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강해/창세기 강해

(창세기 28장-2) 천사와의 랑데뷰!

이요나 2007. 2. 15. 13:45

(창세기 28장-2) 천사와의 랑데뷰!

 

(창28:20-22)야곱이 서원하여 가로되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사 내가 가는 이 길에서 나를 지키시고 먹을 양식과 입을 옷을 주사 나로 평안히 아비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오면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 내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전이 될 것이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 하였더라

 

탄생으로부터의 싸움

모태로부터 택함을 받은 3세대 신앙인 야곱! 그는 더 이상 만석군의 아들이 아니다. 개나리 봇짐을 싸들고 광야에서 돌 베개를 베고 자야하는 신세가 되었다. 모태로부터 벌여 온 에서와의 장자권 다툼은 결국 혈기왕성한 에서에게 선취권을 빼앗기고 겨우 에서의 발목을 잡고 따라 붙어서 야곱이란 미운 이름을 받게 되었다.

 

에서의 활달한 성격과 용맹을 사랑하는 아버지 이삭을 바라보며 믿음의 2세대가 구축해 놓은 완전한 부귀를 고스란히 빼앗기 위해 야곱이 믿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친히 받은 어머니 리브가 뿐이다.

 

궁리와 잔머리로 뭉쳐진 마마 보이 야곱은 어머니 리브가와 합작을 하여 장자권을 탈취할 기회를 포착하는데 결국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인간의 손으로 이루려는 모순을 만들고 만다. 과연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의 힘으로 이룰 수 있는 것인가? 오늘의 야곱의 십일조는 여기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우리는 사라가 하나님의 말씀을 억지로 이루려다가 엄청난 사건 이스마엘 탄생 사건을 잘 알고 있다. 아브라함은 이로서 13년이란 오랜 세월을 하나님과의 단절된 삶을 살아야 했다. 혹시 여러분은 하나님과 단절된 삶을 살아본 일이 있었는가? 나는 과거 내가 저지른 범죄 때문에 깊은 죄의식의 수렁에 스스로 빠져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했던 시절이 있었다.

 

그 일로 내가 절실히 배운 것은 회개의 기회를 잃지 말라는 교훈이다. 회개라는 것도 성령께서 회개의 기회를 주셔야 되는 것이지 아무리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고자 하여도 그 길이 열리지 않으면 우리는 회개할 기회조차 얻지 못하고 만다.

 

이 때는 차라리 내가 살아있지 않았으면 하는 생각조차 들었다. 이때의 심경에 대하여 욥은“내가 앞으로 가도 그가 아니 계시고 뒤로 가도 보이지 아니하며 그가 왼편에서 일하시나 내가 만날 수 없고 그가 오른편으로 돌이키시나 뵈올 수 없구나”(욥 23:8-9)라고 하였다.

 

풀지 못하는 숙제

야곱은 후회해도 돌이킬 수 없는 현실 속에서 혈혈단신이 되어 부평초 신세가 되었다. 이제는 장자의 축복이 문제가 아니고 목숨을 지니고 있다는 것조차 부담스럽다. 하나님을 향한 믿음도 소망도 사랑도 모두 끊어진 상태에서 죽음의 안개만이 자욱하다. 그러나 인생에 밤이 없다면 밝은 태양도 없다. 많은 선각자들은 대개 밤에서 낮을 발견하였다. 그리고 그는 다시 엄습하는 어둠을 풀기 위하여 고뇌에 빠진 채, 결국은 그 숙제를 풀지 못하고 미궁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런데 그 후대의 사람들은 그 선각자들이 인고의 세월 속에서 겨우 발견한 이론들을 체계화하여 그것을 세상을 밝히려는 진리로 발전시키려는 위험한 일들을 하고 있다. 그들은 자신들이 추앙하는 선각자도 완성하지 못한 채 역사 속에 맡겨둔 인간의 영혼에 관한 숙제를 몇 가지 체계화한 초등학문을 가지고 해결해 보려는 과오를 범하고 있다.

 

꽉 막힌 현실 속에서의 탈출구는 역시 꿈과 환상이다. 그러나 이러한 꿈의 실현은 현실의 융통성 속에서만 가능하다. 그러나 앞뒤 꽉 막혀버린 현실에서는 깊은 암흑과 깨고 싶지 않은 깊은 잠만 있을 뿐이다. 절망의 잠에 빠진 야곱에게 꿈속에 펼쳐진 하늘나라의 파노라마는 현실로 돌아오고 싶지 않은 영원한 탈출구였다.

 

비집고 들어갈 틈조차 없는 현실 속에서 하늘 꼭대기까지 닿은 사다리 그리고 하늘에서는 천사들이 마중을 나오고 있었다. 어디 그뿐이랴! 이야기 책 속에서만 듣던 하나님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이 아닌가?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너의 누운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이 땅의 티끌같이 되어서 동서남북에 편만할지며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을 인하여 복을 얻으리라”이것은 정말 세상에서 살고 싶지 않은 사람에게 나타난 밤 12시의 삼선 짜장면이다. 미국 클린턴과 함께 한 하나님이 아니고 우리 김 대중 대통령과 함께 하신 하나님이라면 믿을만한 God News이다!

 

택함, 앎, 만남

‘엘로힘’(하나님)이라는 칭호가 능력과 관련되었다고 할 때 ‘여호와’라는 이름은 늘 사랑과 은혜의 의미를 부여한다. 이 이름을 만나는 찰나의 순간에 야곱의 머리 속에는 하나님의 지식과 지혜가 각인되고 있었다.

 

하나님의 약속이 혈통으로 이루어지는 줄로 알고 장자 권을 억지로 이루려했던 하나님의 사람 야곱의 한계는 이제 초월이라는 공간 속에서 하나님의 지혜와의 랑데뷰인 것이다. 하나님의 공간에는 오직 영원한 생명과 전지와 지혜와 전능의 능력이 있을 뿐이다.

 

더군다나 조부 아브라함이 받은 지상의 대 명제“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으로 복을 얻으리라”는 말씀이 다시 살아서 오는 순간을 상상해 보라! 어디 그뿐이랴.“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인간이 여기서 더 무엇을 바라랴!

 

하나님의 공간 속에 들어가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때 그 시간 속의 인간의 지성과 지각은 천사와 같은 입장에 서 있게 된다. 베드로는 후일 변화산상의 일에 대하여“그 아들에 대하여는 우리가 하나님의 산에서 그로부터 친히 들은 것이라”고 회상하였다. 만약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공간에서 단 1초만이라도 만날 수 있다면 그 영광의 능력은 우리의 생명 속에 각인되게 마련이다.

 

나는 이것을 바라는 소망으로 오늘도 기도한다. 이것은 주의 오심을 고대하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소망이다. 그러나 꿈에서 깨어난 야곱을 보라! 그가 누워 있는 현실은 어떠한가? 돌 베개와 개나리 봇짐 그리고 황량한 광야에 버려진 천애 고아 신세다. 꿈속에서 지어 놓은 기와집 열두 채가 와르르르 하고 무너지는 순간이다. 그러나 이것을 무너뜨리기에는 너무나 크고 위대한 비전이었다. 그는 이 꿈을 무너뜨리고 싶지 않았다.

 

보트타고 강 건너기

그는 자기가 만난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앞에 서원을 하기에 이른다. 먼저 이 기가 막힌 현실로부터 나를 지켜 주시고 나를 아비의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면 나를 부르신 여호와께서는 나의 하나님이 되시고 내가 베고 자던 이 돌은 하나님의 성전이 될 것이며 하나님이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의 일을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다고 맹세를 한 것이다.

우리는 오늘 이 말씀을 다시 한번 심도 깊게 음미해 볼 필요성이 있다. 꿈속에서 만난 하나님과 천사들은 현실 속에서 볼 수 없다.

 

그리고 이른 아침에 황망한 광야에 홀로 선 자신은 현실인 것이다. 누가 나를 이 광야에서 먹이고 입히고 다시 아비의 집으로 돌아가게 할 수 있다면 그것은 꿈에서 본 살아있는 환상이다. 이에 야곱은 그의 가슴에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자기 인생의 문제를 해결하시면 당신은 나의 하나님이 될 것이고 내가 세운 이 돌이 당신의 성전이 될 수 있다는 약속을 이끌어 낸 것이다.

 

어떻게 보면 야곱의 맹세는 아주 땅 짚고 헤엄치기가 아니라 보트 타고 강 건너기이다. 이건 완전히 밑져야 본전인 게임이다. 더구나 이렇게 될 때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일조를 반드시 드리겠다는 약조를 보라! 얼마나 현명한 지혜인가! 이것이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지혜인 것이다. 하나님의 지혜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 속에서 나타나는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는 열쇠이다. 그러나 야곱의 서원은 얼떨결에 해보는 맹세가 아니고 아주 확실한 하나님의 지식을 갖고 하나님과 하는 맹세이다.

 

야곱은 약속을 지키는 주체는 자기가 아니라 하나님이심을 안 것이다. 최근 백성들과 한 약속을 당리당략 때문에 쉽게 깨는 지도자들을 본다. 그러나 이것으로 그는 그를 세우신 하나님과의 관계의 틀에서 벗어나게 되는 것이고 하나님은 반드시 그를 세울 때 한 그의 약속에 대한 책임을 물을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약속은 약속을 이룰 주체가 누구인가를 분명히 알 때 할 수 있는 것이다.

 

말씀안에서 자유하라!

인간은 아무것도 자기 스스로 이룰 수 없다. 주께서 하늘로도 땅으로도 성전으로도 맹세를 말라고 하신 것은 우리가 내 머리털 하나도 희게 할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단 한가지 은혜를 입은 자가 할 수 있는 것이 있다. 그것은 그를 부르신 하나님의 소명이다. 이 소명을 이루기 위하여 부르신 것이기 때문에 그 일은 반드시 이루어진다.

 

이 소명은 먼저 하나님과의 관계성에서 이루어지며 그 다음은 그 관계의 접촉점인 성전을 세우는 일이요 마지막은 하나님의 주권에 손을 대지 않는 것이다. 즉 야곱의 십일조 서원은 아브라함이 깨달은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을 그대로 이어받아 하나님의 영광을 취하지 않고 일을 성취한 모든 능력이 그로부터 시작되었음을 증명하는 증거물인 것이다. 나는 이제 이 지식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서원 할 기회를 찾는다.

 

여러분 또한 물질에 연연한 십일조에서 벗어나 세상을 이긴 모든 증거들을 들고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기를 바란다. 당신의 믿음은 자유함을 누릴 필요가 있다.“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니이다”(요 8: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