그것을 해석하는 자가 없더니 들은즉 너는 꿈을 들으면 능히 푼다더라 요셉이 바로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이는 내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바로에게 평안한 대답을 하시리이다

 

하나님의 장편 드라마

요셉은 17세에 팔려 가서 13년 간의 종살이와 옥살이를 하였다. 이제 하나님의 계획은 좀더 구체화되어서 요셉을 본 무대로 등장시키시고 있다. 우리는 우리의 인생 전체를 보지 못하기 때문에 오늘의 아픔을 고민하고 괴로워하고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의 전지하심 속에서 우리의 인생을 이끌어 가신다.

 

우리의 인생은 하나님께서 친히 쓰시고 연출하신 한편의 장편 드라마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에는 우리의 믿음의 지식이 필요하다. 만약에 요셉이 오래 참으시며 자기의 사람들을 가르치고 이끌어 가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몰랐다면 요셉도 많은 불평불만 속에서 온전한 믿음의 생활을 하지 못하고 더 많은 시행착오와 연단을 거쳐야 했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요셉이 하나님의 열차를 탔었기 때문에 이미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목적지에 갈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성경은 요셉이 17세부터 13년 간의 종살이와 옥살이의 애환에 대하여는 생략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는 히브리 사람이었기 때문에 우선 언어의 문제가 있었을 것이고 풍습의 문제가 있었을 것이다. 외국에 나가 보면 언어의 장벽이 얼마나 큰지 금방 알 수 있게 된다. 또한 종교의 문제와 문화적 장벽을 뛰어 넘는데도 적지 않은 고통이 있다. 자신이 아무리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해도 현실은 현실인 것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세상은 사단이 지배하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이 받아야 할 삶 속에서의 영적 환란은 말로 다 할 수 없는 것이다.

 

믿음의 훈련장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들이 함께 공존하는 생활 환경 속에서 겪어야 하는 고통도 크지만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 백성들 속에서 겪어야 하는 영적 고통은 말로 표현 할 수 없다. 만약 여러분들이 이것을 경험해 보고 싶다면 우상의 나라 일본에 들어가서 생활을 해 보면 된다.

따라서 지금까지 우리가 배운 성경 속에서 하나님께서는 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이방 속에서 혹독한 훈련을 시키셨는가 하는 의문에 대한 대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아브라함을 불러낸 곳은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 가나안 땅이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애굽과 소돔과 고모라의 고통을 경험하게 하셨고 이방 연합국들과의 전쟁도 경험하게 하셨다.

 

또 아비멜렉의 땅에 들어가 거주하게 하셔서 이방인들 속에서 살아가는 삶의 지혜를 터득하게 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훈련을 이삭에게도 시키셨는데 이삭은 아비멜렉의 땅 그랄에 사는 동안 그의 아버지의 삶의 모습을 답습하며 위기를 모면하였다.

 

또 야곱은 20년 동안 하나님을 잘못 알고 있는 혼합 종교 문화 체제, 즉 하나님과 물질을 함께 섬기는 라반의 문화권 속에서 20년을 살았다. 이러한 믿음의 연단과 훈련은 하나님의 사람들로 하여금 삶 가운데서 하나님의 지혜를 터득한다.

 

무엇을 배울 것인가?

바울은 성경에 기록된 구약의 모든 말씀은 우리의 거울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따라서 바울은 이방 교회의 사도로써 성도들이 꼭 알아야 할 4가지에 대하여 역설하였는데, 그 첫째가 이스라엘의 역사(고전 10:1) 요 둘째가 택한 백성 이스라엘의 구원이요(롬 1:25) 세 번째가 성도들에게 역사하는 성령의 은사에 대한 것이요(고전 12:1) 네 번째가 교회의 휴거에 관한 것이다.(살전 4:13) 4가지 중에서 우리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이스라엘의 역사에 관한 것이다.

 

성경책 66권 중에서 이스라엘의 역사에 해당하는 분량이 얼마인가를 살펴보자. 우선 거의 같은 내용 즉 이스라엘의 역대 왕들의 이야기가 열왕기 상하와 역대기 상하에 기록되어 있고 그 중에 더 중요한 사건에 대하여는 다시 예언서를 통하여 자세한 사건의 전말을 전개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 교회에서는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얼마나 가르치고 있는 것일까? 허구한 날 믿음을 강조하면서 기도 헌금 전도 찬양 등에 초점을 맞추어 하나님의 백성들을 광야 40년을 다시 헤매게 하는 것은 아닌지?

 

요셉은 17세의 나이에 타국 객지에서 천애 고아가 되어 하나님이 자기의 삶을 섭리하실 것을 믿고 묵묵히 자신이 처한 환경에 충실하였다. 그가 자신의 앞날을 알아서 인내한 것이 아니라 택하신 백성을 버리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섭리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에게 임하는 하나님의 은혜를 신뢰하였기 때문이다.

 

말씀과 화합된 믿음생활

그러나 이러한 믿음의 자세가 하루아침에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이미 아버지와 함께 있을 때 어려서부터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이론적인 지식을 터득하였기 때문이다. 이제 그 이론적인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지식이 삶 가운데 실제적인 지식과 지혜로 나타나기 위해서는 그의 믿음의 훈련이 필요했던 것이다.

 

히브리서 기자는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들을 때 강퍅하지 말라(히 3:15)고 말하였다. 복음의 전해들은 사람들이 저희에게 유익하게 되지 못함은 그들이 들은바 말씀을 듣는 자가 믿음과 화합치 않았기 때문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아침저녁으로 수많은 제단을 쌓으면서도 주먹구구식의 중언부언하는 기도만을 쌓고 그것을 믿음으로 착각하고 있다.

 

그런데 그들의 삶이 안식에 들어가지 못하고 자신들이 말하는 믿음이라는 모양은 있는데 그 믿음이 삶 속에서 소금과 빛으로 나타나지 못하고 먹고 마시는 육적인 문제의 축복을 위하여 전전긍긍하고 있다. 그러므로 성경은“우리가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쓸지니라”(히 4:11)고 가르치고 있다.

 

믿음의 중앙무대

이제 요셉은 삶 가운데서 실질적 믿음의 훈련을 끝내고 하나님께서 설정하신 무대의 중앙에 등장하기에 이른다. 그 중앙 무대에 등장하기 위하여 요셉은 2년 간의 옥고를 더 치뤄야 했었다. 그러나 옥에서 요셉의 꿈의 해석대로 생명을 다시 찾아 복직된 술 관원장은 자신이 복직되자 그 일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만다. 그러나 이것도 조바심을 가질 필요는 없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시는 때가 따로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늘 믿음 안에서 어떤 일을 한 후 그에 대한 응답이 늦어지면 조바심을 갖는데 이러한 태도는 목적을 놓고 하나님이 나의 뜻대로 이끌려 오시기를 강요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죽음의 날 하루 전 자신의 죽음의 고통을 놓고 기도하시면서 결국 하나님의 뜻대로 하여 달라고 기도하셨다.(마 26:39) 하나님의 계획은 한 치의 오차도 없다.

 

요셉은 보디발의 집에서도 충실한 노예로 그리고 감옥에서도 모범수로 생활하였다. 오직 자기를 지키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며 믿음을 버리지 않고 하나님을 경외하였다. 하나님의 때는 그가 옥에 갇힌 지 정확히 2년 뒤였다.

 

하나님의 계획은 또다시 꿈으로 역사하였는데 요셉에게 있어‘꿈’은 신나는 것이다. 요셉은 이미 꿈을 해석하는 하나님의 은사를 몇 차례 경험한 바 있다. 이미 자신이 경험하고 체험한 일들이라면 그 누구 앞에 선다 하더라고 담대함을 가질 수 있다. 왜냐하면 이 꿈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고 나를 세우신 것은 나를 통하여 하나님의 일을 하시기 위한 것임을 익히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내준 숙제

바로가 하룻밤에 두 개의 꿈을 꾸었는데 하수가 앞에 선 자기 앞에 아름답고 살진 일곱 암소가 하수에 올라와 갈밭에서 풀을 뜯고 있었고 그 뒤에 흉악하고 파리한 다른 일곱 암소가 올라와서 아름답고 살진 일곱 소를 잡아먹은 것이다.

 

바로가 잠에서 깨었다가 또 잠이 들었는데 이번에는 무성하고 충실한 일곱 이삭이 나오고 그 뒤에 쇠약하고 동풍에 마른 일곱 이삭이 나와 무성하고 충실한 일곱 이삭을 삼키는 것이다. 선명하고 분명하게 연속으로 꿈을 꾸고 나면 인간은 번민에 쌓이게 마련이다.

 

아침에 일어난 바로는 이 꿈 때문에 번민하기 시작하였고 애굽의 술객과 박사들을 모두 불러들여 자신이 꾼 꿈을 해석하게 하였으나 그들은 하나님의 비밀을 알 리가 없었다. 이때 술 관원장의 머리 속에 요셉의 이름이 번개처럼 스쳐가자 그는 바로에게 히브리 사람 요셉에 관하여 설명하기에 이른다.

 

결국 요셉은 의복을 정제하고 애굽의 바로 앞에 불려가게 되는데 바로 왕이“내가 한 꿈을 꾸었으나 해석하는 자가 없고 너는 꿈을 능히 푼다하니 나에게 그 꿈을 해석하라”고 명령한다. 이때 요셉은“꿈의 해석은 내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바로에게 평안한 대답을 하실 것이다”라고 자신의 입장을 밝힌다. 요셉은 감옥에서 술 관원장의 꿈을 들었을 때에도“해석은 하나님께 있다”고 밝혔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역자들의 태도이다.

 

속터지는 예배의 홍수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예배의 홍수에 빠져 있다. 이 예배의 홍수는 예수님 당시에도 유대인들에게 행하여져 있는 행위적 예배였다.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 말라기로부터 세례 요한이 나타나기까지 400년 간 하나님의 음성이 중단된 이후에도 그들은 계속 안식일 예배, 각종 절기 예배에 여념이 없었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새벽으로부터 철야 예배에 이르기까지 예배의 홍수에 빠져 있는데 과연 이처럼 드려지는 예배 가운데 얼마를 하나님께서 받고 계시는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예배라는 것이 드려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가 아버지 하나님 앞에서 그의 말씀을 통한 교제라는 개념으로 바뀌어야 하는데 아직도 우리는 죄인의 입장에서‘나를 받아 주옵소서’를 외치고 있으니 이것을 바라보는 주님의 속이 얼마나 터지겠는가 싶다. 또한 지금도 하나님께서는 많은 사역자들에게 하나님의 은사를 주신다.

 

그런데 최근 각 교회에서 행하여지고 있는 작태들을 보면 그것이 마치 하나님께서 자기들에게 주신 전유물인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것으로 그들은 하나님의 영광에 손을 댄 것 때문에 마지막 시험에서 스스로 넘어져 멸망의 길로 가고 있다.

 

베드로도 예루살렘 성전 앞의 앉은뱅이를 일으켜 세웠을 때 사실 가장 큰 위기에 처했던 것이다. 바울도 루스드라에서 앉은뱅이를 일으킬 때 사람들은 그를 신으로 여겼었다. 그러나 베드로와 바울은 이때에도 사람들을 진정시켜 이러한 능력이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임을 증명하였다.

 

이와같이 요셉은 몇 차례의 경험을 꿈을 해석하는 법을 터득한 후에도 그것은 자기가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바로에게 평안을 주시기 위한 것이라고 말함으로써 영광을 하나님께 돌렸다. 성경은“각 사람에게 성령의 나타나심을 주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2:7)고 가르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