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강해/창세기 강해

(창세기 30장-1) 사랑이란 유치하고 치사한 것!

이요나 2007. 2. 15. 13:37

(창세기 30장-1) 사랑이란 유치하고 치사한 것!

 

(창30:1-2) 라헬이 자기가 야곱에게 아들을 낳지 못함을 보고 그 형을 투기하여 야곱에게 이르되 나로 자식을 낳게 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죽겠노라 야곱이 라헬에게 노를 발하여 가로되 그대로 성태치 못하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겠느냐

 

영원한 사랑

사랑에는 국경도 없고 형제도 없다. 인생에게서 사랑을 빼버린다면 정말 속 빠진 만두요 향기 없는 꽃이다. 어느 누가 사랑 없는 목적을 두고 삶을 영위할 것인가? 평생을 불상 앞에 무릎을 꿇는 비구니도 부처를 사랑하는 마음이 없으면 죽은 후에 감각치 못할 허공을 위하여 달려가지는 않을 것이다. 내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면서 내게 남기신 쪽지에는‘소망을 잃은 네 앞에 내가 살 소망이 없다’라고 하셨다.

 

이것은 제 살을 먹여서 자식을 키우는 거미의 사랑이다. 이 땅의 생물 중 새끼를 위하여 목숨을 아낄 어미가 어디에 있겠는가? 그러나 이러한 본능도 점점 우리의 기억에서 멀어져가는 세상이 되고 있다. 그러나 인간은 사랑을 위하여 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떤 사역자 후보생이 주의 일을 위해서는 사랑도 희생하여야 한다는 말을 들었다. 나는 이 말에 부정적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사랑의 희생으로 사랑을 성취하시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나는 오히려 인간의 아름다운 사랑의 열매가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인간은 체험을 필요로 하는 육체와 생각을 가진 피조물이다.

 

그래서 인간은 삶의 여정 속에서 사랑을 체험하므로 하나님의 사랑의 깊이와 신비를 체험하게 하셨다. 이를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천지 만물 속에 자신의 신성과 능력을 두심으로 사람으로 하여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을 발견하게 하셨다. 그리고 마지막 날에 사는 우리를 위하여 그의 아들로서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을 .말씀하신 것이다.

 

사랑의 출발점

우리는 태어남으로부터 삶의 여정 속에서 많은 사랑을 경험하며 성장한다. 먼저 부모 형제의 사랑과 이웃들, 그리고 자연 환경과 사회로부터 유형 무형의 사랑을 체험하게 된다. 또한 사춘기에 이르러서는 육체 안에 감추어 둔 사랑의 비밀이 솟아올라서 누구를 사랑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는 황홀 지경으로 이끌려 간다.

 

이것은 생체적 생리일뿐만 아니라 그 생체적 생리와 함께 생성하는 인간의 마음 맨 밑바닥에 존재하는 감성이다. 이 본능적 감성은 그 어떤 것으로도 억제할 수 없으며 그것이 거절당할 때 인간은 커다란 상처를 받게 된다. 물론 사람들에 따라서 그 차이는 있겠지만 이러한 현상은 모든 인간에게 주어진 공통분모이다.

 

또한 이러한 사랑의 표현이 어떠한 결과를 이루느냐에 따라 행복과 불행이 결정되는 것인데 이러한 사랑의 출발이 탄생의 조건으로부터 태동된다고 생각할 때 우리는 그 사랑의 시작이 어떠하여야 할 것인지 깊이 깨달아야만 한다.

 

이 땅의 모든 인간 중 부모의 모태를 통하지 않고 탄생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마리아의 태를 통하여 탄생하셨다. 그러므로 인간으로 태어남에 있어서 가장 먼저 체험하는 사랑은 부모의 사랑이다. 물론“내가 야곱은 사랑하였고 에서는 미워하였다”라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으로 미루어 보아 인간의 사랑의 근본은 창조자이신 하나님으로부터 태동된 것이지만 이것은 인간으로 감지하지 못하는 원초적 창조주의 사랑인 것이다.

 

사랑의 소멸

한 생명이 잉태되기 위하여는 준비된 인간의 사랑이 필요하다. 하나님께서는 이를 위하여 인간에게 복을 주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복을 주시며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고 하셨다.

 

따라서 하나님이 지으신 생명의 시작은 두 남녀의 사랑의 시작으로부터 출발한다. 원래 이 사랑이 없이는 잉태가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인데 인간은 죄를 알면서부터 사랑의 시작을 육체의 소욕을 위하여 즐기기 시작하였다. 이로써 이 땅은 패역함이 심하여져 결국 대 홍수라는 심판으로 멸망을 받아야 했다. 이러한 비극은 우리의 현실 속에서 더 극심하게 나타나고 있다.

 

최근 중학생이 부모의 꾸지람에 분노하여 아무런 이유 없이 이웃 여학생을 살인한 사건은 세인을 놀라게 하였다. 이러한 모든 범죄를 분석해 볼 때 모든 범죄는 결국 사랑의 상실에서 출발한다고 할 수 있다. 잉태됨으로부터 부모의 사랑을 체험하여야 할 생명이 사랑의 부재 현상 속에서 무 생명의 환경에 의하여 성장한다면 그 아이는 생명이 아닌 로봇과 다를 바 없다. 그러한 생명은 사랑이란 소프트웨어가 입력되지 않은 프로그램 같아서 연출자가 어떠한 사랑을 요구하여도 그에게 없는 프로그램을 표출할 길이 없다.

 

생명의 시작

그러면 이러한 사랑은 어디로부터 출발하는 것인가? 씨가 없이는 본체도 없고 열매도 없는 것이 창조의 원리이다. 따라서 창조 사역 이후 이 땅에 씨 없이 탄생되는 생명체는 있을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 땅에 생명체를 창조하실 때에는 씨로부터 시작한 것이 아니라 본체로부터 시작되었다. 모든 식물과 동물, 그리고 인간도 마찬가지다.

 

이것이 창조자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신 이유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의 창조는 그의 온전하신 사랑에서 출발한 것이다. 성경은“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고 기록하였다. 그리고 그 사랑을 하나님께서는 그의 아들을 통하여 세상에 나타내신 것이다.

 

이에 대하여 성경은“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고 설명하고 있다. 이 말씀은 성경 전체를 한마디로 요약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사랑의 본체이신 하나님으로부터 쫓겨난 인간은 근본적인 사랑을 알 수가 없는 것이다. 믿지 않는 사람들은 성경 기록 속의 악인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을 가리켜 하나님의 사랑은 거짓말이라고 말하며, 그리스도인의 사랑도 거짓이라고 비판한다. 그러나 이 문제는 처녀가 애를 낳은 것을 설명하는 것보다 설명하기가 힘들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인들이 아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인 것이다. 여행 중 세계 어느 곳에서라도 그리스도인들을 만나면 초면인데도 오래 전부터 아는 사람을 만난 듯 한 느낌을 받는다. 무엇인가 잘 맞는 옷을 걸친 듯하고 내 살을 대하는 듯하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사랑, 즉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 있기 때문이다.

 

싸움의 시작

우리는 본문에서 하나님이 택한 백성 이스라엘의 열두 방백을 낳은 야곱의 사랑이야기를 배우게 된다. 어떻게 보면 참으로 유치하고 치사한 것이다. 믿지 않는 사람도 이처럼 요란한 생활은 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부분을 우리는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이스라엘은 이 땅에 새롭게 시작되는 하나님의 사람들이다.

 

사랑의 본체이신 하나님께서 택하셔서 그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시고 가르치셔서 이 땅의 모든 사람들에게 그 사랑을 실천케 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프로그램인 것이다. 그러면 이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어떻게 가르칠 수 있을 것인가? 인간이 무생물체라면 그 사랑의 개념을 어떠한 공식과 이론으로 체계화할 수 있겠다.

 

그러나 인간의 삶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 창조된 개개인의 무한적 자유의지의 교감 속에 변화무쌍하게 생성된다. 아무리 고결하고 고귀한 하나님의 사랑이라도 이 땅의 죄인들 속에 표출되기 위하여는 치사 유치 찬란한 빤스가 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만약에 이 말이 거짓이라면 부부생활을 유치 빤스되지 않게 고귀하게 박은 비디오를 내놓을 수 있어야 한다. 아무리 고귀한 사랑이라도 그 사랑이 육체 속에 나타날 때에는 울고불고 지지고 볶는 살 냄새가 날 수 밖에 없다. 인간은 영이 아니기 때문이다.

 

교만의 시작

야곱은 싫든 좋든 졸지에 두 아내를 거느리고 살아야 했다. 야곱은 이때부터 희비애락이 엇갈리는 사랑의 쌍곡선을 타야만 했다. 그러나 공평하신 하나님께서는 야곱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 레아를 위로하여 네 아들을 낳게 하므로 그녀의 코가 하늘을 찌르게 하였다. 이에 비하여 야곱의 속과 겉을 몽땅 다 차지한 라헬은 임신 한번 해보지 못한다.

 

이 문제는 형제라 해도 질투의 화신이 될 수밖에 없다. 이에 견디다 못한 라헬은 애꿎은 야곱에게“나로 아들을 낳게 하라”고 보챈다. 이에 야곱은“아니 이 여편네야 내가 못 낳는게야 네가 못 낳는게야? 레아 좀 보라구! 레아는 가물에 콩 나듯 어쩌다 한번씩 눌러도 직방 인데 날 보고 어쩌란 말이야”라고 큰 소리를 친다.

 

그리고 야곱은 라헬이 잉태하지 못하게 하신 것은 하나님이시라고 발을 뺀다. 잘하는 것은 제 탓이고 못된 것은 하나님 탓으로 돌리는 인간의 심보가 여실하다. 이에 화딱지가 터진 라헬은 시집올 때 데리고 온 여종 빌하를 야곱의 이불 속으로 처넣는다. 모로 가도 서울은 가야 직성이 풀리는 여자들의 오기의 발로이다. 이 고집을 어느 장사가 막을 수 있다더냐?

그러나 말은 바른 말이지만 열 기집 마다하는 남자 있으면 나와 보라구 해. 이럴 땐 미친척하고 들어가는 거지 용빼는 재주 있간디? .

 

질투의 시작

그런데 홧김에 서방질한 것이 꼭 아들 밴다고 여종 빌하가 아들을 낳게 되는데 라헬은 소원성취라도 한 듯이‘하나님이 나의 억울함을 푸셨다’라고 하며‘단’이라고 불렀다.‘ 단’이란‘심판하다’라는 뜻이다. 나중에야 삼수갑산을 가든 말든 모처럼 만에 아들 재미를 본 라헬은 다시 야곱으로 빌하의 아들을 낳게 하는데 이번에는‘납달리’라고 이름을 지었다.‘납달리’는‘씨름한다’라는 의미로‘경쟁에서 이겼다’라는 뜻이다.

 

이쯤 되니까 레아도 질 수 없다는 듯이 여종 실바를 야곱의 이불 속에 집어넣고 만다. 이유야 어찌되었든 야곱만 여복이 터지는 달밤이다. 이 때 중국집이 있었다면 신나는 짜장면일 것이다. 결국 실바도 아들을 낳게 되는데 레아가 그 이름을‘갓’이라 지었다.‘갓’이란‘부대’라는 뜻으로‘내 아들들이 부대를 이루었다’라는 의미이다. 참 이 여인들이 지금 무엇을 하는 것인지 기가 차서 방귀도 안나온다.

 

이건 완전히 애낳는 공장을 차린 것이나 진배없다. 일본 어느 마을에 가면 애 하나를 낳으면 100만엔 씩 주는 곳이 있는데 이곳에 가면 야곱은 벌써 800만엔을 벌었을 것이다. 우리 돈으로 치면 9천만 원 돈이다.

 

이처럼 형제간에 자식 낳기 경쟁을 벌이던 어느 날 레아의 장남 르우벤이 들에서 합환채를 구해 가지고 어미에게 갖다 준다. 합환채란 최음 효과가 있는 풀뿌리였다. 이것을 본 라헬이 정신이 벌떡나서 언니 레아와 흥정을 한다. 오늘밤 책임지고 야곱을 이불 속에 넣어줄 터이니 합환채와 바꾸자는 것이었다.

 

소망의 시작

사실 레아는 하늘을 보지 못해서 별을 못 따는 것이었기 때문에 하늘을 보게 해준다는 말에 망설일 필요가 없었다. 그래서 그 날 저녁에 레아는 다섯째 아들‘잇사갈’을 만들게 되는데‘잇사갈’이란‘임대료’란 뜻이다.

 

레아는 계속해서 여섯째 아들을 낳으며 하나님이 내게 후한 선물을 주셨다 하며‘스불론’이라 이름하였는데‘스불론’이란‘거한다’라는 의미로 그녀는 사실 남편 야곱이 자기 가슴에 거하기를 소원한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외동 딸‘디나’를 낳는다.

 

이쯤 되니까 라헬은 코 빠진 신세가 될 수밖에 없다. 남들은 야곱이 들어가기만 하면 떡두꺼비같은 아들만 쑥쑥 잘 났는데 자기는 꿀단지를 껴안고 살아도 아들은커녕 헛구역질도 못해 보았다. 이때의 심경이 얼마나 처량했던지 하나님께서는 옹쳐 매어 두었던 태를 열어 주셨다. 참으로 하나님은 짓궂은 데가 있으시다.

 

드디어 라헬이 아들을 낳자 그 이름을‘요셉’이라 하였다.‘요셉’이란‘더한다’라는 뜻으로‘더 낳을 것’을 소망한 것이다. 이러한 소망대로 라헬은 야곱의 귀환 길에 베들레헴 근처에서 야곱의 열두 번째의 아들 베냐민을 낳고 난산으로 세상을 뜬다. 이처럼 끈질긴 여인들의 싸움은 어디로부터 나온 것일까? 결국은 남편의 사랑을 차지하고자 하는 여인들의 질투인 것이다. 이처럼 사랑은 질투를 몰고 온다. 하나님께서도“나는 질투하는 하나님이시다”라고 하셨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