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강해/창세기 강해

(창세기 38장) 예수님의 족보 의심하지 말라

이요나 2007. 2. 15. 13:03

(창세기 38장) 예수님의 족보 의심하지 말라

 

(38:20-25) 석 달쯤 후에 혹이 유다에게 고하여 가로되 네 며느리 다말이 행음하였고 그 행음함을 인하여 잉태하였느니라 유다가 가로되 그를 끌어내어 불사르라 여인이 끌려 나갈 때에 보내어 시부에게 이르되 이 물건 임자로 말미암아 잉태하였나이다 청컨대 보소서 이 도장과 그 끈과 지팡이가 뉘 것이니이까 한지라

 

22년의 침묵

요셉이 팔려간 이후 약 22년 동안 그의 형제들과 야곱의 삶에 대하여 성경은 침묵하고 있다. 다만 본문 말씀이 요셉이 팔려간 이후 그의 가족이 모두 애굽으로 내려갈 때까지의 유일한 기록이다.

 

사실 유다는 그 형제들이 요셉을 팔고자 하였을 때 그 일을 반대했던 사람이다. 그의 맏형 르우벤이 요셉의 생명을 살려 구덩이에 던져 넣은 것을 유다가 형제들을 설득하여 이스마엘 사람에게 팔게 되어 구사일생으로 요셉의 생명만은 보전하게 된 것이다.

 

이 일로 형제들과 마음이 상한 유다는 그 형제들을 떠나 헤브론에서 16km정도 떨어진 곳으로 이사를 했다. 이때 야곱은 후계자 구도에 있어서도 아비의 첩을 통간한 르우벤과 세겜의 살인 사건을 저지른 시므온과 레위는 야곱의 눈밖에 나서 장자권을 이어받기 틀려 버렸고 장자의 명분은 유다에게 주려고 계획했을는지도 모를 일이다. 여기서 우리를 흥미롭게 하는 것은 유다의 족보에서 메시야가 나온다는 것이다.

 

장가를 잘 들어야지!

그 당시 히브리 민족은 아직 태동기여서 자손이 많지 않았기 때문에 믿음의 3대 손인 야곱은 자녀들의 배우자 문제에 무척 고심하였을 것이다. 처가집으로 보내자니 서로 넘지 않기로 언약을 하였고 이스마엘이나 에서의 딸들과 짝을 짓자니 어머니 리브가 때부터 몹시 꺼려오던 일이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어쩌면 유다는 가나안 여인 수아사람의 딸을 개종시켜 보겠다는 생각을 하였는지도 모른다.

 

요즘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우상을 섬기는 집안들과 결혼을 하여 엄청난 대가를 치루고 살아가는 것을 보는데 결혼이란 인륜지대사라는 말과 같이 그리 간단히 생각할 문제가 아니다. 유다가 가나안 여인 수아의 딸과 결혼하여 아들들을 낳게 되는데, 그 아들들의 이름을 그녀가 지어주고 있음을 보아 이 여인의 고집이 보통은 넘는 듯하다.

 

아마 유다가 반할 만큼 미모가 출중했던 만큼 성격 또한 드세서 유다가 감당하기에는 힘에 겨웠을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유다의 처 수아사람의 딸은 아들을 셋 낳고 그 이름을‘엘’‘오난’‘셀라’라고 짓는데 성경은 막내아들 셀라를 낳을 때 유다는 거십에 있었다고 기록한 것으로 보아 부부 관계는 원만치 못하였던 것 같다. 세월은 유수와 같이 흘러 큰아들 엘이 장성하자 유다는‘다말’이라는 여인을 며느리로 얻게 되는데 이 여인이 바로 메시야의 족보에 이름을 날릴 정도로 용감무쌍한 여인이다.

 

다말은 시세 말로 하면 팔자가 드센 여자로 태어나서 서방을 둘이나 잡아먹은 여인이었다. 우리나라에도 예로부터 여자가 잘 들어와야 집안이 두루 편하다 하였는데 다말이 들어온 이후로 유다의 집안은 초상집이 되고 만다.

 

그렇다고 어디 이것이 이 여인의 탓이랴! 그렇게 타고난 것을 이 여인인들 어찌할 수 있을 것이랴! 하나님께서는 다말의 남편 유다의 큰아들 엘을 어떻게 죽이셨는지, 또 그가 어떠한 악한 일을 저질렀는지 모르지만 성경은“유다의 장자 엘이 여호와 목전에서 악하므로 여호와께서 죽이셨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이것은 사실 다말의 책임이 아니고 가나안 여인을 아내로 맞이한 관계로 아들들을 올바르게 교육시키지 못한 유다의 책임이라고 볼 수 있겠다.

 

형제의 대를 이어야 한다!

그 당시 그 지방의 풍습에는 형이 죽으면 아우가 형수와 동침을 하여 형의 핏줄을 잇게 하도록 되어 있었는데 이것은 후일 이스라엘 백성에게 율법으로 주어지게 된다. 신명기 25장을 보면 형제가 자식을 낳지 못하고 죽으면 그 남편의 형제가 형수와 동침하여 자식을 낳아 죽은 형의 혈통을 잇게 하여야 하는데 만약 그 형제가 그것을 즐겨하지 않을 시에는 그 죽은 자의 처가 성문 앞의 장로들 앞에 나아가 그 형제의 발에서 신발을 벗기고 그 얼굴에 침을 뱉으며‘형제의 집을 세우기를 즐겨하지 않는 자’라고 선포하여 그 사람은 후대까지‘신발을 벗기운 자’라고 하는 관습이 있었다.

 

이 일은 후일 룻기에서도 거론되고 있는데 나오미의 며느리 모압 여인 룻이 나오미를 따라와 그의 고향에서 토지 무르기를 할 때 룻을 사모한 보아스가 그를 아내로 맞이하여 나오미의 아들의 혈통을 이어 후일 다윗을 나은 이새의 가문을 일으키는데 이처럼 메시야의 족보는 오랜 세월 동안 사단으로부터 공격을 받아 수천 년을 두고 많은 환란을 겪어왔다. 지금도 위대한 지도자들의 성장 과정을 보면 엄청난 대가들을 치렀음을 보는데 갈보리채플을 일으킨 척 스미스 목사도 그의 아버지와 형들을 모두 사고로 잃어야 하는 비운을 겪었었다.

 

자위 행위도 악인가?

유다의 큰 아들 엘이 죽자 유다는 둘째 아들 오난에게 다말과 동침하게 하는데 성경은 오난이 그녀가 낳을 자식이 자기의 자식이 되지 않을 것을 알고 땅에다 설정하였고, 이를 보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를 악하게 여기셔서 그를 죽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여기서 하나님이 오난을 악하게 여긴 것은 부모의 뜻을 알고서도 그 일을 그르쳤기 때문에 악하다고 하신 것이다. 여기서 사람들이 산아제한이나 자위행위에 대하여도 성경은 정죄하는가 하고 의문을 갖게 되는데 그것은 그렇지 않다.

 

성경에는 동성애, 간음, 음행 등에 대하여는 분명히 죄악으로 규정하고 있지만 자위행위나 산아제한에 대하여는 성경 어디에도 언급하지 않았다. 따라서 성경에 언급되지 않은 것에 대하여 교회가 무리한 해석을 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라고 하겠다.

 

왜냐하면 미혼 전인 젊은이들이 자위행위를 한 번도 하지 않고 성장한 젊은이들이 거의 없고, 피임을 하지 않는 젊은 부부들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성경은 이러한 것은 인간의 양심에 스스로 맡겨서 스스로 절제하여 악에 들지 않도록 이끌고 있다.

 

왜 안주는 거야?

이제 일이 이에 이르자 유다는 겁이 났는가 보다. 아직 셋째 아들 셀라가 어린 탓도 있었지만 자식을 둘이나 해치운 팔자 드센 며느리 다말을 친정으로 보내며“수절하고 네 아비 집에 가서 내 아들 셀라가 장성하기를 기다리라”고 명한다.

 

까마귀 날자 배 떨어진다고 졸지에 자식을 둘이나 잃은 유다는 그의 처인 수아의 딸마저 세상을 떠나자 유다는 그 상실한 마음을 위로 받지 못하여 아둘람 친구 히라와 함께 딤나의 양털 깎는 곳에 올라가서 답답한 마음을 풀고자 하였다.

 

이 때 유다는 사십이 족히 되었을 때였다. 한편 다말은 가는 세월을 손꼽으며 시아버지 유다의 기별을 눈이 빠지게 기다렸으나 아무런 소식이 없자 막내 셀라를 자기에게 주지 않으려는 유다의 속셈을 알아차린다.

 

이에 다말은 이미 서방 둘을 떠나보내고도 그 가문을 잇지 못한 여인으로서는 이미 재수 없는 여인으로 낙인은 찍힌 것이고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마찬가지이니까 어떻게 해서라도 그 가문의 아들을 낳아 여인의 도리를 성취해보고자 하는 한을 품고 기회를 엿보고 있었을 것이다.

 

이 세상의 원칙 중에 변하지 않는 것은 공급은 늘 수요에 맞추어져 있다는 것이다.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던 다말은 마침 상처한 시아버지 유다가 마음의 위로를 받고자 친구 히라와 함께 딤나로 올라왔다는 소식을 듣는다. 다말은 기회를 잃지 않고 매혹적인 스카프로 얼굴을 싸매고 맵시나는 드레스로 몸을 감싼 후 유다의 곁으로 접근한다.

 

이미 상처한지 한참된 터에 길가에서 만난 기생차림의 여인은 그야말로 굴러들어 온 떡이 아닐 수 없다. 타오르는 불꽃을 억제하지 못한 유다는 그녀에게 내 기분을 맞춰주면 나중에 염소 새끼를 주겠다고 흥정을 한다. 그 당시 염소 새끼 값이 만만치 않았었는가 보다.

 

불붙은 장작

다말은 얼씨구나 하고“내게 무엇으로 약조를 주랴”고 유다의 애간장을 녹인다. 이에 유다가 네가 무엇을 원하느냐고 묻자 그녀는 유다에게 도장과 끈과 지팡이를 맡기라고 한다. 이 말을 들은 유다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어서 자신의 도장과 끈과 지팡이를 다말에게 주고 허겁지겁 그녀와 동침을 한다.

 

우리는 이 사실을 객석에서 보니까 유다와 다말이 천하에 불륜을 저지르는 추악한 바퀴벌레처럼 보이지만 다말로써는 목숨을 건 일생 일대의 승부수를 띄운 것이다. 또한 상처한지 몇 년만에 타오르는 젊은 혈기를 억제하지 못한 유다에게 누가 돌을 던질 수 있단 말인가? 그날은 이유있는 운명의 불타오르는 밤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두 사람이 불륜의 관계를 맺고 다말은 그날 밤 소원을 성취한다. 모처럼 만에 몸을 푼 유다는 몸값으로 약조한 염소 새끼를 가지러 가고 다말은 그 길로 줄행랑을 놓았다.

 

유다가 몸은 풀었지만 상대가 기생이라 찜찜했었는지 아둘람 친구 히라에게 염소 새끼를 들려 보내면서 그녀에게 맡겨 두었던 도장과 끈과 지팡이를 찾아 달라고 부탁하였다. 그런데 이게 웬 일인가? 아무리 찾아도 그곳에는 기생은 없다고 하니 유다는 참으로 난감하였다. 아무리 중요한 인감 도장이라도 이 일을 떠벌리고 찾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러나 덮어버린다고 이 일이 한강에 지나간 배 같겠는가?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나는 것 아닌가? 석 달이 지난 후에 그의 과부 며느리 다말이 임신하였다는 말을 들은 유다는 대발 노발하여 끌어내어 불사르라고 호통친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사람들에게 끌려나온 며느리 다말의 손에 자기의 인감 도장과 끈과 지팡이가 들려있지 않은가?

 

메시야의 여인들

결국 유다는 이 일이 하나님으로부터 이루어진 것임을 깨닫고 순순히 운명을 받아들인다. 드디어 해산날이 이르러 다말이 몸을 풀게 되었는데 이왕 망신당한 것 작정하고 소문낼 요령인지 다말은 쌍태를 밴 것이 아닌가?

 

해산날에 이 쌍둥이들이 뱃속에서부터 싸우며 나오는데 산파가 먼저 나온 놈의 손가락에 붉은 실을 매어 두었더니 그 뒤에 놈이 헤치고 나오고 있지 않는가? 이에 산파가 그 아이 이름을‘베레스’라고 짓고, 홍사를 묶고 나중에 나온 아이를‘세라’라고 이름을 지었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마태복음 1장의 아브라함의 족보에 유다와 다말 사이에 낳은 베레스의 이름이 올라 후일 이 족보에서 메시야가 나온 것이다. 또한 마태복음 1장에는 메시야의 족보를 이어가는 다섯 여인의 이름이 나오는데 그 처음이 시아버지 유다의 아들을 낳은 다말이고, 여리고 기생으로 메시야 족보에 오른 라합과 모압 여인으로 보아스의 아내가 된 룻, 그리고 우리야의 처였다가 다윗의 아내가 되어 솔로몬을 낳은 밧세바와 요셉의 정혼한 여인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낳은 마리아이다.

 

참으로 우리의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혈통적 족보를 보면 시세 말로 완전 콩가루 집안이다. 그러나 이것은 혈통과 관계없이 전 인류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하여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시는 하나님의 은혜이지 어느 사교 집단들처럼 인간의 육체는 무익한 것으로 아무렇게나 해도 좋다는 식의 해석을 내리면 절대로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