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강해/창세기 강해

(창세기 32장-2) 해결돼야 할 육체

이요나 2007. 2. 15. 13:22

(창세기 32장-2) 해결돼야 할 육체

 

(창32:25-28) 그 사람이 자기가 야곱을 이기지 못함을 보고 야곱의 환도뼈를 치매 야곱의 환도뼈가 그 사람과 씨름할 때에 위골되었더라 그 사람이 가로되 날이 새려 하니 나로 가게 하라 야곱이 가로되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 그 사람이 그에게 이르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그가 가로되 야곱이니이다 그 사람이 가로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사람으로 더불어 겨루어 이기었음이니라

 

야곱의 시나리오

우리는 야곱은 왜 모든 가축과 하인들과 처자를 먼저 보내고 홀로 밤을 지새야 했는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어쩌면 에서를 만나기 위한 야곱의 시나리오는 완벽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되돌아갈 길조차 막힌 막다른 골목에서 혈육이자 동시에 원수가 된 형 에서를 만나야 하는 이 순간은 죽음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공포의 순간이다.

 

무엇이 이처럼 야곱을 두렵게 한 것일까? 그것은 다름 아닌 자기 스스로 하늘의 비밀을 성취하기 위해 저지른 범죄의 대가가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생각해 보아야 하는 것은 야곱이 장자의 명분을 교묘한 방법으로 빼앗았다고 해도 아직 현실 속에서 에서에게 크게 달라진 것은 없었다.

 

에서는 아버지 이삭과 함께 살고 있었고, 야곱은 타국에서 20년을 살아야 했다. 그러나 에서를 피해 야곱이 20년 동안 지탱할 수 있었던 힘은 벧엘에서의 하나님과의 언약이었다. 비록 그 생활이 고통스러웠지만 그는 삶 가운데서 인생을 터득하면서 그 속에서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였다.

 

그리고 때가 되자 언약의 하나님께서 자기와의 언약을 위하여 나타나셨던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야곱의 앞길에 발생된 모든 장애물들을 정리해 주셨고 하나님의 군대‘마하나임’을 보내어 야곱의 마음에 평안을 심어 주며 귀향 길을 축복하셨던 것이다.

 

인생의 외나무다리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아버지의 집으로 향하여야 하는 야곱에게는 넘지 않으면 안될 커다란 산이 기다리고 있었다. 야곱은 자신의 모든 지혜를 총동원하여 도망갈 궁리를 하였으나 결국 방법을 얻지 못하고 언약의 하나님께 무릎을 꿇고 지혜를 구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으로부터 즉각적인 해답을 얻지 못한 야곱은 마지막 순간의 인내를 이루지 못하고 벼랑 끝으로 자기의 길을 재촉한다. 결국 자기의 지혜로 하인과 가축을 세 떼로 나누고 그 뒤에 자기의 처자를 딸려보내어 선물로 그의 형 에서의 마음을 돌리고자 하였다. 이것이 야곱이 선택한 방법이고 문제 앞에 선 우리들이 선택하는 방법이다. 그러나 아직 그의 마음은 천길 만길 낭떠러지 끝에 선 기분이었다.

 

그는 처자를 마지막으로 떠나보내고 얍복강 나루에 앉아서 불안한 밤을 서성거려야 했다. 그러면 야곱은 그곳에 앉아서 무엇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일까? 그는 정말로 자기의 처자들의 생명을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만 살겠다고 도망갈 궁리를 하고 있었던 것일까? 우리는 앞에서의 야곱의 성품을 미루어볼 때 자기의 처자와 재물들을 쉽게 포기할 사람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자기 앞에 먼저 떠나보낸 그 가축들과 하인 그리고 처자들은 자기 인생 20년 간의 삶의 결정체였으며, 자기의 살아있는 증거의 열매였다. 따라서 야곱이 그들을 앞서 떠나보내고 홀로 남은 것은 자기 목숨을 얻기 위한 궁리를 찾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이 고통의 늪에서 자기의 생명을 지켜줄 여호와 하나님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야곱은 자기의 방법과 하나님의 보증으로 앞뒤에 배수진을 치고자 했던 것이다. 이 얼마나 완벽한 인간 야곱의 아이템인가?

 

분노의 화살

그는 이미 네 출생지로 돌아가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은 상태이다.(창 31:13) 그리고 그 후의 모든 길에서 하나님의 손길을 체험하였다. 그런데 마지막 통과하여야 할 관문에 이르러서는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간절히 간구하였건만 하나님으로부터 아무런 응답은 없고 도리어 죽음의 사자가 달려오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면 왜 하나님께서 이처럼 긴급한 시간에 야곱의 응답에 답하지 않은 것일까? 그리고 하나님의 사람은 왜 야곱을 지나쳐 그 길을 가려고 했던 것일까? 또한 야곱은 왜 그 사자를 가로막아야 했었는가?

 

이 연속된 질문 속에 중대한 메시지가 들어있다. 20년 간 라반의 집에서의 인생 행로는 하나님의 계획을 성취해 나가기 위한 야곱을 섭리하신 하나님의 경륜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지금 야곱이 풀어야 할 문제는 자신이 만들어 놓은 숙제였던 것이다.

 

즉 업보(業報)인 것이다. 죄의 값이기도 하다. 자신의 앞날을 준비하는 삶을 사는데 20년의 시간을 인내할 수 있었던 야곱이라도 과거 자신이 저지른 과오를 청산하는 데는 단 하루도 참지 못하고 있었다. 지나간 20년 동안 쌓여진 분노의 화살이 한꺼번에 달려오는 이 순간을 모면할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인간의 모순

이것이 인간의 모순이다. 자기가 저지른 죄악일지라도 그 죄의 대가를 지불할 방법이 자기 자신에게는 없었던 것이다. 이에 야곱은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한 채 다가오는 환란 속에서 자신의 죄의 문제를 자신의 힘으로 해결하려 하는 과오를 범하고 만다.

 

급하게 몰아 닥치는 생명의 위협으로부터 현실을 이겨낼 방법을 찾지 못한 야곱은 하나님의 응답을 기다릴 여유를 찾지 못한 채 결국은 육신의 사람 에서와 타협을 하는데 이르고 만다. 성경은“너희가 육으로 살면 죽을 것이요 영으로 살면 살 것이라”(롬 8:13)고 가르치고 있다.

야곱은 이 땅의 믿음의 사람들의 조상이 되어야 하는 하나님의 기업을 이어갈 영적인 축복을 받은 자였다.

 

그런데 그 영적인 축복을 성취하기 위하여 달려가는 그의 발걸음을 가로막고 있는 죽음의 사자가 있었는데 그것은 아직 해결하지 못한 육체의 죄악이었던 것이다. 지금 야곱은 그 마지막 기로에 서서 그 죄를 해결하기 위하여 그는 육신의 사람 에서와 타협을 하려 하고 있는 것이다. 주께서는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고 말씀하셨다.

 

이미 야곱의 주인은 여호와 하나님이시다. 그런데 지금 야곱은 자신의 생명을 얻기 위하여 육신의 사람 에서를 주인으로 맞고 허리를 굽힌 것이었다. 그와 화해하기 위하여 20년의 삶의 열매를 송두리째 바치고자 한 것이다.

 

우리들도 종종 그렇게 행동하지 않는가? 믿음 생활을 잘 하다가도 갑자기 환란이 몰아치면 그 문제의 영적인 배후를 생각지 못하고 육신의 방법으로 해결하려 하지 않는가? 그러면 우리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어떠한 의미가 있는 것일까? 그러나 야곱은 자신의 방법을 선택하여 화살을 당겨놓고도 달려가는 시위를 붙잡고 자기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꼭 오실 것만 같은 언약의 하나님 여호와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꺾어야 할 아집

야곱은 결국 어느 한 사람을 만나 밤을 새워 씨름을 하게 되는데 그 사람은 야곱을 이기지 못하여 야곱의 골반 뼈를 쳤다고 말하고 있다. 문맥을 따라 생각할 때 그 사람은 야곱을 지나가려 했고 야곱은 그에게 축복을 요구하였다. 결국 하나님의 사람은 거기서 야곱의 문제를 해결하여 주는데 그 방법은 다름 아닌 이름을 바꾸어 주는 것이었다.

 

야곱이란 이름은 그의 태어남으로부터 그의 천성적 성품을 따라 지은 이름이었다. 그는 하나님께서 섭리하신 20년의 세월을 살아오면서 성실한 인생의 삶을 터득하였지만 그는 아직 야곱 즉 쟁탈자일 수밖에 없었다.

 

이것은 태어남으로부터 인간에게 주어진 인간의 본성인 죄의 성품이었다. 그가 아무리 모태로부터 하나님의 사명을 받은 자라 하더라도 그는 죄의 본성을 지닌 인간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의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새사람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하나님의 계획을 성취할 믿음의 사람이라도 그는 역시 육체의 소욕을 가진 인간이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의 이름 아브람을 아브라함으로 바꾸었으며 사래를 사라로 바꾸신 것이다.

 

이삭의 경우는 어떠한가? 그는 구태여 이름을 바꾸어야 할 이유가 없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난 아들로서 그는 모리아 산에서 이미 그의 육신을 제물로 드렸기 때문에 그는 더 이상 육신의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나 야곱은 이 육체의 문제를 해결하기 전에는 하나님의 믿음에 이를 수가 없었던 것이다.

 

자식을 이기는 부모는 없다

하나님께서는 삶과 죽음의 막다른 골목에 선 야곱의 골반 뼈를 치심으로 마지막 육체의 돌파구를 막아 버리셨다. 여기서 우리는 야곱의 사건의 해설자 호세아 선지자의 말을 들어 보자.“야곱은 태에서 그 형 발뒤꿈치를 잡았고 또 장년에 하나님과 힘을 겨루되 천사와 힘을 겨루어 이기고 울며 그에게 간구하였으며 하나님은 벧엘에서 저를 만나셨고 거기서 우리에게 말씀 하셨나니”이 말씀은 유심히 살펴보면‘태에서 그 형 발뒤꿈치를 잡은’이 말은 야곱의 타고난 천성을 말해주고 있다. 그리고‘장년에 하나님과 힘을 겨루되’라는 말은 아주 의미 심장한 말이다.

 

사실 얍복강 나루에서 그와 실제로 씨름을 한 사람은 천사로서 구약에 미리 나타나신 예수 그리스도의 현신이었다. 그런데 호세아는‘야곱은 장년에 하나님과 힘을 겨루되’라는 말을 삽입하였는데 이 말씀은 야곱이 형 에서의 장자권을 탈취하여 인위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려 했던 사건을 포함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야곱은 이제 또다시 얍복강 나루에서 하나님의 천사와 힘을 겨루어 이기고 울며 그에게 간구하였던 것이다.

 

싸움에서는 이기고 울고 간구하였다는 것은 자신의 목적을 위한 투쟁이었음을 나타낸다. 즉 자기를 제치고는 아무도 지나갈 수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천국은 침노하는 자에게 빼앗긴다는 말씀과 일맥 상통한다고 할 수 있겠다. 이와같이 우리도 하나님의 축복을 받기 위하여 하나님 앞에 버티어 설만한 담대함이 필요하다.

 

하나님의 집 벧엘로

그러면 야곱은 어떻게 하였기에 하나님의 천사와 싸워서 이길 수 있었겠는가? 이에 대한 대답은 자녀와 씨름을 해본 부모에게서 들어야 할 것이다. 어느 부모가 자식을 이길 수 있을까? 그것은 부모에게 자식을 이길 힘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를 사랑하는 부모의 사랑의 마음 때문에 지는 것이다.

 

하나님과의 언약을 이행할 후계자 야곱은 벧엘에 오르기 전에 거듭난 사람이 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러기 위하여는 그의 타고난 육체로부터의 아집을 끊어 버려야 했다. 야곱은 하나님으로부터 이스라엘이라 칭하는 새로운 사람의 이름을 받았으나 그 이름이 의미하는 이름으로 완전히 거듭나기 위하여는 아직 삶의 고통 속에서 죄에 대한 처절한 고통을 경험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야곱이 비록 하나님과 싸워서 이겼을지라도 죄의 세상을 체험하도록 이끌어 가셨다.(창 34장) 그리고 그가 스스로 그 죄의 고통을 벗어버리고자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하나님의 집에 이르도록 인도하신 것이다.

 

여기서 그는 하나님의 집 벧엘에 올라와 자신의 삶의 환경 속에 스며든 우상의 실체들을 땅에 묻어 버렸다.(창 35장) 그래서 호세아 선지자는“벧엘에서 저를 만나셨고 거기서 우리에게 말하였다”라고 기록한 것이다.

 

오늘 이 말씀을 대하는 우리는 과연 어떠한가? 과연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거듭난 사람으로써 그의 기업을 물려받을 자로 완전히 거듭난 성도인가? 아직도 거듭나지 못한 옛 사람의 모습으로 육체와 타협하며 세상을 살고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해 보아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