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강해/창세기 강해

(창세기 29장-1) 인생을 변화시키는 사랑의 묘약

이요나 2007. 2. 15. 13:42

(창세기 29장-1) 인생을 변화시키는 사랑의 묘약

 

(29:18-20) 야곱이 라헬을 연애하므로 대답하되 내가 외삼촌의 작은 딸 라헬을 위하여 외삼촌에게 칠 년을 봉사하리이다 라반이 가로되 그를 네게 주는 것이 타인에게 주는 것보다 나으니 나와 함께 있으라 야곱이 라헬을 위하여 칠 년 동안 라반을 봉사하였으나 그를 연애하는 까닭에 칠 년을 수일같이 여겼더라

 

운명은 있는가?

혹시 여러분께서는 운명이라는 것을 생각해 보신 일이 있습니까? 크리스천은 운명 같은 것과 거리가 먼 것 같이 생각하게 되는데 사실 그리스도인들은 절대 운명론자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은 인간의 창조자이며 운명의 주권자의 뜰에 거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어떻게 생각하여야 할까? 창조자와 피조물, 이건 너무 피상적이다.

 

주인과 종, 이것도 그리 적절한 표현은 못된다. 어느 연속극에서 잘 맞는 부부란 잘 맞는 옷과 같고, 내 살 같은 느낌의 사람이라고 표현하는 대사를 들은 일이 있었다. 나는 오늘 야곱의 삶을 이끌어 가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바라보면서 다시 하나님에 대하여 생각해 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나는 내 인생을 볼 수가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인간을 아주 묘하게 창조하셨다. 내 자신이 자신의 얼굴을 볼 수 없듯이 자기 인생의 그림자를 보지 못하게 지으셨다. 나는 가끔 나의 설교 테이프를 들으면서 못난 내 목소리에 놀라서 스위치를 끄게 되는데 그것은 자기의 목소리를 다른 사람 입장에서 객관적으로 듣기 때문이다. 따라서 남이 보기에 못난 얼굴도 거울에 비친 자기의 눈에는 천하일색 양귀비처럼 보이는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왜 인간으로 하여금 자기를 보지 못하게 하셨을까? 아니 왜 자기의 삶의 그림자는 그것이 옳든 그르든 아름답게만 느껴지도록 하게 하셨을까? 악하고 후회스러웠던 기억까지도 아름답게 기억되고 소중히 간직하게 되는 이유는 그 삶 자체가 내게 주신 하나님의 선물이기 때문이다.

 

한 걸음 한 걸음 살아오면서 울고불고 지지고 볶으며 한치 앞을 내다보지 못한 채 살얼음 위를 밟아야 했던 쓰린 기억들도 그리고 포근한 잠자리 속에 영원히 담아두고 흐뭇해했던 순간들도 사실 내 스스로가 만든 것은 하나도 없다. 만약 자기 인생을 자기 스스로 만들 수 있는 것이라면 우리는 똑같은 실수를 거듭하면서 잘못된 인생을 살지는 않았을 것이다.

 

터널속의 인간

나는 가끔 인생은 터널이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흡사 4차선 한 복판에 끼어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차선의 물결을 따라 이어져 나아가야 하는 행렬과도 같다. 그 길을 바꾸려면 그 터널을 일단 빠져나가든가 이어진 길의 다른 연결선까지는 이유 없이 나아가야만 한다. 진행 도중에 역 전환할 수 없는 인생의 원리를 생각할 때 인간은 천장 위에 날렵하게 역 전환하여 달라붙는 파리만도 못한 것이 아닌가 싶어진다. 그렇다고 이 모든 삶의 역경이 물론 창조주의 책임만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 인생의 주인공은 자신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을 예정하실 때 그의 전지하심과 미리 아심과 영원하심과 불변하신 원리 위에 나의 의지를 동참시키셨다. 따라서 우리의 인생이 그의 주권적 섭리 안에 계획되고 이루어진 삶이라 해도 그 삶의 운전자는 나 자신이었던 것이다.

 

차선을 위반하고 주차 위반하고 주행을 위반한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운전자인 나였던 것이다. 최근 젊은 청년들이 자신의 잘못을 하나님에게 전가시키며 왜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나를 비참하게 만들어 가시는 것일까요 라고 항변하는 글들을 많이 대하는데 하나님은 아무도 시험하시지도 시험을 받으시지도 않는다. 그의 택하신 자에 대한 시험은 그를 시험하는 것이 아니라 그를 그의 뜻대로 이끌기 위한 하나님의 경륜인 것이다.

 

비전이란?

야곱은 하늘 사다리에서 친히 내려와 선택한 자의 비전을 재확인시켜 준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후 이제 비전을 향한 삶을 떠난다. 며칠 전 에서로부터 도망을 나올 때와 지금의 환경은 조금도 달라진 것은 없지만 이제 그의 마음은 절망에서 비전으로 역 전환으로 설정되어 있었다. 최근 많은 젊은이들이 비전이라는 말을 많이 한다.

 

요엘 선지자도 주의 시대의 비전을 가리켜“내가 나의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을 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행 2:17)고 하였다. 그러나 이 환상이 어디로부터 왔는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이 환상은 그의 택하심과 부르심 속에서 그의 은혜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주신 그의 삶 속에 내려진 선물이다.

 

또한 이러한 비전은 우리의 머리 속에 그려진 우리의 생각을 따라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미리 말씀하시고 이루신 말씀 안에 설정된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부르심과 택하심을 받은 그의 자녀들이 그의 말씀을 벗어나서 계획된 비전은 있을 수 없으며 그 모든 삶의 성취가 그의 뜻 안에서 예정 가운데 이끌어져 가는 것이다. 그래서 잠언 기자는“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는 자는 여호와니라”(잠 16:9)고 말한 것이다.

 

 

순적한 길

여호와 하나님의 인도하심 가운데 야곱이 당도한 곳은 유브라데 강 건너 동방 메소포타미아 하란 근처에 있는 어느 우물이었다. 야곱의 어머니 리브가가 아브라함의 종 엘리에셀을 만난 곳도 우물이었다.

 

중동에서 우물은 어린아이의 젖줄과도 같은 것이다. 야곱이 멈춘 우물은 샘이 솟아서 고인 우물이 아니라 흐르는 물을 막아서 저장해 두는 우물이었다. 요즘 사람들은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우리가 어려서 살던 시골에 가면 흐르는 시내물을 한쪽에 모아둔 웅덩이 같은 곳이 있었는데 대개 이런 곳에는 돌로 물길을 막아 놓았었다. 아마 이 우물은 마을 사람들이 먹는 우물이 아니라 양들이나 목자들을 위해 흐르는 물을 막아 놓은 우물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그 물을 효과적으로 관리하기 위하여 가축의 떼가 다 모이면 물의 흐름을 막아 놓았던 큰돌을 치워서 가축들이 물을 마시도록 하였던 모양이다. 그 우물 앞에서 목자들을 만난 야곱은 그의 외삼촌 나홀의 손자 라반을 물었다.

 

다행히 하나님의 인도하심은 순적히 목적지에 닿게 하셔서 라반의 목자들을 만나게 하셨는데 이들이 라반의 종들임을 알게된 야곱은 짐승의 떼가 다 모이기를 기다리는 목자들에게 미리 물을 먹이라고 권유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의 관리 목자인 라헬이 오기까지 그럴 수 없다고 하며 그가 지금 이리로 오고 있음을 고하였다.

 

인연과 악연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비전을 성취해나갈 야곱을 자기의 외삼촌 라반의 집에 인도한 것뿐이 아니라 자기의 사랑하는 아내감 라헬까지 순적히 만나게 하셨다. 이처럼 하나님의 뜻 안에서의 진로는 일사천리로 하나님께서 친히 준비하신다. 잠시 후 야곱은 생면부지의 외삼촌의 딸 라헬을 만나 부둥켜안고 입을 맞추며 그 반가움을 이기지 못하고 소리내어 울게 되는데 생면부지의 사람과의 키스는 그 지역 사람들의 기쁨의 표현인 것이다.

 

야곱은 자신이 라반의 외조카로 라헬의 고모되는 리브가의 아들임을 고하자 라헬은 집으로 달려가 자기 아버지 라반에게 이를 알리는데 라반은 여동생 리브가가 떠난 후 이제 장성한 동생의 아들 야곱을 맞아 야곱이 그곳에 온 사연을 듣게 된다.

 

그리고 한 달이 지난 후에야 야곱의 거취에 대하여 의논한다. 아마 실리를 추구하는 성격인 라반은 한 달간 야곱을 지켜보면서 여러 가지로 야곱에 대하여 살펴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의 성실한 태도를 보고 그를 정식으로 그의 집 일군으로 고용할 것을 제안한다.

 

사랑의 묘약

여기서 야곱은 라반의 두 딸 레아와 라헬 중에서 라헬을 사랑하니까 그와의 결혼을 위하여 7년을 봉사하겠다고 말한다. 우리가 여기서부터 배우게 되는 것은 심은 것을 거두어들이는 법칙이다.

 

이러한 법칙은 자연계만 있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세계에도 그대로 적용되고 있음이 여실히 증명된다. 교묘한 방법으로 장자권을 쟁취한 야곱에게 야곱보다도 잔머리가 더 잘 돌아가는 막강한 라반이 나타난 것이다.

 

성경에 이르기를“철은 철로 다스린다”(잠 27:17)고 기록되어 있다. 이 말씀은 지나온 나의 목회 과정 속에도 여실히 증명되었다. 7년 간의 목회 속에서 나는 참으로 힘든 사람들을 만났었다. 나는 그들과 함께 살면서 얼마나 울어야했는지 모른다.

 

왜 내게 그처럼 감당하기 힘든 사람들을 보내주셨는지 하나님이 원망스럽기까지 하였다. 그런데 그들이 떠나고 난 후 변한 나의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께서는 정말로 다듬기 힘든 나의 성격을 다루기 위하여 많은 사람들을 나를 다듬는 도구로 쓰셨음을 알 수 있었다.

 

여기서 우리는 사랑하는 여인을 위하여 7년을 봉사하겠다는 야곱의 투지를 발견하는데 그의 말속에서 사랑을 위하여 기쁨으로 자기를 희생하는 진솔한 야곱의 마음은 에서를 속이던 야비함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어째서 이렇게 되었을까? 이것은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의 변화된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주신 비전 속에서 자기 자신도 모르게 진솔한 인간의 양심이 살아난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사람을 변하게 하고 고통을 인내하며 미래를 소망하게 하는 힘, 즉 인간으로 하여금 아름다움 삶을 만들어가게 하는 원동력은“사랑의 묘약”이었다.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은 과연 무엇 때문에, 그리고 무슨 힘으로 세상을 살아가는가? 그것은 한마디로 “사랑의 힘”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