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강해/창세기 강해

(창세기 37장) 꿈꾸는 자여, 자중자애 하여라!

이요나 2007. 2. 15. 13:06

(창세기 37장) 꿈꾸는 자여, 자중자애 하여라!

 

(창37:3-5) 요셉은 노년에 얻은 아들이므로 이스라엘이 여러 아들보다 그를 깊이 사랑하여 위하여 채색 옷을 지었더니 그 형들이 아비가 형제들보다 그를 사랑함을 보고 그를 미워하여 그에게 언사가 불평하였더라 요셉이 꿈을 꾸고 자기 형들에게 고하매 그들이 그를 더욱 미워하였더라

 

왜 아직 야곱인가?

본문 말씀의 시작을 보면 야곱의 이름은 아직 그대로 사용되고 있다. 그의 이름은 이미 하나님으로부터 이스라엘이라 고쳐 불려졌는데도 말이다. 그러나 37절을 보면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으로 기록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러한 것을 통하여 우리는 그 당시의 하나님의 사람의 믿음의 상태를 알아 볼 수가 있다. 즉 야곱이라 불릴 때에는 하나님의 사람으로서의 온전하지 못한 옛 야곱의 모습의 상태이고 이스라엘이라 불릴 때에는 하나님의 마음에 들 때라고 보면 된다. 이러한 모습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에게도 동일한 현상이다.

 

때로는 옛 습성이 그대로 나타나서 이 사람이 예수님을 믿는 사람인가 할 정도로 강퍅해 있고 어떤 때는 순한 양처럼 온유한 심령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도 이에 대하여“너희가 육으로 살면 죽을 것이요 영으로 살면 살 것이라”고 하였다.

 

우리가 이 땅에서 사는 날 동안 우리는 육체라는 테두리 속에서 세상의 지배를 받고 살게 되어 있는데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말씀을 따라 성령의 지배를 받고 살면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게 되는 것이고 만약 우리가 예수를 믿고 있더라도 자기의 육신의 정욕을 따라 세상의 지배를 받으면 결국 세상 사람이 되고 만다. 이와같이 믿음의 조상 야곱도 그가 오랜 믿음의 경륜 속에서 하나님에게 속한 사람이었어도 그의 육체는 이 세상의 임금, 즉 사단의 지배 영역인 땅에 발을 붙이고 살고 있기 때문에 그 환경에 따라서 많은 믿음의 연단을 겪게 마련이다.

 

아버지의 편견적 사랑

야곱은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땅, 아비 이삭이 거하는 땅에서 살게 되었다. 아버지 이삭의 죽음 이후 육신의 형 에서는 에돔 땅으로 불려지게 된 세일 산 쪽으로 이동하였고 야곱은 믿음의 상속자가 되어 약속의 땅에 거하게 되었다. 우리가 다 아는 바와 같이 귀향 길에서 얻은 막내아들 베냐민을 끝으로 야곱은 열두 아들과 함께 목축을 하면서 살았다.

 

야곱은 열두 아들 중에서도 사랑하는 아내 라헬이 나은 아들 요셉과 베냐민을 더욱 편애하였는데 그 중에서도 야곱은 다른 아들들보다 더 편애하여 채색옷을 입혔다. 채색옷이라 번역된 히브리어는‘긴소매 옷’이란 뜻으로 귀족의 아들이 입는 옷을 말한다.

 

이로써 야곱은 은연중에 자기의 상속자가 요셉임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가뜩이나 여러 가지 사건으로 아버지 야곱으로부터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란 다른 아들들은 요셉을 질투하고 미워하기 시작하였다.

 

성경은“그 형들이 아비가 형제들보다 그를 사랑함을 보고 그를 미워하여 그에게 언사가 불평하였다”라고 증언하고 있다. 아마 여러분들 중에서도 이러한 경험을 하고 자라나신 분이 계셨겠지만 나 또한 이와 같은 환경에서 자라났다.

 

우리 아버지에게는 전 처의 소생인 나의 이복형제가 다섯이나 있었는데, 나는 우리 어머니의 삼 남매 소생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노년에 얻은 나를 특별히 사랑하셔서 늘 단정하고 좋은 옷을 입히셨는데 그 통에 나는 형제들로부터 많은 미움을 받고 살았다. 또한 나는 장남이 아니면서도 어머니에 의하여 아버지의 장남으로 성장했다.

 

그 영향으로 내 동생은“장남은 아버지이다”라는 어머니의 말씀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듣고 자랐다. 이처럼 나는 특별한 대우를 받았었는데 나 또한 그만큼 유난을 떨고 자라났다. 그러니 이복 형들로부터 미움을 받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이러한 아버지의 편견적 사랑은 후일 엄청난 사건을 불러일으키게 되는데 이것으로 우리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사랑이라는 것은 자식이라도 편애할 수밖에 없는 인간으로는 도저히 어쩔 수 없는 제한된 속성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꿈꾸는 자와 질투

요셉은 아버지 야곱의 사랑을 독차지한 것만큼 유난을 떨면서 자라났다. 그는 유난스럽게 꿈을 잘 꾸었는데 이 꿈 자랑으로 형들의 미움을 더 사게 되었다. 그가 하루는 꿈을 꾸고 형제들에게“우리가 밭에서 곡식을 묶더니 내 단은 일어서고 당신들의 단은 내 단을 둘러서서 절하더라”며 자랑하였다.

 

그리고 그는 또 결정적인 미움을 살 꿈을 꾸고 아버지 야곱과 형들에게“내가 또 꿈을 꾼즉 해와 달과 열한 별이 내게 절하더라”고 말하였다. 이것을 들은 야곱은 당돌한 아들 요셉에게“너의 꿈이 무엇이냐? 나와 네 어미와 형제들이 참으로 가서 땅에 엎드려 절하겠느냐”라고 나무랐으나 마음에 두고 있었다. 이로 인하여 형제들은 요셉을 더 시기하게 되었다.

 

성경에는 많은 상징적인 이야기들이 나온다. 사실 이러한 상징적인 표현들을 잘못 해석하여 교회사 속에서 엄청난 문제와 파벌을 만들었었다. 성경에 나오는 상징적인 표현은 모두 성경으로 풀어야 한다. 인간의 생각과 자신의 깨달음에 의존하게 되면 엄청난 문제를 야기하게 된다. 베드로도 이에 대하여 성경의 말씀에는 알기 어려운 것들이 있는데 이것은 우리 안에 샛별이 떠오름처럼 확실한 주의 가르침이 있기까지 삼가 조심하는 것이 좋다고 지적하였다.

 

본문에서 요셉이 말한 꿈은 성경 전체를 해석하는 중요한 열쇠가 된다. 성경 해석학에는‘최초의 사용 법칙’(Law of first use)과‘해석의 불변’(Expositional constancy)의 법칙이 있다. ‘최초 사용 법칙’이란 성경에 나오는 상징적 표현의 해석은 성경의 기록상 제일 먼저 언급된 부분을 따라 해석하는 법칙이고,‘해석의 불변성’이란 죄로 쓰인 것은 항상 죄로, 악으로 쓰인 것은 항상 악으로 쓰여지는 법칙이다. 따라서‘누룩’은 죄의 상징으로 성경 어디에 나오든지 죄로 해석하여야 하며 어린양의 희생은 성경 어디에 나오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해석되어야 함과 같다.

 

성경해석의 원칙들

요한계시록 12장을 보면 본문에 나온 요셉과 같은 맥락의 내용들이 나오고 있는데,“해(태양)를 입은 한 여자가 있는데 그 발 아래는 달이 있고 그 머리에는 열두 별의 면류관을 썼다”라고 기록되었다.

 

이것을 많은 신학자들이 요한계시록 1장 20절의 주의 손에 있는‘일곱별’은‘일곱 교회’라는 기록을 들어 세상에서 대 환란을 통과하는 교회의 모습으로 해석하고 있는데 이것은 그렇지 않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깨뜨려 피로 산 교회인데 그 교회가 하나님이 세상에 내리시는 대 환란을 받는다는 것은 언어 도단이다. 누가 어떠한 말을 한다고 해도 이것은 비성경적인 해석이며 억지다.

 

혹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과 교회들은 그들의 의지에 의하여 대 환란을 통과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성령께서는 자신을 거스리는 인간의 의지를 그대로 내버려두실 것이기 때문이다. 이왕에 다른 해석이 대두되고 있다면 가장 성경적이고 선한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생각할 것인데 자신들의 고집을 끝까지 주장하는 사람들의 생각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

 

요한계시록 12장에 나오는“해와 달과 열두 별을 가진 여인”은 이스라엘을 가리키는 것이다. 이것을 달리 해석하면 계시록 전체의 내용이 뒤바뀌고 만다. 사실 이 꿈은 요셉을 통하여 주신 하나님의 계시였다. 따라서 오늘 요셉을 시기하고 질투하여 그들을 팔아버린 형제들은 하나님의 계시와 같이 결국 요셉에게 절을 하고야 만다.

 

형제의 질투

어느 날 아들들이 양을 치러 나가서 늦도록 돌아오지 않자 야곱은 요셉을 세겜 지역으로 보내어 찾아오도록 한다. 사실 그 아들들은 세겜으로 나가 있었다. 야곱은 그 아들들이 세겜 지역을 배회하는 것을 보고 늘 걱정을 했었다. 지금 그들이 살고 있는 헤브론은 세겜으로부터 80km 떨어진 곳으로 상당히 먼 거리에 있는데 야곱의 아들들은 그들이 처음 발 디딘 가나안 땅 세겜의 매력을 아직 떨치지 못하였었는가 보다.

 

야곱에게는 생각하기조차 싫은 이름이었지만 그 아들들은 성인이 되어서 첫 번째 경험한 세상과의 싸움에서 승리한 기억 때문에 그 이름이 마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하였을 것이다. 이처럼 젊은이들의 첫 경험은 매우 중요하다.

 

세상의 달콤한 맛을 경험한 육체의 떨림을 떨쳐내기란 쉽지 않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의 성령으로 인침을 받아 성령의 보호를 받는 크리스천은 매우 행복한 사람들이다. 그러나 우리 삶 속에서 성령님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역사 하신다.

 

요셉은 형들을 찾아 나가서 세겜에 이르렀으나 그의 형들을 만나지 못하고 방황하다가 어떤 사람으로부터 그 형제들이 도단에 간 것을 알게 된다. 도단은 세겜으로부터 24km 더 떨어진 곳이며 애굽으로 통하는 유일한 통로로 동방의 상인들이 애굽으로 가려면 그곳을 반드시 통과하여야 하는 길목이었다. 애굽은 하나님께서 일찍이 아브라함으로부터 금하던 나라인데 이 형제들의 마음이 세상으로 향하자 그들은 하나님의 금하신 범위까지 넘어서려고 하고 있다.

 

요셉이 형들을 찾아 달려오는 것을 본 형제들은“꿈꾸는 자가 오도다 우리가 그를 죽여서 구덩이에 던지고 짐승에게 먹혔다고 하고 그의 꿈이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보자”고 벼르게 된다. 이처럼 사람 마음 속에 자리잡은 시기와 질투는 살인까지 유발하게 만든다. 최초의 살인자 가인도 그의 아우 아벨이 하나님으로부터 인정을 받게 되자 그를 시기하여 죽이지 않았던가?

 

업보(業報)의 연속

그때 르우벤이 형제들을 말려“피를 흘려 생명을 상하게 말자”라고 하여 요셉의 생명을 구해 광야의 구덩이에 던져 넣었다. 요셉의 생명을 구할 생각이었으면 큰 형으로써 그들을 말릴 수도 있었을 터인데 그 역시도 요셉 시기하여 한번쯤은 단단히 혼을 내준 후 형제들의 마음이 풀어지면 구해줄 생각을 했었는가 보다.

 

여기서 우리는 그들의 잔혹한 심성을 보게 되는데 어린 동생을 물 없는 웅덩이에 집어넣고 그들은 앉아서 음식을 먹고 있다. 형제의 생명을 아끼지 않는 자들이 자신의 생명을 위하여는 음식을 먹고 있는 것이다.

 

르우벤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유다가 그 형제들에게 말하여“우리가 동생을 죽이고 피를 은닉한들 무엇이 유익하겠느냐? 차라리 이스마엘 사람들에게 팔고 우리 손으로 죽이지는 말자”라고 그들을 설득시켰다.

 

역시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돈이면 다 통하게 된다. 결국 이렇게 하여 요셉은 은 20개에 이스마엘족 장사꾼들에게 팔리고 만다. 이 때 르우벤이 돌아와 요셉을 구하려 하였으나 동생이 없어진 것을 보고 대성통곡을 한다. 이처럼 르우벤은 장자였으나 합당한 때를 얻지 못하는 성격상의 모순을 가진 자였다. 결국 요셉은 애굽의 바로의 시위 대장 보디발에게 팔려 가게 되고 그 형제들은 요셉의 채색 옷에 염소의 피를 적시어 야곱에게 보이고 거짓을 고한다.

 

이 때 야곱은 대경실색하여 애통하며 그 슬픔이 죽음에까지 이를 정도가 되었는데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지금 야곱 앞에 벌어진 사건은 야곱이 자기 형 에서의 옷을 입고 아버지 이삭 앞에 나아가 장자권을 갈취하던 때의 모습과 매우 같은 상황이라는 것이다.

 

그는 자기 형제의 이름을 팔아 아버지를 속였지만 그의 아들들은 형제의 생명을 팔아 아버지를 속이고 있는 것이다. 이것으로 성경은 믿음의 사람에게 있어서도 심은대로 거두는 법칙이 있음을 가르치고 있다. 이에 대하여 성경은“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 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갈 6:7)고 증언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