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강해/창세기 강해

(창세기 34장) 네가 세상을 얼마나 아느냐?

이요나 2007. 2. 15. 13:15

(창세기 34장) 네가 세상을 얼마나 아느냐?

 

(창34:30-31) 야곱이 시므온과 레위에게 이르되 너희가 내게 화를 끼쳐 나로 이 땅 사람 곧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에게 냄새를 내게 하였도다 나는 수가 적은즉 그들이 모여 나를 치고 나를 죽이리니 그리하면 나와 내 집이 멸망하리라 그들이 가로되 그가 우리 누이를 창녀같이 대우함이 가하니이까

 

승리뒤에 도사린 함정

야곱이 기거한 세겜은 그리심 산과 에발 산 앞에 위치하고 있는 곳이다. 성경의 기록으로 보아 이곳에서 얼마나 기거했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야곱이 에서를 만났을 때는 장남 르우벤이 12살 정도였을 것이고 본문에서 일어나는 사건의 정황으로 보아 그들은 이미 성인이 되었을 것으로 추측해볼 때 거의 10여 년의 세월이 흘렀을 것으로 보인다.

 

야곱은 이곳 대 지주인 하몰에게서 밭을 사고 우물을 팠다. 바로 이 우물이 요한복음 4장에 나오는 사마리아의 수가성의 우물인 것이다. 야곱이 하나님의 약속의 땅으로 돌아가려면 아직도 남쪽으로 130km를 더 내려가야 브엘세바나 헤브론에 이른다.

 

그런데 야곱은 이곳에서 여장을 풀고 주거지를 정해 버렸던 것이다. 이것은 야곱의 순종이 완전한 순종이 아님을 말해 주고 있다. 아마 야곱은 하나님의 명령대로 자기 고향이 있는 곳에 왔고 자신의 문제가 다 해결된 것으로 보아 이제는 자기의 방법대로 자식들과 함께 아름다운 삶을 살면 되지 않을까 생각하였는지도 모른다. 이제 더 이상 자기를 방해할 요소도 없고 하나님의 일이란 영적인 축복이니까 열심히 하나님만 잘 섬기면 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것은 오늘을 살고 있는 모든 그리스도인의 모습이기도 하다. 적당주의, 타협주의, 합리화주의 신앙의 발로가 여기서 시작되었고 이에 대하여 하나님은 야곱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다.

 

환경의 지배

야곱에게는 디나라는 고명딸이 하나 있었다. 그 이름이‘투쟁’‘심판’이라는 뜻인 것으로 보아 디나는 어쩜 심판을 자초할 만한 투쟁적이고 호기심 많은 성격이었는지도 모른다. 새로운 문화를 접한 디나에게는 그 지역의 생활 풍습이 흥미로웠을 것이다. 디나는 이스라엘 사람의 고유의 가부장적 제도권 속에서 세상의 자유에 대하여 동경하였을지도 모른다. 더구나 외동딸로 자라다 보니 오빠들에게 치여 살면서 세상 여자들의 모습을 보지 못하다가 그곳 세겜의 자유 분방한 여인들의 모습을 보니 살 판이 났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여기서 환경을 지배하는 하나님의 섭리를 만나게 된다. 우리가 생활 환경을 잘못 선택함으로서 발생할 수 있는 사건들에 대하여 성경은 말하고 있다. 하나님의 세계는 영적인 세계이다.

 

그러나 우리는 완전한 하나님의 나라가 이르기까지는 이 물질 세계에서 발을 붙이고 살아야 하는데 이 물질 세계는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이 세상 임금인 사단이 다스리고 있다. 우리는 마가복음 5장에서 군대귀신 들린 사람을 만나는데 그 귀신은 예수님에게 그 지역을 떠나지 않게 해달라고 간청한다.

 

이것은 그 환경을 지배하는 악한 영들이 있음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완전한 하나님의 지식에 도달하기까지는 이 세상을 지배하는 악한 영들이 지배하지 않도록 하나님이 원하는 환경을 찾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특히 하나님으로부터 택함을 받은 사람은 사단의 공격 대상임을 명심해야 한다.

 

사단은 영이기 때문에 자기 세상 가운데 발생하는 영적인 문제에 민감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태어나심을 살펴보아도 사단은 예수 그리스도를 추적하기에 안간힘을 썼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그의 수태로부터 성령의 권능 안에서 이루어지게 하셨고 꿈으로 모든 것을 지시하셨다. 마리아는 수태한 날로부터 세례 요한의 어머니 엘리사벳과 함께 지내며 하나님을 찬송하는 태교의 시간을 가졌음도 생각해 보아야 한다.

 

온전해지기 싫은 속성

야곱의 불순종은 하나님과의 수직적 관계성을 잃고 자신의 삶을 자신의 지혜와 의지적 삶을 추구한데 있다. 이제 경험할 만큼 경험했고 클 만큼 컸다고 생각했을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곧 엄청난 문제에 봉착하게 된다.

 

이제 야곱은 바란에서 겪어보지 못했던 또 다른 세상을 경험하게 된다. 라반은 하나님의 뜻을 벗어나긴 하였지만 하나님의 이름을 아는 메시야 계시를 받은 셈의 후손이었다. 그들은 비록 이방 신을 섬기기는 했었지만 하나님의 계시를 알고 있었으며(창 24:60) 하나님의 말씀을 두려워하였다.(창 31:29)

 

따라서 그들은 나름대로 하나님의 범주 안에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가나안 족속들은 함의 넷째 아들 가나안의 후손들로 노아로부터 특별한 예언을 받은 족속이었다. 그들은 원래 셈과 야벳 족속들을 섬기며 살 운명을 받은 족속이었다.(창 9:25)

 

아마 야곱은 20년 동안의 객지 생활에 익숙해져서 아브라함 때부터 자리잡아 온 히브리인의 생활 속으로 들어가는 것에 대하여 이질감 또는 두려움을 가졌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지시한 언약의 땅에 들어가 사는 것보다는 이방인 속에서 빛처럼 살기를 원했을지 모른다.

 

우리가 믿음 생활을 하다 보면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자신의 생각에 치우쳐서 결정을 내릴 때가 있다. 그것은 오랜 믿음의 경륜을 겪으면 겪을수록 나타나는 영적 교만이다. 우리의 믿음 생활의 기준은 성경 말씀이다. 우리는 육체에 거한 자들로 성령의 능력이 아니고는 영적인 세계를 경험할 수도 이겨낼 수도 없음을 잊지 말아야만 한다.

 

세상을 알지 못하는 자녀들

호기심 많은 야곱의 딸 디나는 그 지역 여자들을 보러 갔다가 추장의 아들 하몰의 아들 세겜의 눈에 들어 강간을 당하고 만다. 그러나 세겜은 디나를 마음으로부터 사랑하게 되어 디나의 상처를 위로하고 그녀를 아내로 맞아들이기로 한다. 한편 디나의 강간 소식을 들은 야곱은 이상하리만큼 태연하여 그의 아들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린다.

 

이러한 야곱의 태도는 오랜 연륜을 쌓은 삶의 노련함인지 아니면 두려움에서인지 이해하기 어렵다. 그러나 그의 아들들은 심히 노하여 이러한 일은 이스라엘 가문의 부끄러움으로 생각하고 이를 갈았다. 역시 그들은 혈기가 넘치는 젊은이들이다.

 

한편 하몰은 사랑하는 아들의 소원을 따라“우리가 서로 아들 딸들을 통혼하자”고 야곱에게 디나와의 결혼을 제안한다. 여기에는 장차 메시야가 오실 계보를 말살하려는 영적 배후가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혹시 라합이나 모압 여인 룻을 들어서 이방 여인들도 메시아의 족보에 들지 않았는가 하고 질문할는지 모르지만 그녀들은 이방 여인이지만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여인들로 부르심에 순종한 것이었고, 하몰은 하나님의 섭리 안에 들지 못한 본질적으로 육체의 소욕을 가진 사람이었다.

 

이에 야곱의 아들들은 그들을 멸절할 계획을 세우고 이스라엘의 자손은 하나님의 성민이기 때문에 자기들과 한 족속을 이루기 위해서는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하몰에게 제안하였다. 이것은 아브라함에게 주신 언약이었다.

 

누구든지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은 이스라엘 사람 중에서 끊어지리라는 하나님의 언약이었다. 이 제안은 아주 합법적인 제안일 수 있다. 하나님께서 주신 언약으로 이루어진 계약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의도와는 다른 것이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언약은 아브라함의 식솔이 된 사람은 돈으로 산 사람들이라도 할례를 받아야 아브라함의 복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 하몰은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의 사람이 되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의 욕정과 물질적 욕구를 채우기 위하여 할례를 받으려고 한 것이다.

 

하몰은 자기 족속을 설득하여“이 사람들은 우리와 친목하고 이 땅은 넓어 그들을 용납할 만하니 그들로 여기서 거주하며 매매하게 하고 우리가 그들의 딸들을 아내로 취하고 우리 딸들도 그들에게 주자.

 

그러나 우리 중에 모든 남자가 그들의 할례 받음 같이 할례를 받아야 그 사람들이 우리와 함께 거하여 한 민족 되기를 허락할 것이니라 그러하면 그들의 생축과 재산과 그 모든 짐승이 우리의 소유가 되지 않겠느냐 다만 그 말대로 하자 그리하면 그들이 우리와 함께 거하리라”고 말하였다. 하몰의 말과 같이 그들은 자신들의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할례를 받을 뿐이지 하나님과는 무관한 것이었다.

 

정당하지 못한 목적

예수께서도 천국 잔치에 초대받은 사람들을 비유하실 때에 예복을 입지 않고 참가한 사람들을 밖으로 쫓아내어 그들이 어둠 속에서 이를 갈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이처럼 하나님의 나라는 목적 달성이 목표가 되어서는 안된다. 그 계획이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되어 선하신 하나님의 말씀과 그의 인도하심을 따라 이루어져야 한다.

 

이처럼 야곱의 아들들과 하몰의 족속이 서로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인간적 소욕의 성취를 위한 합의하에 하몰의 족속의 모든 남자들은 할례를 실시한다. 그러나 그들이 할례를 받은 지 3일 째 되는 날 디나의 오라비 시므온과 레위는 부지중에 성을 엄습하여 하몰 족의 모든 남자들을 죽이고 야곱의 다른 아들들과 같이 몰려가서 그들의 재산을 노략하였다.

 

이 사건의 주동자 시므온과 레위는 즉각적으로 범죄에 대한 보응을 받지는 않았지만 후일 야곱은 임종시에 그들을 향하여“시므온과 레위는 형제요 그들의 칼은 잔해하는 기계로다 내 혼아 그들의 모의에 상관하지 말지어다 내 영광아 그들의 집회에 참여하지 말라 그들이 그 분노대로 사람을 죽이고 그 혈기대로 소의 발목의 힘줄을 끊었음이로다 그 노여움이 혹독하니 저주를 받을 것이요 분기가 맹렬하니 저주를 받을 것이라 내가 그들을 야곱 중에서 나누며 이스라엘에서 흩으리로다”(창 49:5-7)라고 예언하였다. 따라서 시므온과 레위는 후일 아무런 축복을 받지 못하였다.

 

이날의 사건으로 야곱은 엄청난 충격에 휩싸여 커다란 두려움에 빠지게 된다. 야곱은 시므온과 레위에게“너희가 내게 화를 끼쳐 나로 이 땅 족속들에게 냄새가 나게 하였도다 나는 수가 적으니 그들이 함께 나를 치고 죽이리로다”라고 자탄하였다. 이처럼 하나님과의 언약의 관계에 있어서 완전한 순종을 하지 못하고 자신의 생각을 합리화하여 불순종하게 될 때 우리는 세상 가운데서 똑같은 환란을 초래하게 된다.

 

이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진노가 아니라 하나님의 미리 아심 속에서 인도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거부해서 오는 환란으로 불순종한 인간이 겪어야 하는 자충수라고 할 수 있다. 이와같이 지금도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따르지 않는 우리의 불순종은 그의 온전하신 지혜와 지식을 발견하지 못하는 고로 세상 가운데서 환란을 면치 못하고 멸망의 길로 스스로 빠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