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강해/창세기 강해

(창세기 27장-2) 선택 받은 자의 고통과 빼앗긴 자의 고통

이요나 2007. 2. 15. 13:49

(창세기 27장-2) 선택 받은 자의 고통과 빼앗긴 자의 고통

 

(창27:38-40)에서가 아비에게 이르되 내 아버지여 아버지의 빌 복이 이 하나뿐이리이까 내 아버지여 내게 축복하소서 내게도 그리하소서 하고 소리를 높여 우니 그 아비 이삭이 그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너의 주소는 땅의 기름짐에서 뜨고 내리는 하늘 이슬에서 뜰 것이며 너는 칼을 믿고 생활하겠고 네 아우를 섬길 것이며 네가 매임을 벗을 때에는 그 멍에를 네 목에서 떨쳐버리리라 하였더라

 

빼앗기는 자의 통곡

이제부터 축복을 빼앗긴 자의 통곡에 대하여 살펴보자. 에서와 야곱은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쌍둥이로 태어났다. 에서는 비록 태어날 때 하나님의 축복의 말씀을 받지 못하였으나 태어난 조건 때문에 아버지 이삭으로부터 사랑을 독차지하였다.

 

야곱이라는 이름이‘발꿈치를 잡은 자’라는 의미인 것처럼 에서라는 이름은 그의 몸이‘붉다’라는 연유에서 나왔다. 따라서 두 형제의 이름은 그들의 성격과 외형적인 조건에 의하여 주어졌음을 알 수 있다. 이에 비하여 이삭의 이름은 마음의 기쁨으로부터 나왔음을 볼 때 믿음의 조상들에게 주어진 이름 속에서 또 다른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우리가 배우는 창세기 27장은 택한 자와 택함을 받지 못한 자의 삶을 묘사하고 있다. 후일 야곱은 하나님의 연단을 통하여‘야곱’이란 세상의 이름에서‘하나님을 이긴 자’라는‘이스라엘’이란 이름을 받아 이스라엘의 조상 12방백을 낳게 된다. 그러나 야곱은 미리 선택한 자 답지않게 그 언약의 자리에 오르기까지 엄청난 고통을 치르게 된다.

 

한편 에서는 출중한 외모와 용기를 갖고 장자로 태어난 자라도 자기의 위치를 지키지 못하고 하나님의 영적 축복을 누리지 못함으로 빼앗긴 자의 고통을 처절하게 당한다. 그는 후일 에돔 민족의 조상이 되긴 하였으나 그들의 후손은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늘 이스라엘 민족을 섬기며 살았다. 성경상 그들의 마지막 후손은 예수님 시대의 헤롯왕으로 로마에 의하여 이스라엘 왕에 임명되어 이스라엘을 다스렸다.

 

버스는 떠나버렸는데

예레미야 선지자는 에돔 족의 말로에 대하여 예언하기를“대저 내가 에서로 적신이 되게 하며 그 비밀한 것들이 드러나게 하였나니 그가 그 몸을 숨길 수 없을 것이라 그 자손들과 형제와 이웃이 멸망하였은즉 그가 없어졌느니라”(렘 49:10)고 하였다.

 

에서가 이처럼 지상에서 낙엽과 같은 신세가 된 것은 그가 비록 이삭의 장남으로서 아버지의 사랑과 세상의 이목을 집중시킬만한 위용과 용맹을 가졌을지라도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태어남의 축복인 장남의 명분을 소홀히 여겼기 때문이다.

 

말라기서는 이에 대하여“내가 야곱은 사랑하였고 에서는 미워하였다”(말 1:2-3)라고 기록되었다. 본문 속에서 에서는 아버지의 축복을 야곱에게 빼앗긴 것을 알고 그제서야 이를 갈며 통분하는데 성경은 에서가 많이 울었다 라고 기록하고 있으나 그 울음은 회개의 울음이 아니라 축복을 받기 위한 울음이었다.

 

“너희가 아는 바와 같이 저가 그 후에 축복을 기업으로 받으려고 눈물을 흘리며 구하되 버린바가 되어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다”(히 12:17)라고 기록되었다. 그러나 이 말은“그가 회개를 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축복을 얻지 못하였다”라고 번역함이 옳을 것이다.

 

성경에는 회개의 기회를 얻지 못함에 대하여 경계하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라도 가룟 유다는 예수를 은 30냥에 팔고 자기의 잘못된 행실을 후회하였으나 하나님으로부터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고 후일 배가 터져서 죽고 말았다.

 

히브리서 기자는“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범죄하면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다”(히 10:26)라고 하였고, 다시“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할 수 없나니”(히 6:5-6)라고 기록하고 있다.

 

회개할 기회

우리가 회개할 기회를 찾고자하면 하나님께서 그 기회를 주시지 않는 경우는 없다. 그러나 사람이 자기의 분수를 지키지 못하고 사망의 죄에 이르면 그 심령이 악하여지고 하나님의 선하심과 은혜를 상실하여 분노와 시기로 가득차게 되어 결국 멸망을 향하여 달려가고 만다.

 

본문 속의 에서는 자기를 축복할 아버지 이삭에게“내 아버지여 아버지의 빌 복이 이 하나 뿐이리이까 내 아버지여 내게 축복하소서 내게도 그리하소서”라고 울며 매달렸으나 야곱의 장자권 쟁취로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게 된 이삭은 자기의 입술로 하나님의 축복을 바꿀 수 없어서“내가 그를 너의 주로 세우고 그 모든 형제를 내가 그에게 종으로 주었으며 곡식과 포도주를 그에게 공급하였으니 내 아들아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으랴”라고 대답하였다.

 

이삭은 다만 장자의 축복권을 잃고 통곡하는 에서에게“너의 주소는 땅의 기름짐에서 뜨고 내리는 하늘 이슬에서 뜰 것이며 너는 칼을 믿고 생활하겠고 네 아우를 섬길 것이며 네가 매임을 벗을 때에는 그 멍에를 네 목에서 떨쳐버리리라”고 그의 운명에 대하여 예언하였을 뿐이다.

 

여기서 기름짐에서 뜨고 하늘의 이슬에서 뜬다는 말은 땅에서도 복을 받지 못하고 하늘의 복도 없다는 의미이다. 이처럼 하나님의 축복을 소홀히 한 자에게 내리는 하나님의 판결은 사랑하는 장자라 할지라도 냉혹한 것이다.

 

도토리 키재기

그렇다면 장자권이 무엇이기에 이처럼 에서는 통곡하였을까? 우리가 성경을 살펴보면 비록 야곱이 장자권을 쟁취하였다고 해도 그는 결국 도망자 신세가 되고 만다. 그는 사실상 아버지 이삭으로부터 재산을 하나도 물려받지 못하였다. 오히려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개나리 봇짐을 걸머지고 목숨을 위하여 도망하여야만 하였다.

 

이와같이 야곱이 쟁취한 장자권은 믿음의 조상의 후계 구도를 이어갈 영적인 축복인 것이다. 야곱은 비록 에서의 발목을 잡고 태어났으나 아브라함으로부터 언약된 하나님의 축복을 기업으로 받고 싶어하는 소망에 불타고 있었고 에서는 이와 반대로 세상의 물질적 축복에 급급하였다.

 

앞장에서 그는 이방 여인을 두 사람이나 아내로 맞이하였는데 이처럼 그는 아내를 맞는 일에도 부모의 의중과는 상관없이 자신의 욕정에 이끌리는대로 살아가는 음행의 사람이었다.

오늘날 한국 교단에서는 장자권 구도를 놓고 세력 다툼을 벌이는 교파간의 분쟁을 보면 참으로 한심스럽기 짝이 없다.

 

이 땅에서의 많은 교회를 세우고 목회자를 많이 배출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장자권을 이어받는 것이라면 만약에 재벌들이 교회 사업에 손을 대면 아무도 따라갈 교단이 없을 것이다. 진정한 하나님의 장자권은 이미 창세 전에 그의 부르심과 택하심 속에서 주께서 이끌어 가는 것이다. 나중 된 자가 먼저 되는 주께서 세우신 원리를 깨달아 도토리 키 재기에 연연할 것이 아니라 우리는 다만 각자에게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우리의 경계

이 문제는 오늘날 우리가 어떻게 생각해볼 수 있는가? 성경은 에서의 버림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하나님의 사랑과 기억하심으로 바벨론의 70년 포로 생활에서 돌아온 이스라엘이 하나님 앞에 온전한 삶을 얻지 못하고 또다시 패역한 생활로 빠져 버리는 이스라엘 민족에게 구약의 최후의 선지자 말라기를 통하여“내가 에서를 미워하였으며 그의 산들을 황무케 하였고 그의 산업을 광야의 시랑에게 붙였노라”고 말씀하심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멸시하는 제사장들을 경계하였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믿는 미리 택하신 자기 백성들의 모임에 대하여 어느 천사를 통하여“너희는 돌아보아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있는가 두려워하고 또 쓴 뿌리가 나서 괴롭게 하고 많은 사람이 이로 말미암아 더러움을 입을까 두려워하고 음행하는 자와 혹 한 그릇 식물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있을까 두려워하라 너희의 아는 바와 같이 저가 그 후에 축복을 기업으로 받으려고 눈물을 흘리며 구하되 버린 바가 되어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다”라고 거듭 경계하였다.

 

이 말씀으로 미루어볼 때 주의 오심을 고대하는 미리 선택받은 우리라도 자신의 믿음의 위치를 잘 지켜 성경 말씀을 벗어나는 경거망동을 하여 주의 영광에 참예하는 복에서 거절되는 자가 될까 두려워하여 아직 회개의 기회가 남아 있을 때 주의 긍휼 하심을 구하여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