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29장-2) 거절할 수 없는 애정의 틀
(창29:21-27) 야곱이 라반에게 이르되 내 기한이 찼으니 내 아내를 내게 주소서 내가 그에게 들어가겠나이다 라반이 그곳 사람을 다 모아 잔치하고 저녁에 그 딸 레아를 야곱에게로 데려가매 야곱이 그에게로 들어가니라 라반이 또 그 여종 실바를 그 딸 레아에게 시녀로 주었더라 야곱이 아침에 보니 레아라 라반에게 이르되 외삼촌이 어찌하여 내게 이같이 행하셨나이까 내가 라헬을 위하여 외삼촌께 봉사하지 아니하였나이까 외삼촌이 나를 속이심은 어찜이니이까 라반이 가로되 형보다 아우를 먼저 주는 것은 우리 지방에서 하지 아니하는 바이라 이를 위하여 칠 일을 채우라 우리가 그도 네게 주리니 네가 그를 위하여 또 칠 년을 내게 봉사할지니라
아직 혼전이라서
우리 속담에‘콩심은 데 콩나고 팥심은 데 팥난다’라는 말이 있다. 이것이 하나님이 정하신 생명의 법칙이다. 이러한 자연계의 법칙은 영적 세계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본문 속에서 우리는 이 부분을 배우게 된다.
야곱은 육신의 형 에서를 두 번에 걸쳐서 아주 야비한 방법으로 속여 하나님으로부터 예언된 장자 권을 쟁취하였다. 방법이야 어떻게 되었든지 간에 모로 가도 서울은 왔으니까 된 셈이라고 생각하겠지만 하나님은 방법과 수단과 동기를 모두 중요시한다.
야곱은 한 순간에 간단히 성취한 장자권 문제를 완성시키는데 20년이라는 긴 삶 속에서 철저하게 갚음을 치른다. 아마 이러한 법칙이 틀림없이 적용된다는 원칙을 미리 알았다면 야곱은 생각을 달리 했을지도 모른다. 그것도 도망갈 구멍조차 없이 꽉 막혀버린 인생 길 위에서 값을 치러야 했다. 더욱이 무를 수도 없고 되돌아 설 수 없는 상황 속에 끼어 버린 그의 인생 길에는 사랑이라는 얄미운 단어가 기다리고 있었다.
지금도 이‘사랑’이란 단어로 인하여 수많은 남녀들이 가슴을 태우며 울고불고 심지어는 목숨을 내던지는 문제까지 발생한다. 아마 짝사랑이나 열병앓이를 해 본 사람은 이 사랑이라는 단어가 얼마나 무거운 것인지를 가히 짐작할 것이다.
가슴속에 숨도 쉬지 못할 만한 커다란 돌멩이가 들어앉아서 시도 때도 없이 짓누르고 있고, 입에서는 시골 사랑방에 배어있는 곰방대 담뱃진 냄새보다 더 심한 단내가 나게된다. 어디 그뿐이랴. 흡사 황달병 환자의 얼굴에 살기를 품은 듯 충혈된 눈빛만이 원수를 기다리는 심정으로 칼을 간다. 이 병에 걸리면 약도 없단다.
이러한 사랑의 열병을 앓아보지 못한 사람은 얼마나 심심한 인생일까 싶기도 하겠지만 이 열병을 일생에 두 번 다시 앓아야 한다면 차라리 죽는 것이 나을 것이다.(이러는 나는 열병을 앓아 본 것일까? 글쎄…아직 내가 혼전(婚前)이라서 대답할 수 없다)
사랑을 위하여
왕 눈치꾼 야곱은 삼촌 라반과 함께 한 달을 살면서 라반이 물질적인 사람임을 간파한다. 어쩌면 떠나오기 전 어머니 리브가로부터 그에 대하여 충분히 들었을 것이다. 그나마 그곳에서 쫓겨나면 갈 때조차 없는 신세이고 보니 라반의 눈에 들지 않으면 안 될 형편이다. 그래서 아마 야곱은 라반의 의중을 간파해야만 했을 것이다.
“어찌 네가 공으로 일만 하겠느냐”라는 라반의 말로 미루어 볼 때 한 달 동안 야곱은 라반의 눈에 들었던 모양이다. 야곱의 부지런함과 성실성을 살핀 외삼촌 라반은 야곱에게“무엇이 네 보수겠느냐”라고 고용 조건을 물었다.
이에 야곱은 라헬을 연애하므로 더부살이 7년 무임 봉사를 할 것을 제안한다. 이 말에 라반이 쾌히 승낙하는 것으로 보아 그에 해당하는 품삯이 만만치는 않았을 것이다. 지금 입사 초년생 한 달치 임금을 80만원이라고 가정할 때 7년치 임금은 결코 적은 것은 아니다.
야곱으로써는 생각할 여지조차 없는 상황이므로 청혼 낙찰을 위하여 신중하지 않으면 안되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사랑을 위하여 7년의 무임 봉사를 자청하는 것은 그리 간단한 문제만은 아닌 것이었다. 그러나 성경은 야곱이 라헬을 연애한 까닭에 7년을 수일같이 여겼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처럼 사랑에는 자기를 희생할 수 있는 절대적인 힘이 있다.
제 도끼에 발들 찍히기
7년을 수일처럼 봉사한 야곱은 기한이 차자 삼촌 라반에게 약속의 이행을 요구한다. 그 얼마나 감격적인 순간이랴! 사랑하는 여인을 위하여 7년의 봉사를 마친 그 날은 평생을 잊지 못할 감격의 순간이었다.
라반은 내심 흡족해 하며 동네 사람들을 모아 놓고 잔치를 벌였다. 그가 잔치를 크게 벌인 것은 야곱을 꼼짝 못하게 하려는 의도도 포함되었을 것이다. 야곱은 사랑하는 라헬을 아내로 맞는다는 기쁨에 들뜬 가슴을 억제하며 거나하게 술독에 빠졌을 것이다.
그러나 야곱은 그날 밤 라헬이 아닌 그녀의 언니 레아와 첫날밤을 치르고 말았다. 사기꾼 야곱이 왕 사기꾼에게 멋들어지게 사기를 당한 것이다. 이것은 돌이킬 수 없는 사고였다. 제 도끼에 제 발을 찍은 격이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다.
성경은 레아를 가리켜 안력이 없다고 기록하였다. 여기서‘안력이 없다’는 것은 시력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그 종족들의 눈 색깔이 아닌 다른 색이었을 것이다. 만약 한국 사람이 파란 눈을 하고 있다면 옛날 같으면 그 처녀는 좋은 집안으로 시집가는 일은 애당초 포기해야 한다. 그래서 라반은 실리는 실리대로 챙기고 문제는 문제대로 처리하려고 했던 것이다. 이처럼 라반은 정말로 머리가 잘 돌아가는 사람이었다.
속없는 만두를 먹어야 하나?
아침에 일어나 보니 돌이킬 수 없는 사고를 당한 야곱은 대경실색하여 라반에게 달려가 따지기 시작한다.“삼촌, 레아라니요? 나는 라헬과 결혼했는데 삼촌이 어찌 이런 일을 할 수 있어요? 나를 속이다니요?”하하하, 이것은 지난번 자기가 에서에게 듣던 소리가 아닌가?
저는 동생으로서 형을 두 번이나 속여먹은 주제에 제가 똑같은 상황에 닥치고 나니 길길이 날뛰고 있다. 아마 야곱도 가슴 한 쪽이 찔렸을 것이다. 그러나 라반은 천연덕스럽게“형보다 아우를 먼저 주는 것이 이 지방 풍속에 어긋나니 7일을 더 채우면 라헬도 줄 것이니 그를 위하여 7년을 더 봉사하라”고 말한다. 7일을 채우라는 것은 신랑으로써 결혼의 의무를 다 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번에는 라헬을 먼저 줄 것이니 그 값으로 7년을 더 봉사하라는 것이다. 여기서 사랑의 값이 상대의 마음과 관계없이 똑같이 계산되고 있음은 흥미로운 일이다. 참으로 거절할 수 없는 억지 중에 억지이다.
이미 엎질러진 물이니 쓸어담을 수도, 무를 수도, 되돌아갈 길도 없다. 꼼짝달싹 할 수조차 없게 된 상태에서의 게임이다. 그만두자니 평생 속없는 만두를 먹어야할 판이다. 그렇다고 7년을 가슴에 불지펴온 라헬을 포기하는 일은 있을 수 없다. 더군다나 7일을 채우면 라헬을 주겠다는 말은 불붙은 장작에 끼얹은 기름이다.
울며 겨자먹기
여기서 우리가 이해하고 넘어가야 할 부분은 그곳의 결혼 풍습은 일부다처제였다는 것이다. 일부다처제는 시대를 떠나서 남자 편에서는 절대로 밑지지 않는 장사이다. 큰마누라가 싫증나면 작은 마누라에게, 작은 마누라가 강짜를 부리면 큰마누라에게 가면 된다. 이 좋은 제도를 누가 폐지하였는지 모르겠다.
여러분은 이유야 어떻게 되었든지 간에 야곱은 호박이 넝쿨채 굴러들어 온 것이라고 하겠지만 그것은 천만에 말씀이다. 인생에 있어 사랑은 외곬 수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심장을 나눌 수 없는 것과 같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사랑의 진리’다. 성경은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고 기록하였다.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 여인하고 함께 산다는 것은 LPG 가스통을 껴안고 사는 기분일 것이다. 이처럼 진정한 사랑은 둘로 나눌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인간이 두 마음을 가질 수 없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사랑이란 것을 원래 유일한 것으로 만드셨기 때문이다. 사랑의 종류와 사랑이란 단어는 많아도 우리 가슴에 담아둔 하나님의 사랑은 오직 하나이기 때문이다.
사랑의 불꽃
막다른 골목에 선 야곱은 울며 겨자 먹기로 라반의 제안을 수락하고 만다. 아마 계산 빠른 라반이 처음부터 이런 일을 계획해 놓았던 것은 이 참에 자기의 딸들을 야곱에게 주어서 가나안 땅의 재벌 아브라함의 후계자 구도를 단단히 구축해 놓자는 심산이었는지도 모른다.
하나님이 보장한 후계자에게 딸 둘을 주는 것은 확실히 남는 장사가 아니겠는가?
이제 레아를 합법적인 아내로 맞이한 야곱의 가정 생활 속에서 공평하신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데 자기의 사랑을 라헬에게 쏟은 것과 관계없이 하나님께서는 사랑받지 못하는 레아의 태를 여셨다. 원래 금실 좋은 사이에서는 자식이 궁한 것이다. 또한 맘에 없는 떡은 꼭 체하는 법이다. 레아는 첫 아들을 낳자 그 이름을 르우벤이라 하였다.
첫 아들이 레아의 가슴을 채우지 못한 야곱의 사랑을 회복시켜 줄 것을 믿으며“하나님이 나의 괴로움을 권고하셨으니 이제는 내 남편이 나를 사랑하리로다”라고 하소연하였다. 사랑받지 못하는 여인의 아픔이 어떠한지를 단적으로 표현하는 외침이다.
그리고 레아는 다시 아들을 낳고‘시므온’이라는 이름을 짓는다. 이 또한“여호와께서 나의 총이 없음을 들으셨음으로 내게 이도 주었다”라는 애절한 사모곡이다. 다시 말하여 첫 아들은‘아들을 보라’라는 뜻이요, 시므온은‘하나님이 들으신다’라는 뜻이다.
야곱의 사랑을 탈취하기 위하여 그녀는 다시 아들을 낳고‘레위’라고 이름짓는데 이것은 야곱이 아이들을 부를 때마다 아들들이‘연합'하여 달려들면 야곱의 사랑도 자기에게 돌아오리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레아는 그 소원을 이루지 못한 채 또 다시 아들을 낳아‘유다’라고 이름을 짓는다. 그녀는‘유다’라고 이름을 지어 아들을 주신 하나님을‘찬송’한다. 이제는 야곱에게 4명의 아들을 낳아 주었으니 남편의 사랑은 따 놓은 당상이란 뜻이다.
이처럼 사랑이란 틀에 낀 인생은 그 누구도 고해의 바다를 헤어나지 못한다. 레아는 야곱의 사랑의 틀에, 야곱은 라헬의 사랑의 틀에 끼어 진실한 사랑을 완성하기 위한 투쟁을 하는 것이다.
아들을 넷이나 낳도록 이루지 못한 레아는 과연 어떠한 사랑을 원하는 것일까? 또 오직 하나의 사랑을 위하여 다시 7년 동안을 무임 봉사해야 하는 야곱의 사랑은 무엇일까? 그리고 지금 나는 예수 그리스도와 어떤 사랑을 나누고 있는 것일까? 애 잘 낳는 사랑인가 아니면 불지핀 사랑방에 타오르는 사랑의 불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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