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강해/창세기 강해

(창세기 33장) 하나님에게 이기고 사단에게 졌다?!

이요나 2007. 2. 15. 13:18

(창세기 33장) 하나님에게 이기고 사단에게 졌다?!

 

(창33:12-20) 에서가 가로되 우리가 떠나가자 내가 너의 앞잡이가 되리라 야곱이 그에게 이르되 내 주도 아시거니와 자식들은 유약하고 내게 있는 양떼와 소가 새끼를 데렸은즉 하루만 과히 몰면 모든 떼가 죽으리니 청컨대 내 주는 종보다 앞서 가소서 나는 앞에 가는 짐승과 자식의 행보대로 천천히 인도하여 세일로 가서 내 주께 나아가리이다 에서가 가로되 내가 내 종자 수인을 네게 머물리라 야곱이 가로되 어찌하여 그리하리이까 나로 내 주께 은혜를 얻게 하소서 하매 이 날에 에서는 세일로 회정하고 야곱은 숙곳에 이르러 자기를 위하여 집을 짓고 짐승을 위하여 우릿간을 지은 고로 그 땅 이름을 숙곳이라 부르더라 야곱이 밧단아람에서부터 평안히 가나안 땅 세겜 성에 이르러 성 앞에 그 장막을 치고 그 장막 친 밭을 세겜의 아비 하몰의 아들들의 손에서 은 일백 개로 사고 거기 단을 쌓고 그 이름을 엘엘로헤이스라엘이라 하였더라

 

에서와의 상봉

야곱은 하나님의 천사를 만난 후 마음 속에 잃었던 평안을 다시 되찾은 모양이다. 비록 엉치뼈를 얻어맞고 절뚝발이가 되었지만 그는 겸손이 지나쳐서 머리 꼬리 몽땅 내린 채 고양이 앞에 쥐 꼴이 되어 에서를 맞는다. 그러나 에서 앞으로 향하는 자기 가족들을 배열하는 순서를 보면 이름이 바뀌었다 해도 아직 그는 야곱이다.

 

앞에 세우나 뒤에 세우나 오십보 백보인 것인데 인간의 마음이란 사랑이 가는 쪽이 따로 있는가 보다. 그는 맨 앞에 여종이었다가 첩이 된 두 여인과 그 아들들을 세우고 그 뒤에 레아와 그 아들들을 세우고 맨 뒤에 라헬과 요셉을 배치한다.

 

그리고 야곱은 담대히 그들의 선두로 나아가 일곱 번 허리를 굽혀 에서를 맞는다. 여기서‘일곱 번 굽힌다’는 것은 그 당시 왕 앞에 나아갈 때 행하던 것으로 절대 복종과 예속을 의미하는 것이다. 따라서 야곱이 7번 절을 하며 에서에게 나아갔다는 것은 그에게 완전 굴복한다는 의미이다.

 

야곱의 이러한 노력이 효험이 있었던지 에서는 20년 만에 만난 아우를 부둥켜안고 입맞추고 눈물로 혈육의 회포를 푼다. 이유야 어찌되었든 그들은 쌍둥이로서 한 뱃속에서부터 살을 맞대고 자라왔던 혈육지간이었던 것이다.

 

야곱의 처세술

형제간의 20년의 회포가 끝나자 가족 소개로 이어진다. 줄줄이 알사탕처럼 거느린 여인들과 아이들을 보자 에서는 그들이 누구인가를 묻는다. 여기서 야곱은“하나님이 주의 종에게 주신 자식이니이다”라고 말하며 그들을 불러 절을 하게 한다.

 

여기서 에서를 대하는 야곱의 태도가 자못 흥미롭다. 이것이 야곱의 본심이었는지 아니면 눈 가리고 아옹하는 속셈이었는지 모르겠으나 하나님이 선택한 믿음의 상속자치고는 치사하고 비굴한 생각까지 든다.

 

가족 소개가 끝나자 에서는 자기 앞에 야곱이 보낸 가축 떼에 대하여 묻는다. 에서의 물음에 대한 야곱의 대답이 더욱 가관이다“내 주께 은혜를 입으려 함이라”‘은혜’라는 말은 바란에서 자신에게 나타나신 하나님께서 야곱을 고향에 돌려보내고자 할 때 하셨던 말씀이다.

 

야곱은 얍복강 나루에서 두려움에 떨며 하나님께 간구하기를“여호와여 주께서 전에 내게 명하시기를 네 고향 네 족속에게로 돌아가라 내가 네게 은혜를 베풀리라 하셨나이다”(창 32:9)라고 하며 하나님께 매달렸었다. 따라서 야곱의 지금까지의 여정은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이루어졌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 야곱은 에서 앞에 허리를 조아리고“내 주께 은혜를 입으려 함이라”고 애걸하고 있다. 이처럼 인간이란 눈앞에 있는 문제에 급급하며 살아가게 되어 있는가 보다. 이것을 보는 여러분께서는‘에이구 한심한 사람같으니라구’할는지 모르겠으나 이것은 나의 모습이요, 당신의 모습이다.

 

본디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호칭은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 속에서 주어진 것이지 인간이 스스로 오를 수 없는 자리이다. 왜냐하면 이 땅에는“의인이 없나니 하나도 없으니…”라고 성경에 기록하셨기 때문이다.

 

세상을 대하는 자세

여기에 등장하는 에서의 모습은 정말로 세상 여자들이 홀딱 반할만한 늠름한 기상이다. 남자라면 저 정도는 되어야지 야곱처럼 째째해서야 내가 설혹 딸이 있다면 아무리 야곱의 장래가 유망하다 해도 나는 에서를 사위로 삼았을 것이다. 예수님께서도 세상의 아들들이 빛의 자녀들보다 지혜롭다고 하셨다. 그러나 하나님의 눈은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는 눈과 다르다. 우리는 외적으로 나타난 그 모습을 보고 판단한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택하시고 부르신 그의 전지하심을 바탕으로 판단하신다. 우리는 부분적으로 보고 말할 수 있으나 그분은 전후 좌우 모든 것을 아시며 또한 그의 주권으로 이끌어 가신다. 이쯤 되면 아무리 포악한 성격의 에서라 해도 선한 양이 될 수밖에 없다.

 

사실 이것이 야곱이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가르치는 세상 속에서의 믿는 자들의 삶의 태도이다. 바울도 그의 서신서에서 이를 동의한다. 바울은“세상의 권세자에게 복종하라”(롬 13:1)고 하였고 종들에게는“상전에게 성심을 다하여 충성하라”(엡 6:5)고 가르친다.

 

사실 최근 그리스도인들이 세상 가운데서 지천구를 당하는 것은 너무 콧구멍을 드는데 있다. 하나님께서는 한국 교회를 사랑하셔서 세상에 그 위상을 떨치게 하셨다. 그 결과 한국 교회는 그 코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올라가 폐위된 왕후 와스디처럼 기세가 당당해졌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께서는 한국 교회가 야곱의 겸손한 모습으로 돌아 올 때까지 낮추시는 손을 거두지 않으실 것이다. 높은 자는 낮추시고 낮은 자는 높이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깨달을 때까지 말이다.

 

하나님의 자급자족하심

이러한 야곱의 태도에 에서는“내 동생아 내게 있는 것이 족하니 네 소유는 네게 두라”고 말한다. 그러나 야곱은 계속“그렇지 아니하니이다 형님께 은혜를 얻었사오면 청컨대 내 손에서 이 예물을 받으소서 내가 형님의 얼굴을 뵈온 즉 하나님의 얼굴을 본 것 같사오며 형님도 나를 기뻐하심이니이다 하나님이 내게 은혜를 베푸셨고 나의 소유도 족하오니 청컨대 내가 형님께 드리는 예물을 받으소서”라고 거듭 거듭 강권한다.

 

여기서 우리는 에서와 야곱 두 형제의 대화에서 흥미로운 말을 발견하게 되는데, 에서는 야곱의 선의에 내게 있는 것이‘족하다’고 하였고 야곱도 나의 소유도‘족하다’고 대답하였다. 그러나 두 사람이 말한‘족하다’라는 말의 의미는 아주 다른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에서의‘족하다’는 히브리어로“라브”로써“내 소유가 많다”라는 뜻으로 재물의 소유를 의미한 것이고, 야곱이 사용한‘족하다’라는 말은 히브리어로“콜”이라는 단어로서“모든 것을 갖고 있다”라는 뜻으로 야곱은 하나님이 자신의 공급자가 되심을 말한 것이다.

 

또한 여기서도 야곱은 그를 가리켜“내가 형님을 뵈온즉 하나님의 얼굴을 본 것 같사오며”라고 말한다. 어떻게 보면 성급하고 고루하신 한국 교회의 목사님들은 이러한 야곱을 벌주기 위해 몽둥이를 들고 나갈 판이다.

 

감히 육신의 사람 에서를 하나님에게다 비교하고 있다니 어물전 망신은 꼴뚜기가 시키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우리가 좀더 차분히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야곱이 말로 하나님을 에서에게 비교한다고 해서 에서가 하나님 같아지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에서라는 사람은 이미 태어남으로부터‘내가 야곱은 사랑하였고 에서는 미워하였다’라고 성경에 기록된 사람이 아닌가?

 

말도 안돼

인간의 말에 의하여 하나님이 변할 수 있는 것이라면 그는 더 이상 하나님일 수가 없다. 최근 어느 신문 광고에서“그렇다고 생각하면 진짜 그렇게 된다”라는 책 광고를 보았다. 이 책은 삭티 거웨인이란 사람이 쓴 책인데 만약 이 책의 내용이 제목과 같다고 한다면 이 책은 흔히 말하는 인간 심리학을 바탕으로 쓴 내용이 틀림없을 것이다. 미국에서 시작한 크리스천 사이언스라는 종파는 실제로 그렇게 가르치고 있다.

 

오늘날 오순절계통의 일부 한국 교회에서도 그렇게 가르치고 있는 교회들이 있다. 마음 먹은대로 된다는 것이다. 한 술 더 떠서 마음 먹은대로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밀고 나아가면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 여기에 한나의 기도를 들먹이기도 하고 베드로가 바다 위를 걸었던 장면을 제시하기도 하고, 야곱의 얍복 강 씨름 장면도 제시한다. 과거 나 또한 그러한 가르침에 미혹되어 무지몽매한 기도를 드린 일이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그렇지 않다. 하나님께 응답받는 기도는 무조건 쏘아대기만 하면 하나라도 맞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만약 그들의 말대로라면 하나님의 전지하심도 거짓말이 되고 그의 자결권과 불변하심에도 문제가 있다고 하겠다. 이러한 발상들은 하나님을 우리 인간의 위치에 놓고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 식으로 기준을 삼기 때문에 비롯된 것이다.

 

! 평안하다!

이제 엄청난 선물을 받은 에서는 자기의 동생 야곱과 그의 식솔들을 자기 집으로 이끌어 가려고 한다. 이제부터 야곱의 길잡이가 되어 주겠다고 한 것이다. 그러나 야곱은 자식들이 아직 유약하고 오랜 여행길에 가축 떼도 기진하였으므로 짐승과 자식의 행보를 따라 천천히 세일로 가겠다고 극구 만류한다. 세일은 세일산이 있는 곳으로 에서가 주거하고 있는 곳이다.

 

이에 에서는 야곱의 일행을 수종할 하인들을 남기려 하였으나 야곱은 한사코 사양한다. 그리하여 에서는 먼저 세일로 돌아가고 야곱은 숙곳에 머물러 집과 축사를 짓는다. 숙곳은 요단강을 건너기 전에 위치한 요단강 유역으로 가축을 치기 좋은 기름진 곳이었다. 그러나 이곳은 아브라함에게 주시기로 한 가나안 땅에는 미치지 못한 곳이었다.

 

 후일 야곱의 후손들이 애굽에서 나와 여호수아에게 인도되어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땅에 들어가고자 할 때도 르우벤과 므낫세 반지파가 요단강을 건너 하나님의 땅에 들어가기를 거절하고 요단강 유역에 남았었다. 그로 인하여 그들은 후일 외방의 적들로부터 엄청난 환란을 당하게 되는데 오늘 야곱 또한 이 숙곳에 기거함으로 엄청난 환란을 자초하게 된다.

 

사단의 시험

그러면 야곱은 왜 이처럼 하나님이 지시한 가나안 땅, 그리고 자기가 서원했던 벧엘로 가지 않고 이곳에 머무르고 있는 것일까? 이 부분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커다란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믿는 자에게의 가장 큰 위기는 환란과 고통 중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문제가 해결되고 평안할 때 온다. 최고의 승리의 정점에 올라 방심의 술에 취하여 있을 때 사단은 최후의 비수를 들이대는 것이다.

 

베드로의 가장 큰 위험도 성전 문 앞에 앉은뱅이를 일으켜 세웠을 때였다. 우쭐하기 쉬운 베드로는 많은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될 때 교만해 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바울도 마찬가지였다. 루스드라에서 앉은뱅이를 일으키자 그 지역 사람들은 바울과 바나바를 신으로 섬기려 하였었다. 오늘날도 많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사단의 마지막 시험에서 넘어지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40일간 사단에게 받은 시험의 의미를 머리에 이고 살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