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강해/창세기 강해

(창세기 28장-1) 사다리를 타고 내려오는 사랑

이요나 2007. 2. 15. 13:47

(창세기 28장-1) 사다리를 타고 내려오는 사랑

 

(28:13-15) 또 본즉 여호와께서 그 위에 서서 가라사대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너 누운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이 땅의 티끌같이 되어서 동서남북에 편만할지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을 인하여 복을 얻으리라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

 

도망자 야곱

이삭은 두 형제의 갈등을 잠재우기 위하여 그를 잠시 외갓집에 떠나 보내기를 결심한다. 그러나 이것이 쉽게 돌아오지 못할 길임을 전혀 예측하지 못한 채 다만 결혼 적령기에 있는 아들 야곱에게 셈의 혈통인 라반의 딸 중에서 아내를 맞이하라고 당부한다. 이는 에서가 이방 여인들과 결혼한 후로 그의 삶이 더욱 나빠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삭은 야곱을 떠나 보내며 야곱을 축복하여 생육과 번성의 축복을 기원하며 아브라함에게 내린 복과 언약된 이 땅의 유업을 받을 것을 기원하였다.

 

이제 모름지기 하나님께서 부르신 믿음의 조상의 후계자로서 공인을 받은 것이다. 그러나 야곱의 앞에는 온전한 후계자로서 그 언약을 성취하기까지 꽤 많은 세월과 희생의 삶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부르심을 받아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도 이 땅에서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온전한 기업을 물려받기까지는 하나님께서 설정해 놓으신 경륜의 세월을 통하여 다듬어지는 과정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영과 육의 구조로 지음 받았기 때문에 우리가 온전한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사람이 되기까지는 육신 속에 도사리고 있는 소욕이 완전히 끊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한편 육적인 욕정에 이끌려 살아가는 에서는 이방에서 취한 자기의 아내들이 부모의 기쁨이 되지 못함을 알고 아버지의 형제 이스마엘의 딸을 또다시 아내로 받아들인다. 이처럼 하나님의 영적 구도에 들지못한 사람은 기쁘신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 못하고 계속 육적인 만족을 통하여 현실을 충족해 보려고 안간힘을 쓴다.

 

사다리 위에서

에서를 속여 장자권을 쟁취한 야곱은 현실의 삶 속에서 복은 고사하고 졸지에 개나리 봇짐을 걸머지고 부모의 집을 떠난 도망자가 되어야 했다. 그의 도망길이 얼마나 조급하였는지는 하루 길에 벧엘까지 당도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브엘세바에서 벧엘까지는 64km의 거리였다. 아마 사냥꾼인 에서가 말을 타고 달려올지도 모른다는 강박관념에 쌓였는지 모른다. 그리고 지친 몸을 이끌고 벧엘 광야에서 밤을 맞은 그는 돌베개를 베고 곤한 잠에 빠져 버렸다. 벧엘은 과거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에 처음 당도했던 곳으로 롯과 헤어진 곳이기도 하다. 이 곳에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이 땅을 너와 네 자손에게 주시겠다고 약속을 하신 곳인데 하나님께서는 같은 장소에서 깊은 잠에 빠진 야곱에게 나타나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을 재확인하신 것이다.

 

야곱은 땅위에 선 사다리가 하늘에 닿은 것을 보았고 그 위에서 하나님의 사자가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을 보았다. 우리는 요한복음 1장에서 예수께서 제자들에게“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가 인자 위에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고 하신 말씀을 기억한다. 물론 제자들 중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은 변화산에서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님께 내려온 모습을 실제로 보았지만 이 말씀은 이 땅에 사는 모든 인간에게 가장 큰 소망을 주는 메시지이다.

 

너도 끼워줄게

모든 종교는 의롭지 못한 인간이 인간의 노력과 방법으로 의롭게 되어 하늘로 가는 길을 모색하는 것이라 할 때, 기독교는 이 땅의 모든 인간은 의롭지 못하다는 전제 하에 인간을 의롭게 하기 위하여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 땅에 친히 오신 것이다.

 

따라서 사다리를 타고 내려오시는 오늘의 사다리 이야기는 복음의 출발점이기도 하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사다리 위에 서서“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 속에는 인간을 구속하신 하나님께서 시대와 공간을 초월하여 언약을 이행하신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아브라함은 죽어서 이미 열조에 들어갔고 이삭은 비록 함께 있지 않지만 그들과 함께 하신 하나님의 무소 부재하심과 영원하심과 불변하심을 내포하고 계신 것이다.

 

또한 하나님께서는“너 누운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라”고 말씀 하셨는데 여기서‘자손’이란 복수명사가 아닌 단수명사로써 오직 오실 자‘예수 그리스도’를 지칭하는 것이다. 이처럼 오늘 야곱에게 나타나신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과 같이“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이 되어서 동서남북에 편만할 지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을 인하여 복을 받으리라”고 하셨다.

 

여기서 우리에게 주목되는 것은‘너와 네 자손’이란 말씀이다. 우리는 여기서‘네 자손’이란 메시야를 가리키는 것이지만 이 메시야 언약 속에‘너’를 포함시킨 것은 참으로 납득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것은 메시야 구도에 우리의 믿음을 동참시키는 하나님의 은혜인 것이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동의없이 무엇이든지 하실 수 있다.

 

그의 창조 사역은 그 누구의 동의와 도움없이 친히 자신의 손을 펴서 그의 뜻대로 완성하셨다. 그러나 이 땅의 모든 인간이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은혜에 이르는 길에는 인간의 믿음을 동참시키셨다.

 

! 두려워

또한 우리는 본문 속에서 위대한 하나님의 계획을 발견하는데“네가 어디를 가든지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너를 지키며 이끌며”라는 말씀이다. 예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사시며 그들을 지키시고 그들을 이끄셨다. 그리고 세상에 오신 뜻을 이루시기 위하여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자기와 또 다른 보혜사 성령이 오실 것을 소개하였다. 주께서는 그에 대하여“그는 진리의 영으로서 너희와 영원히 함께 하며 너희 안에서 지키시며 너희를 진리 가운데 이끄실 것이라”고 증거 하셨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편재(偏在)하심을 알게 된다. 그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시며 그의 뜻과 계획을 스스로 이루시는 분이신 것이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야곱에게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고 하셨다.

 

나는 이 말씀에 커다란 위안을 받는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일은 하나님께서 친히 성취해 나가신다는 말씀인 것이다. 따라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일들에 대하여 내가 깨닫지 못하고 방황하는 것도 다 이유가 있다고 보아야 한다. 이처럼 우리는 그의 예정 가운데서 단계별로 하나님의 계획하심을 이루어 나가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마치 하나님의 배에 탄 것과도 같아서 우리가 모든 일에서 자기의 생각과 뜻대로 행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예정해 놓으신 목표를 향하여는 한 치도 더 나아갈 수 없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잠언서 기자는“우리가 자신의 뜻대로 길을 행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는 자는 하나님이시다”라고 증언하였다.

 

당돌함의 극치

졸지에 꿈속에서 여호와 하나님을 만난 야곱은 현실 속에 임재하신 하나님을 발견한다. 이 내용은 우리에게 중요한 메시지를 주고 있는데 우리는 현실 속에서 하나님의 성령이 우리 안에 계심과 지금 우리의 삶 속에 임재하고 있음을 자각하여야 한다.

 

야곱은 현실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면서 두려움에 쌓여“두렵도다 이 곳이여 다른 것이 아니라 이는 하나님의 전이요 이는 하늘의 문이로다”라고 외친다. 바울은 우리의 몸을 가리켜“너희 몸은 하나님의 성령의 전”이라고 하였다.

 

야곱은 꿈속에서 그곳에 나타난 하나님을 보고도 두려워하였지만 그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계심을 생각할 때 우리의 마음이 어떠해야 할 것인지 나는 심히 두려워진다. 야곱은 이에 하나님 앞에 서원을 한다. 이것 또한 우리에게 중대한 가르침인데 우리의 서원은 주의 임재하심 가운데 그의 뜻을 알고 드려져야 한다는 것이다.

 

인간의 충동적인 감정에서 나오는 헛맹세가 아니라 주의 임재하심 가운데 성령의 감동하심 속에서 이루어지는 서원이야말로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것이다. 야곱의 서원은 미리 말씀하신 하나님의 언약을 붙잡고 시작된다.“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사 내가 가는 이 길에서 나를 지키시고 먹을 양식과 입을 옷을 주사 나로 평안히 아비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오면 여호와께서는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이 얼마나 당돌한 말인가? 이것은 하나님의 약속을 전제로 하나님의 멱살을 잡고 하는 언약인 것이다.

 

하나님께서 내게 하신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한다면 비록 조부의 하나님이시고 아버지의 하나님이시라 해도 나와는 무관하다는 말이 된다. 이것은 하나님은 영원하시지만 우리 인간은 한계 속에 살고 있음을 강조하는 것이다.

 

땅짚고 헤엄치기

또한 야곱은“내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전이 될 것이요”라고 이 땅 위에 세워질 성전의 개념을 피력한다. 이 말 속에는 자신의 인생을 지켜서 아비의 집으로 돌아갈 일은 그만큼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일이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그리고 야곱은 이어서“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의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라고 약속을 한다. 참으로 기가 막힌 약속이다. 이것은 순전히 일방적인 게임인 것이다. 땅 짚고 헤엄치기 아닌가?

 

이 말씀들을 조목조목 짚어서 생각해 보자. 이 책임의 이행은 먼저 하나님에게 있는 것이다.‘내게 이렇게 해주실 때 나는 이렇게 해 드리겠습니다’참으로 야곱이야말로 자기 중심적이고 이기적이고 고집불통이었다. 자기가 손해볼 일은 애당초 하지 않는 타산적인 성격이었다.

 

‘내게 주신 것에서 십일조를 반드시 드리겠다?’ 헛 참! 나는 이 구절을 볼 때마다 웃음이 난다. 준 것에서 십분의 일을 드린다. 그러나 이 말은 진리 중의 진리이다. 우리가 받지 아니한 것이 어디 있어서 받지 않은 것을 드릴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지금의 우리는 받은 것 중에서 십분의 일을 온전히 드리고 있는가 하고 질문해볼 때 우리는 아무 소리도 하지 못하게 된다. 이제 나도 이 야곱의 서원을 해야 할 때가 되었나 보다. 오 주여! 나를 도와 주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