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강해/창세기 강해

(창세기 35장) 너의 혼을 어디에 묻을 것인가?

이요나 2007. 2. 15. 13:12

(창세기 35장) 너의 혼을 어디에 묻을 것인가?

 

(창35:2-5)야곱이 이에 자기 집 사람과 자기와 함께 한 모든 자에게 이르되 너희 중의 이방 신상을 버리고 자신을 정결케 하고 의복을 바꾸라 우리가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 나의 환란날에 내게 응답하시며 나의 가는 길에서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께 내가 거기서 단을 쌓으려 하노라 하매 그들이 자기 손에 있는 모든 이방 신상과 자기 귀에 있는 고리를 야곱에게 주는지라 야곱이 그것들을 세겜 근처 상수리나무 아래 묻고 그들이 발행하였으나 하나님이 그 사면 고을들로 크게 두려워하게 하신 고로 야곱의 아들들을 추격하는 자가 없었더라

 

살아있는 지옥의 체험

피비린내 나는 살육 전쟁을 치르고 난 야곱. 세상에서 사랑을 실천하며 사람들의 빛이 되어야 할 하나님의 사람들이 칼을 들고 살육과 강탈을 한 것이다. 이유야 어찌되었든 하몰족의 모든 남자들은 할례를 하였다. 그들이 비록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할례의 의미를 깨닫지 못하였지만 그것은 그들의 책임은 아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모르는 이방인에게 하나님의 이름을 알리는 것은 아브라함의 후손인 야곱의 의무이다. 이를 위하여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 되신 것이다. 바야흐로 야곱의 열두 아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백성이 이 땅에 하나님의 복음을 실천할 단계인데 그들이 하나님의 목전에서 살인을 저지른 것이다.

 

그것도 처음부터 그들을 몰살할 계획을 세우고 그들이 할례를 받고 고통스러워할 때를 노려 그들을 모두 죽인 것이다. 살인을 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명령을 이용한 것이다. 어디 그뿐이랴. 아들들이 합세하여 그들의 재산을 약탈하였다. 세상에 하나님의 사랑을 가르쳐야할 하나님의 아들들이 살육과 강탈을 하였다니…. 아! 야곱의 심정이 어떠했으랴! 20년 성경 공부가 도루묵이 된 것이다.

 

우리는 때때로 세상에서 죽음을 맛볼 때가 있다. 또한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으로써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지 못하고 세상에서 못할 짓을 했을 때 우리 가슴속에서는 지옥의 혀가 내밀게 된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 일을 저지르기 전까지는 마음에서 제지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결국 일을 저지르고 그 일 때문에 환란 가운데 눕게될 때 지옥의 사자는 긴 혀를 내밀고 우리의 머리채를 잡고 세상 밖으로 끌고 다닌다.

 

지난 연말 그 오랜 시간동안 옷 로비 사건에 휘말렸던 사람들을 보라. 그들의 몰골이 어떠하였는가? 이것이 어디 그들뿐이랴! 이 불 심판은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사정없이 임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이러한 강퍅한 심령이 왜 생겨났는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사망의 그늘에 비치는 빛

그러나 이 지옥의 사자는 우리를 위하여 준비하신 하나님의 사자이다. 의인 욥을 시험한 사단이기도 하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택한 자들을 그리 쉽게 사단에게 던지시지는 않으신다. 가룟 유다도 그가 회개하고 돌아올 만한 충분한 충고와 시간을 주었었다.

 

주께서 그 일에 대하여 공개 석상에서 몇 번을 말하였던가? 그러나 그는 불의를 향한 마음의 욕정을 제어하지 못하고 사단이 주는 생각을 받아먹고 만다. 따라서 믿음을 향한 연단과 시험은 우리를 하나님 앞에 바로 서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일 수 있다.

 

살아있는 죽음을 맛본 후 대경실색하고 죽어있는 야곱에게 하나님은 은혜를 베푸신다. 아마 야곱은 이때가 되서야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가를 알게 되었을 것이다. 자기의 불순종을 깨닫고 회개의 기회를 찾았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야곱에게“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서 거기 거하며 네가 네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던 때에 네게 나타났던 하나님께 단을 쌓으라”고 명령하셨다. 참 하나님은 자비가 많으신 것인지 배알이 없으신 것인지 나 같았으면 싹 쓸어버리시고 나같이 얌전하고 착한 사람을 택하여 그 자리를 대신 잇게 했을 터인데….

 

삶을 지배하는 세상문화

야곱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다시 체험한다. 우리가 도저히 용서받지 못할 일을 했을 때 하나님으로부터‘죄 없다’하심을 받을 때 우리 가슴에 쌓인 그 모든 죄의 아픔이 녹아져 내린다. 이것이 바로 어쩔 수 없는 인간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이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그의 사람들에게 인내하시며 자비와 긍휼을 베푸신다.

 

야곱은 이에 눈앞에 씌워 있던 콩 꺼풀을 벗어버리고 온전한 마음으로 되돌아가 자기 식솔들에게 갈 길을 지시한다.“너희 중에 이방 신상을 버리고 자신을 정결케 하고 의복을 바꾸라” 사실 이들은 모두 이방에서 얻은 아들들과 노비들이다.

 

본래 야곱의 아내들도 이방인들이었다. 따라서 아직 하나님을 경험해 보지 못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모르는 그들이 이방의 신들의 문화와 생활 습관에 빠져있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오죽하면 야곱이 제일 사랑하던 아내 라헬까지도 자기 아버지 라반의 신 드라빔을 훔쳐 왔었겠는가? 이처럼 이방인으로 살아온 그들에게 하나님의 이름을 가르쳐야 하는 것이 야곱의 임무인 것이다.

 

이제 하나님의 명령을 받은 야곱은 벧엘에 오르기 전에 자기의 식솔들에게“우리가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 나의 환란 날에 내게 응답하시며 나의 가는 길에서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께 내가 거기서 단을 쌓으려 한다”라고 자신의 의지를 전하고 그 전에 먼저 사람들에게 이방 신상들을 제하고 자신들을 스스로 정결케 할 것을 가르친다.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이 세상 사람들과 다른 점이다.

 

우리도 세상에서 지탄받을 짓들을 행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버리시지 아니하시고 다시 그의 은혜 가운데로 부르시고 하나님 앞으로 나오도록 권면하시는 것이다.

 

육체의 무덤과 영혼의 무덤

이제 야곱은 그들의 의식을 바꾸기 위하여 그들의 생활 속에 자리잡고 있던 모든 우상들과 습관들을 제하기에 이른다. 야곱의 지시를 받은 그의 식솔들은 자기들의 손에 있었던 이방신상과 귀걸이들을 야곱에게 주었다. 아마 이것은 그들이 바란에서부터 나올 때 가지고 온 것들과 또 하몰의 집에서 약탈했던 수호신과 같은 장신구였을 것이다.

 

야곱은 그것을 세겜 근처의 상수리나무 아래 묻고 벧엘을 향하여 출발하였다. 이렇게 야곱이 하나님 앞에 순종하자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친히 다스리셔서 그 사면의 고을들이 야곱을 두려워하게 하셔서 그들을 추적하지 못하게 하셨다.

 

이에 야곱은 가나안 사람들이 사는 땅 루스, 곧 하나님과 만났던 벧엘에 이르러 그곳에서 하나님께 단을 쌓고 엘 벧엘이라고 불렀다. 엘 벧엘이란 ‘하나님의 집’이란 의미이다. 이곳은 예루살렘에서 북쪽으로 19km 지점에 있는 곳으로 과거 아브라함이 처음 하나님과 만났던 곳이다.

 

본문 속에 갑자기 리브가의 유모 드보라가 죽은 사건이 등장하는데 리브가의 유모 드보라는 아마 야곱이 바란에서 나올 때 함께 따라 나왔을 것이다. 그녀를 벧엘 아래 상수리나무에 묻고 그 이름을 알론바굿이라고 불렀는데 이는‘통곡의 나무’라는 의미이다.

 

이 두 사건 즉 이스라엘이 벧엘에 오르기 전 세겜 땅에 묻은 이방신 사건과 하나님의 언약의 땅 벧엘에 묻은 리브가의 유모 드보라의 사건은 우리에게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이처럼 우리는 하나님의 집에 오르기 전에 우리의 육체와 함께 세상의 것을 모두 묻어버려야 하며 하나님의 은혜로 다시 살아난 우리의 영혼은 하나님의 집 벧엘에 묻어야 하는 것이다.

 

새로 거듭난 인생!

야곱이 벧엘에 이르러 하나님께 단을 쌓자 그를 부르신 하나님께서 다시 나타나셔서“네 이름이 야곱이다만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르지 않겠고 이스라엘이 네 이름이 되리라”고 하시고 그를 이스라엘이라 부르셨다.

 

사실 이 이름은 얍복강 나루에서 천사와 겨루고 이길 때 주어진 이름이었지만 그때까지 야곱은 그 이름의 사람이 되어 있지 못했다. 우리는 요한복음 20장에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그의 제자들에게 숨을 불어넣으시며“성령을 받으라”고 하신 말씀을 기억한다.

 

그러나 그들에게서 아직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지는 않았다. 그들에게서 성령의 능력이 나타난 것은 오순절 날 예루살렘 성전에서 성령의 강림하심과 함께 이루어졌다. 이와같이 야곱에게도 이스라엘이란 이름은 미리 주어졌지만 그 이름의 성취는 야곱이 모든 죄악을 묻어버리고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의 집 벧엘에 올라왔을 때 이루어진 것이다.

 

이제 새 사람이 된 이스라엘에게 하나님께서는“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니라 생육하고 번성하라 국민과 국민이 네게서 많이 나고 왕들이 네 허리에서 나오리라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준 땅을 네게 주고 네가 네 후손에게도 그 땅을 주리라”고 말씀하시고 그곳에서 하늘로 오르셨다.

 

이제 그는 더 이상 육체의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제 이스라엘은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을 하나님께 인도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믿음의 사람이 된 것이다. 여기서“전능한 하나님”이란 말은“엘 샤다이”로써 어린 아이를 키우는“능력의 젖무덤”이란 뜻이다.

 

, 우리의 생명을 보존하시는 하나님이라는 의미이다. 이로써 야곱은 육체의 사람의 이름을 벗고 이스라엘이라는 위대한 이름으로 불리게 된다. 비로소 그는 모든 시험을 마치고 믿음의 조상의 반열에 오른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오래 참으심으로 자기가 택한 사람이 온전한 사람이 될 때까지 은혜의 길로 인도하시는 것이다.

 

끊이지 않는 죄의 고통들

그러나 이 땅에서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믿음의 여정은 메시야가 오시기까지 계속 진행된다. 그 믿음의 성취를 위하여 종으로 부름받은 이스라엘은 벧엘에서부터 언약의 땅 헤브론에 이르기까지 또 다른 인생의 고통을 경험하게 된다.

 

그 아픔들 중 하나가 사랑하는 처 라헬의 죽음이다. 헤브론을 향한 여행 중 에브랏, 곧 베들레헴에서 사랑하는 처 라헬이 요셉의 동생 베냐민을 해산하다가 난산을 한다. 그녀는 아들을 낳고 혼이 따나기 전 아들의 이름을‘베노니’라고 하였는데, 그 의미는‘슬픔의 아들’이라는 뜻인데 이스라엘은 그를‘베냐민’이라 칭하였다. 지금도 유대인들은 베들레헴에 있는 라헬의 묘비에서 기도를 한다.

 

또 다른 이스라엘의 인생의 고통은 에델 망대에 거하는 동안 장남 르우벤이 자신의 첩 빌하와 통간을 한 사건이다. 이 때의 르우벤의 나이는 30세 정도였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이때도 디나의 사건 때와 같이 침묵한다.

 

성경은 그 이유를 말하고 있지는 않지만 이스라엘의 나약한 심성이라기 보다는 20년 동안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깨달은 인생의 고뇌에 대한 인내였을 것이다. 그만큼 이스라엘은 육체의 죄를 판단하지 않음으로 하나님 앞에 범죄하지 않으려는 사려 깊은 사람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 사건에 대하여도 그의 임종 직전에 예언하여 장자 르우벤에게 장자권을 잇지 못하도록 한다.(창 49장)

 

이제 이스라엘과 그의 열두 아들들은 아브라함의 영적 후계자이자 자기의 아버지 이삭이 사는 헤브론에 이르게 되는데 이삭은 이미 180세가 되어서 아들 이스라엘을 만나자 곧 세상을 떠나고 만다.

 

이처럼 하나님의 사람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주신 안식의 땅 헤브론에 이르기까지 사랑하는 처와의 사별, 패역한 자식의 행음, 그리고 의인 아버지 이삭의 죽음을 통하여 인생이 스스로 풀지 못하는 인생의 죄로 인한 많은 고통들을 겪는다. 이것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기까지 이어지는 이 땅의 모든 인간이 겪어야 할 죄의 멍에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