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강해/창세기 강해

(창세기 32장-1) 내 인생의 숙제 누가 풀 것인가?

이요나 2007. 2. 15. 13:26

(창세기 32장-1) 내 인생의 숙제 누가 풀 것인가?

 

(창32:3-8) 야곱이 세일 땅 에돔 들에 있는 형 에서에게로 사자들을 자기보다 앞서 보내며 그들에게 부탁하여 가로되 너희는 이같이 내 주 에서에게 고하라 주의 종 야곱이 말하기를 내가 라반에게 붙여서 지금까지 있었사오며 내게 소와 나귀와 양떼와 노비가 있사오므로 사람을 보내어 내 주께 고하고 내 주께 은혜 받기를 원하나이다 하더라 하라 하였더니 사자들이 야곱에게 돌아와 가로되 우리가 주인의 형 에서에게 이른즉 그가 사백 인을 거느리고 주인을 만나려고 오더이다 야곱이 심히 두렵고 답답하여 자기와 함께 한 종자와 양과 소와 약대를 두 떼로 나누고 가로되 에서가 와서 한 떼를 치면 남은 한 떼는 피하리라 하고

 

넘어야 할 산

만약 여러분에게‘믿음’을 한마디로 말하라 하면 무엇이라고 하겠는가? 어떤 분은 평안이라고 하고, 어떤 분은 소망이라고 하고, 또 어떤 분은 사랑이라고 할지도 모른다. 그렇다. 믿음은 사랑과 소망, 그리고 평안이며 기쁨이다. 그러나 나는 믿음을 산(山)이라고 말하고 싶다. 또 바다에 이르는 강이라고 말하겠다. 여러분은 예수를 믿으면서 어떠한 산을 넘어 왔는가? 혹시 강을 건너보았는가? 옛날에 어머니께서 한 숨을 내쉬시면서 내가 시집오면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넘은 산이 몇이며 우리가 건넌 강이 몇인 줄 네가 아느냐 하시며 세월에 부딛겨 우는 젊은 아들의 손을 붙잡아 주신 일이 있었다. 나의 어머니의 인생에 비하면 내가 넘은 산은 산이라고 할 수조차 없다.

 

사실 우리 어머니들은 검정 고무신에 몸배 바지를 입고 고사리 같은 어린 아들 딸들을 업고 안고 생명을 찾아 6.25 전쟁을 건넜으며 해마다 보릿고개가 되면 강냉이와 감자와 개떡을 쪄서 끼니를 때우며 어린 자식들의 배를 채워 왔다. 그 어머니들이 허기진 배를 물로 채우던 그 시절에 대하여 지금의 아이들에게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는지….

 

이미 다 오른 정상

그러나 이 시대의 모든 믿는 자들은 나름대로 산을 넘으며 강을 건너서 한 발짝씩 하나님의 나라를 향하여 걸어가고 있다. 이것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 가운데 주신 믿음의 연단이라고 한다. 때로는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여 좌절하고 소망이 끊겨서 믿음 그 자체까지 의심할 때가 있다. 때로는 막다른 골목에서 만난 예수의 따스한 손길에 눈물을 흘리며 그 암흑의 터널을 통과하는 감격을 맛볼 때도 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믿음의 정상에 이르지 못하여 발을 동동 구르고 있다. 그러나 사실 믿음의 실체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다 이루어 놓은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단번에 믿던 그 순간 나는 이미 그가 이루어 놓으신 정상에 올라있는 것이며 내 영혼은 이미 낙원에 이르러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고 있는 것이다. 주께서는“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고 하셨다. 따라서 우리의 믿음은 우리가 믿는 순간 이미 완성된 것이다. 다만 그 이루어 놓은 것을 향하여 달려가야 할 시간과 공간이 남아 있을 뿐이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죽음으로 해결해야 할 육체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

 

평안의 교향곡

하나님으로부터 언약의 말씀과 비전을 바라본 야곱은 20년이란 세월 동안 세상 가운데서 믿음의 연단을 받아왔다. 과연 그 무엇이 그로 하여금 20년의 세월을 라반의 속임수와 술수를 견디고 참을 수 있게 한 것일까? 머리 싸움과 술수라 하면 그 역시 둘째가라면 서러운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는 주어진 환경에 순응하며 묵묵히 자신에게 성실했었다.

 

그는 벧엘에서 만난 하나님의 언약을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자기의 가는 길에서 함께 하시고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주시며 그를 다시 그의 아비 집으로 인도하시겠다는 하나님과의 언약을 잊지 않았던 것이다. 따라서 그는 묵묵히 그의 언약의 날이 오기까지 자기 앞에 주어진 환경에 적응하며 하나님의 날을 기다렸던 것이다. 그리고 삶 가운데서 약속을 지키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기다려왔던 것이다.

 

이제 야곱은 20년 동안 주어진 인생 공부를 마치고 가벼운 마음으로 아버지의 집을 향하고 있는 것이다. 라반과의 마지막 매듭을 짓고 길을 떠나는 야곱의 행렬 앞에는 하나님의 사자들, 즉 하나님의 군대 마하나임'이 평안의 오케스트라를 연주해주고 있었다.

 

꽉 막힌 터널

그러나 하나님이 주신 평안도 잠시 뿐 야곱에게는 스스로 넘지 않으면 안될 거대한 산이 가로막고 있었다. 이 숙제는 자기 스스로 만든 숙제이기 때문에 자기 스스로 풀지 않으면 안되었다. 사실 지금까지의 인생 공부는 그 삶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섭리함과 인도하심 속에서 인내하면 되었었다. 그러나 이번에 눈앞에 닥쳐오는 문제 덩어리는 20년 전 자신이 저지른 것으로 스스로 넘어야 할 산이요 강이었던 것이다.

 

더군다나 라반과 헤어지면서 서로 그 증거의 돌무더기를 넘지 않기로 약속을 했기 때문에 이제 뒤로 도망갈 수도 없다. 나는 본문 속에서 앞뒤가 꽉 막힌 터널에 끼어서 머리를 싸매는 야곱을 보면서 내 믿음 생활 속에서 겪어야 했던 인생의 숙제를 기억하게 된다.

 

사실 내 이름은‘요나’라는 이름보다 야곱이라는 이름이 더 어울릴 것이다. 지금부터 10년 전 한국을 떠난 지 7년 만에 한국 땅으로 되돌아오지 않으면 안될 입장에 놓인 나의 고민은 아직 처리되지 않았던 내 과거의 죄가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일본 여행길 중에 발생한 클럽에서의 사고는 사업주인 나에게 5년 동안의 기소 유예라는 올무를 걸어 놓았었다. 졸지에 동경 거지가 된 나는 살아남아서 그 세월을 버텨야 했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로 갈보리채플의 사역자로 기름부음을 받던 날 나는 또 하나의 비보를 받았는데 그 기소유예 일자를 5개월 앞둔 5월 26일까지 일본을 떠나라는 출입국의 통보였다.

 

이제 목사가 되었으니 세상말로 불법 체류도 할 수 없고 나가자니 쇠고랑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 진퇴양난의 길목에서 야곱의 고민을 만났던 나는 성경이 가르쳐 준 해답으로 6년 간의 일본 생활을 청산하였다.

 

5월 21일 동경 나리다 공항 로비에 선 나에게 그때까지 느껴보지 못했던 평안이 찾아왔다. 그 평안은“나의 기름 부은 자를 만지지 말며 상하지 말라”는 말씀과 함께 주어졌었다. 그리고 나는 그 평안을 지금까지 가지고 있다.

 

인간의 꾀

이제 야곱은 하나님의 사자들을 통하여 얻은 평안한 마음으로 그의 형 에서에게 화해의 사자를 보내기로 작정을 한다. 그의 사자들을 형 에서에게 보내며“주의 종 야곱이 말하기를 내가 라반에게 붙여서 지금까지 있었사오며 내게 소와 나귀와 양떼와 노비가 있사오므로 사람을 보내어 고하오니 내 주께 은혜 받기를 원하나이다”라고 전달하였다.

 

이것은 내가 지금 아버지의 유산, 즉 내가 속여서 빼앗은 아버지의 장자권을 행사하러 오는 것이 아니라 나도 먹을 만큼 재산과 노비가 있으니 제발 살려주십시오 라고 비는 것이다.

그러나 자기의 사자들로부터 에서가 400인을 거느리고 오고 있음을 전해들은 야곱은 오금을 펴지 못한 채 이성을 잃고 만다. 왜냐하면 400인을 거느리고 온다는 형 에서의 거동이 자기를 환영하러 오는 것이 아니라 원수를 갚으러 오는 폼이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진퇴양난의 기로에 선 야곱의 심경을 성경은“심히 두렵고 답답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그는 안절부절하지 못한 채 자기가 거느린 하인들과 가축 떼를 둘로 나누어 에서가 한 떼를 치는 동안 한 떼는 피하리라 하고 생각하다가 도저히 답안이 나오지 않자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만다.

 

이것이 인간의 모습이다. 하나님의 은혜를 20년을 경험한 야곱이라도 자신이 쌓아둔 업보(業報)를 해결하는 마당에서는 숨이 막히는 것이다. 이처럼 세상에서의 자신의 죄 값은 자신의 손으로 지울 수 없는 업장(業障)인 것이다.

 

그는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엎드려“나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 나의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전에 내게 명하시기를 네 고향, 네 족속에게로 돌아가라 내가 네게 은혜를 베풀리라 하셨나이다 나는 주께서 주의 종에게 베푸신 모든 은총과 모든 진리를 조금이라도 감당할 수 없사오나 내가 내 지팡이만 가지고 이 요단을 건넜더니 지금은 두 떼나 이루었나이다 내가 주께 간구 하오니 내 형의 손에서 에서의 손에서 나를 건져내시옵소서 내가 그를 두려워 하옴은 그가 와서 나와 내 처자들을 칠까 겁냄 이니이다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정녕 네게 은혜를 베풀어 네 씨로 바다의 셀 수 없는 모래와 같이 많게 하리라 하셨나이다”라고 울어버린다. 이 얼마나 절실한 눈물인가? 그에게 의지할 곳이란 오직 하나님밖에 없었던 것이다.

 

말씀좀 해주셔야지요!

그러나 이것도 잠시 뿐 야곱의 다음 행동거지를 좀 보자. 그는 기도가 끝나자마자 발길을 멈추고 밤을 지새며 가축 떼를 세 떼로 나누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떼를 이끌고 갈 하인들에게“너희는 나보다 앞서 건너가서 각 떼로 상거가 뜨게 하라 하고 그가 또 앞선 자에게 부탁하여 가로되 내 형 에서가 너를 만나 묻기를 네가 뉘 사람이며 어디로 가느냐 네 앞에 것은 뉘 것이냐 하거든 대답하기를 주의 종 야곱의 것이요 자기 주 에서에게로 보내는 예물이오며 야곱도 우리 뒤에 있나이다 하라”고 말한다.

 

이것은 복수의 칼을 든 형 에서의 마음을 선물로써 풀어 보려는 속셈에서 나온 것이었다. 실컷 하나님에게 부탁을 해 놓고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어서 숙제 보따리를 다시 싸 짊어지고 제 방법으로 풀려는 심산이다.

 

이것이 지금 우리의 모습이 아닌가? 새벽마다 싸들고 가서 울며 매달리다가 집으로 다시 싸들고 들어와서 궁리해대야 하는 나약한 우리의 모습. 인간의 의지는 왜 이처럼 나약하여 악순환을 거듭하게 하는 것일까? 그것은 우리의 믿음의 실체인 하나님을 눈으로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허공을 믿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야곱은 자신의 고통에 묵묵하신 하나님을 체험하고 있는 것이다. 무엇인가 한마디라도 해주셔야만 할 그 하나님이 입을 열지 않기 때문이다. 이처럼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없을 때 우리는 지옥의 밤을 보낼 수밖에 없다.

 

새로 태어난 사람

결국 야곱은 자기의 계획대로 그 밤에 그 종들과 가축 떼와 아내들과 자녀를 얍복 강을 건너게 하고 자기는 결국 건너지 않은 채 홀로 남아서 그 숙제의 해답을 얻고자 시간을 벌고 있었다. 야곱에게는 과연 20년의 삶 가운데서 신뢰해 온 하나님이 자기를 버리지 않을 것이라는 신념이 있었을까?

 

어쨌든 그는 발길을 늦추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한 사람이 나타나자 야곱은 그를 붙잡고 자기에게 축복하지 않으면 길을 비켜주지 않겠노라고 밤새도록 버티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일은 자기가 다 벌려놓고 나서는 그 일을 해결하기 위해서 온갖 방법을 연구해 놓고도 결국은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고 생떼를 쓰다니 참으로 야곱의 넉살은 알아줄 만하다.

 

야곱은 결국 그 천사로부터“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네가 하나님과 사람으로 더불어 겨루어 이기었음이니라”는 해답을 얻어내고 만다. 나는 그 천사가 예수 그리스도의 현신이라고 확신한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네가 하나님과 사람으로 더불어 겨루어 이겼다”라는 표현이다. 사람과 겨루어 이기는 것은 그렇다 치고“하나님과 겨루어 이겼다”라는 표현은 이해하기가 힘이 든다. 이 장면을 이해하기 위해서 호세아 12장 4절 말씀을 보도록 하자.“야곱은 천사와 힘을 겨루어 이기고 울며 그에게 간구 하였으며 하나님은 벧엘에서 저를 만나셨고 거기서 우리에게 말씀하셨다”호세아 선지자의 해석에 따르면 야곱이 울며 간구하였다고 하였다. 이처럼 우리가 지은 죄 값을 자신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것이다.

 

이미‘나’의 주권은 나를 부르신 분에게로 이양되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사람은 과거의 죄에 묶여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또한 여기서 야곱에게 새로운 이름을 주었다는 것은 육체에서 벗어난 새사람의 모습을 예표한다. 성경은 이에 대하여“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7)라고 기록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