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강해/창세기 강해

(창세기 39장) 불타는 청춘을 어떻게 참을 수 있었더냐?

이요나 2007. 2. 15. 12:59

(창세기 39장) 불타는 청춘을 어떻게 참을 수 있었더냐?

 

(창39:9-12) 이 집에는 나보다 큰 이가 없으며 주인이 아무것도 내게 금하지 아니하였어도 금한 것은 당신뿐이니 당신은 자기 아내임이라 그런즉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득죄하리이까 여인이 날마다 요셉에게 청하였으나 요셉이 듣지 아니하여 동침하지 아니할 뿐더러 함께 있지도 아니하니라그러할 때에 요셉이 시무하러 그 집에 들어갔더니 그 집 사람은 하나도 거기 없었더라 그 여인이 그 옷을 잡고 가로되 나와 동침하자 요셉이 자기 옷을 그 손에 버리고 도망하여 나가매

 

형통하게 하심

이제부터 성경에게 가장 주목받는 요셉에 대한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요셉은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과 같은 생애를 살았다. 그는 형제들에게 은 20개에 팔렸고 예수께서는 은 30개에 팔렸다.

 

그의 형제들에 의하여 이스마엘의 대상들에게 팔린 요셉은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바로의 시위대장 보디발의 종으로 팔렸다. 여기서 시위 대장이란 왕을 측근에서 모시는 무관 내시를 말하는 것으로 보디발은 내시였음을 알 수 있다.

 

글 머리 서두에“그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케 하심을 보았더라”는 기록은 참으로 우리를 흥미롭게 한다. 그 주인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 틀림없는데 요셉의 삶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을 보았다는 것이다. 성경은“여호와께서는 요셉을 형통하게 하셨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형통하게 하다’라는 말은‘잘되게 하다’라는 의미이다. 즉, 하는 일이 순조롭게 잘 되었다는 말이다. 어떻게 살았기에 여호와께서 그를 형통케 하셨는지 모르지만 우리는 요셉이 형제에게 팔려 보디발의 집에 오기까지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양처럼 묵묵히 갔던 것을 보아 요셉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자기의 운명을 오직 하나님에게 맡기고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였을 것이다.

 

여호와의 의미

또 우리는“요셉에게 자기 집과 그 모든 소유물을 주관하게 한 때부터 여호와께서 요셉을 위하여 그 애굽 사람의 집에 복을 내리심으로 여호와의 복이 그의 집과 밭에 있는 모든 소유에 미친지라”는 말씀을 보게 된다.

 

나는 본문 속에서“여호와께서 요셉을 위하여”라는 말씀을 참 좋아한다. 바울도 하나님이 위하시면“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롬 8:31)라고 하였다. 특히 본문에는 하나님의 이름이“여호와”라는 호칭으로 시종일관하고 있다.

 

여호와라는 이름은 주께서 구속의 관계를 맺은 자에게 나타내시는 하나님의 성호이다. 따라서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는 그 이름의 의미를 알 수 없다. 부모 형제를 떠나 수 만리 타국에서 종으로 살면서 누구를 의지할 수 있었겠는가? 그럴 때 나를 친히 구속하셔서 나의 보호자와 위로자가 되시어 지키시는 여호와를 만나게 된다면 이 얼마나 커다란 축복인가?

 

외국에 홀로 떨어져 외롭고 슬픈 삶을 살았던 사람들은 지금의 요셉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수 만리 타국에서 종살이하는 요셉은 그 순간부터 오직 자기를 지키실 여호와 하나님께 의지하고 신뢰하는 삶을 살았을 것이다. 그는 오직 천지 만물을 지으시고 주관하시는 하나님께서 자기의 모든 인생을 준비하실 것을 믿었을 것이다.

 

앙탈 부리지 마라

오늘을 사는 우리의 믿음 생활의 문제점은 과연 무엇일까? 우리는 눈앞에 보이는 현실만을 바라보므로 하나님의 원대하신 계획을 알지 못하고 울며불며 불평불만을 털어놓으며 하나님을 원망하기 일쑤다.

 

‘도대체 내가 무슨 잘못을 했기에 이런 일을 당하게 하신 것입니까’이러한 원망을 해보지 않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그러다가 그 고통의 세월을 넘어선 후에서야 그제사“아∼ 하나님께서는 이 일을 미리 알고 계셨구나!”하고 자신의 경솔함을 뉘우치게 된다. 이로 보건대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전체를 보고 경영하고 계신 것이다.

 

이 천지 우주 만물이 모두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손에서 경영되고 있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진행되는 그의 계획은 한치 앞을 모르는 우리가 발을 동동 구르든지 앙탈을 하든지 간에 지구가 한결 같이 돌고 있듯이 진행되고 있다.

 

이 땅에 하나님의 손에서 벗어날 자는 아무도 없다. 도살장에 있는 소가 소리를 지른다고 불쌍히 여기겠는가? 지금은 아프고 견디기 힘든 고통의 늪이라 해도 하나님의 사람에게는 저 한편에 하나님께서 준비해 놓으신 밝은 태양이 떠오르는 것이다.

 

오늘의 밤은 폭풍에 휩싸일지라도 하나님은 나로 하여금 평강의 강에 이르게 하신다. 따라서 오늘 보디발의 집에서 일을 하는 요셉도 아직은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어가는 과정에 있는 것이다. 그의 오늘의 고통의 인내가 후일 자기의 가족을 다 살리고 그 가족으로 하나님의 거대한 민족을 태동하게 하는 거대한 기틀을 만들고 있는 것이다.

 

아름다운 남자를 유혹하는 음녀의 사슬

그러나‘호사다마’라는 말과 같이 우리가 가는 길에는 늘 깊은 수렁이 도사리고 있다. 성경은 요셉의 외모에 대하여“요셉은 용모가 준수하고 아담하였다”라고 하였다. 여기서‘아담하였다’라는 말은‘아름답고 매력 있다’라는 의미이다.

 

아마 요셉은 이요나 만큼 매력적이었는가 보다. 내가 거울 앞에 설 때마다 느끼는 것인데 준수하다는 호칭은 붙이기 어려워도 아담하다는 말은 잘 어울릴 것 같다는 생각이다.(헉? 이거 너무했나?!) 성경에서 이러한 표현은 하나님의 사람 모세와 다윗에게 사용되었다. 그들도 나만큼 아름다웠었나 보다.

 

원래‘아름답다’라는 말은 남자들에게 쓰이는 말이다. 세상이 요상하게 변한 후로는 이 단어를 육체적인 아름다움에 연관하게 되어 여성의 전용어가 되었지만 원래부터 이 말은 남성어 이다. 한자로 보아도 아름다울‘美’는 큰 수양을 가르치는 의미이다. 때때로 아름다움은 세상에서 화근일 수 있다.

 

또 자화자찬 같아서 대단히 죄송한 말씀입니다만 나는 어려서부터 예쁘다라는 말을 많이 듣고 자랐다. 사람의 모습이 어려서의 모습과 성인의 모습은 크게 달라지게 마련이지만 내 경우 미소년의 시절에는 지나가는 사람들이 다시 한번 쳐다볼 정도로 고왔었다.

 

나는 그것이 좋기도 하고 때로는 싫기도 하였다. 왜냐하면 남자에게‘예쁘다’라는 말은 그리 듣기 좋지만은 않은 표현이었기 때문이다. 하여튼 요셉의 문제는 아름답고 매력적이라는 데 있다. 더군다나 그 집은 내시 보디발의 집으로서 늘 성적인 불만에 쌓인 보디발의 아내가 있었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남자가 있는 곳에는 어디나 음탕한 여인들의 눈짓이 있기 마련이다.

 

혹시 요즘 젊은이들이 이 이야기를 들으면 와우! 하고 즐거운 비명을 지르겠지만 하나님의 사람에게 이 문제는 지옥 열차를 타는 지름길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기 때문이다. 보디발의 아내는 밤낮으로 요셉을 유혹하여 동침할 궁리만 하고 있었는데 열정에 타오르는 20대 요셉으로써는 이 유혹을 뿌리치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더욱이 그녀는 각별한 미모의 여인이었을 것이다. 보디발의 아내가 온갖 냄새를 풍기며 아양을 떨며 올 때 그것을 쉽게 뿌리칠 수 있는가에 대한 것은 불타는 젊은 남자의 입장이 되어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얼마 전 어느 형제가 자기가 다니는 교회 집사와 불륜에 빠진 고통을 상담해 왔다. 그러나 이미 그 덫에 빠져들었다면 그 늪을 헤어 나오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음녀의 혀는 꿀을 발라 놓은 항아리 같아서 천둥 벼락이 떨어져 박살이 나기 전에는 절대로 깨어날 수 없는 악몽인 것이다.

 

은밀히 먹는 떡은 결국 꼬리가 잡혀서 많은 사람들 앞에서 벌거숭이가 된 채 고통의 표를 짊어지고 가인의 길을 걷게 될 것이다. 그러니 요셉의 처지도 참으로 난감했을 것이다. 그러나 요셉은 끈질기게 유혹하는 그 여인을 뿌리치며“주인이 가중 제반 소유를 간섭지 아니하고 다 내 손에 위임하였으니 이 집에는 나보다 큰 이가 없으며 주인이 아무것도 내게 금하지 아니하였어도 금한 것은 당신뿐이니 당신은 자기 아내임이라 그런즉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득죄하리이까”라고 말하며 유혹의 사슬을 완강히 뿌리쳤었다.

 

삼십육계가 상책이다

그러나 기어이 꽃봉오리를 꺾어버리고자 하는 여인의 집념은 황우 장사라도 당할 재간이 없다. 그녀의 그러한 집념을 알게된 요셉이 그녀와 마주치는 것조차 스스로 피하게 되자 보디발의 아내는 이왕 벌어진 일이니 끝장을 볼 심산으로 죽기살기로 덤벼든다. 요셉이 아무리 피하려 해도 집안을 관리하는 총무로서 대소사를 처리하려면 어쩔 수 없이 보디발의 아내가 있는 안채에 들어가지 않을 수 없었다.

 

마침 그 날 그곳에 사람들이 없는 틈을 타서 보디발의 아내가 결사적으로 덤벼들기 시작한 것이다. 요셉에게 덤벼들어 옷을 벗기기에 이르자 요셉은 벗겨진 옷을 벼려두고 그 자리를 뛰쳐나오고 말았다.

 

바울은 자기 젊은 제자 디모데에게“청년의 정욕을 피하라”(딤후 2:22)라고 가르쳤는데, 여기서“피하라”는 말은 본문의 요셉이‘도망하다’와 같은 단어이다. 따라서 이러한 상황에 몰리면 삼십육계 줄행랑이 상책이다. 일이 이쯤 되고 보면 여인의 욕정은 무시와 질투와 분노로 치닫게 마련이다. 그녀는 소리를 질러 사람을 불러모으고 히브리 사람이 나를 희롱하였다고 자기 손에 들린 요셉의 옷을 증거로 들이대었다.

 

결국 집안은 벌집 쑤신 것처럼 난장판이 되었고 저녁에 집으로 돌아온 보디발은 이 일을 듣고 대노한다.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이것은 완전한 누명이다. 여기서 우리가 요셉의 인내를 발견할 수 있는데 그는 그 주인 보디발에게 자신의 억울함을 일체 호소하지 않았다. 요셉은 활의 시위를 떠난 화살의 운명을 알고 있다. 요셉은 자기의 운명을 여호와께 맡겼다.

 

운명의 사슬

요셉은 보디발에 의하여 보디발의 집에 있는 옥에 갇히고 말았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성경은“요셉이 옥에 갇혔으나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고 그에게 인자를 더 하사 전옥에게 은혜를 받게 하셨다”라고 기록하였다.

 

혹시 여러분 중에 수갑을 차 본 일이 있으셨는지 모르겠다. 수갑은 풀려고 하면 할수록 더욱 조여들게 되어 있다. 이 원리와 마찬가지로 세상의 틀이란 순리를 따르지 않고 자신의 생각으로 쫓아가면 더 엉망으로 되어 버리기 일쑤다.

 

화살이 활시위를 떠나면 그것은 어디로 가든지 그 방향으로 나가게 되어있다. 이와같이 하나님의 사람들도 일단 하나님의 계획에 잡히게 되면 그의 운명은 그의 계획 속에서 운행되게 마련이다. 예수께서도 베드로에게“네가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가리라”(요 21:18)고 말씀하셨다.

 

우리가 이러한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게 되면 그 때부터 그 인생은 무한하신 하나님의 복을 얻게 된다. 요셉은 이 진리를 그 형제들에게 팔리던 날부터 깨달은 것인데 그는 어떻게 이렇게 쉽게 하나님의 지혜를 터득할 수 있었을까? 그 해답은 요셉은 어려서부터 성경 공부를 잘했기 때문이다.

 

야곱을 통하여 들은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그리고 자기 아버지 야곱과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이야기를 들으며 자란 요셉은 갑자기 자기에게 몰아닥친 환란 속에서 자기가 택하고 부르신 사람들을 세상의 환란 가운데서 지키신 여호와 하나님을 불러 자기의 생명을 의뢰한 것이다.

 

나는 30세에 예수를 믿고도 이러한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하나님만을 찾아 헤맸었다. 이미 내 삶 가운데 와 계신 여호와께 나의 삶을 맡기지 못하고 하늘에 계신 분을 만나려고 뛰어다녔던 것이다.

 

그분께서 나를 좀 어떻게 만들어 가시도록 인내하고 기다리고 의뢰하지 못하고 내 인생은 내 것이니 내가 살터이니 도와만 달라고 하면서 뛰어 다녔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그분이 날 잡은 것이면 못이기는 체하고 맡겨만 두면 되는 것을….

 

나는 창피한 이야기지만 이러한 진리를 오십이 되어서야 깨달았다. 히브리서 기자는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성경 말씀이 우리의 믿음과 화합하여야 안식에 이르게 된다고 가르치고 있다. 성경 공부를 부지런히 하도록 하자!

 

너무나 길고 멀다!

요셉이 형제들에게 팔려서 애굽 바로의 시위 대신 보디발의 집에 올 때는 겨우 17세 정도의 나이였다. 지금으로 말하면 고등학교 1, 2학년의 나이였다. 요즘 애들 같으면 DDR이나 하고 있을 나이인데 종의 위치에서 시위 대장의 집의 총무를 맡을 정도였다면 그의 영특함이 어떠했었는지 가히 짐작할 수 있다.

 

요셉은 보디발의 집에서 10년 정도 봉사했다. 그리고 보디발의 처의 모함으로 죄도 없이 또다시 감옥으로 끌려가게 된다. 우리는 이 과정을 보면서 하나님께 악취미가 있으신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요셉과 함께 하셔서 그를 형통하게 하셨고 그로 인하여 보디발의 집이 복을 받게 하셨기 때문이다.

 

또한 성경의 기록을 보면 요셉은 보디발의 처와의 일에서 결백하였고 그의 믿음에 있어서도 아무런 하자가 없었다. 악한 음녀의 끈질긴 유혹에도 자기의 위치를 지켜 하나님을 욕되게 하지 않았었다.

 

그런데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하나님께서 요셉의 억울함을 풀어주시지 않고 다시 감옥으로 들어가게 하시다니 이것은 너무한 정도가 아니라 몰인정한 처사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이 우리네가 갖는 일반적인 생각이다.

 

그러나 우리는 전체를 볼 수 없는 한계 속의 피조물임을 생각해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은 창조주이시며 천지만물의 생사 화복과 시작과 끝을 운행하시는 운행자이시며 관리자이심을 알아야 할 것이다.

 

이 정도면 됐잖아요!

사람이 이 정도에 이르면 인간은 하나님을 원망하게 된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에서 요셉의 불평과 원망을 찾아볼 수 없다. 성경의 최초의 저자 욥을 살펴보아도 그는 견딜 수 없는 고통 속에서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의심하고 원망하지는 않았지만 자기의 태어남에 대한 한을 폭로하였다.

 

그러나 요셉은 일체 불평불만을 토하지 않고 묵묵히 하나님의 운행하심을 신뢰하고 온전한 인내를 이루고 있었다. 그의 옥살이는 2년 간 계속되어 30살이 되기에 이르렀다. 인생의 가장 황금기 13년을 종살이와 옥살이로 보낸 것이다.

 

최근 안양 교도소 재소자들의 정신 교육을 담당하면서 나는 감당할 수 없는 내적 고통을 느낀다. 그들을 만날 때마다 느끼는 것은 그들 속에 있는 선한 양심이다. 일시적인 분노였든 습관적인 범죄의 결과였든 간에 내가 만난 그들에게는 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이 살아 있었다는 것이다.

 

교도소를 다녀온 날 저녁이면 가슴으로부터 짓눌러 오는 아픔으로 잠을 이루지 못하고 나는 장시간 주님과의 만남의 시간을 가져야 했다. 그 무엇이 그들 속에 있어서 하나님의 위대한 형상과 모양을 저처럼 처절한 죄인의 모습으로 만들었을까 하는 생각과 내 속에도 그들과 똑 같은 모습이 꿈틀대고 있다는 생각 때문에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그들과 우리의 죄의 차이가 백지장 하나 차이인데 우리는 자유의 몸으로 먹고 입고 춤추고 놀고 있고 그들은 높은 철책 안에서 푸른 죄수 복을 입고 묶여진 세월을 살아야 한다. 더욱이 믿음의 형제를 만날 때 나의 가슴은 억장이 무너지는 것 같다. 그와 나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의인된 동일한 한 형제인데 나와 그 사이에는 넘지 못할 현실적인 담이 놓여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