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강해/창세기 강해

(창세기 26장-3) 차세대 크리스천 믿음의 종착역

이요나 2007. 2. 15. 13:54

(창세기 26장-3) 차세대 크리스천 믿음의 종착역

 

(창26:23-25)이삭이 거기서부터 브엘세바로 올라갔더니 그 밤에 여호와께서 그에게 나타나 가라사대 나는 네 아비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니 두려워 말라 내 종 아브라함을 위하여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어 네 자손으로 번성케 하리라 하신지라 이삭이 그곳에 단을 쌓아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거기 장막을 쳤더니 그 종들이 거기서도 우물을 팠더라

 

삼천포로 빠질 때

크리스천들은 가끔 왜 나는 이처럼 둔할까 하는 의문에 빠진다. 부산을 가다가 삼천포로 빠졌을 때 나오는 말이다. 그것도 지옥을 한참 헤매다가 더 이상 어쩌지 못할 때 간신히 하나님의 은혜로 빠져 나와서야 자신이 길을 잘못 들었음을 깨닫게 된다.

 

처음부터 알았으면 얼마나 좋았으랴 하는 생각도 들지만 이제라도 깨달았으니 참으로 다행이었다 하는 생각이 들 때가 많다. 그러나 이것도 잠시뿐 또 엉뚱한 길로 들어서기 일쑤다. 이럴 때마다 우리는 어리석은 질문에 빠지게 되는데 왜 하나님께서는 잘못된 길을 처음부터 막아주시지 않으시는가 하는 것이다.

 

이왕 나를 선택하셨으면 속 시원하니 주께서 세우신 계획대로 일사천리로 이끌고 가면 좋을 터인데…. 그러나 한편 생각해 보면 이것은 하나님께서 나를 인격적으로 대우하고 계시고 있다는 증거이며 나 또한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지음받은 인격체로써 하나님의 일에 동참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면 참으로 내 자신이 대견하기도 하고 위대한 생각이 든다. 과연 이러한 일을 누가 할 수 있으랴! 오직 모든 것에서 전능하시고 전지하신 여호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다.

 

이삭은 하나님의 물질적 축복으로 블레셋의 그랄 지역에서 거부가 되었다. 그래서 그들의 시기와 질투를 받게 되었고 급기야 그들의 왕으로부터 퇴출 명령까지 받았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쏟아 부으신 물질적인 축복에 빠져 그곳을 쉽게 포기하지 못하고 그 지역 일대를 전전긍긍하며 먹을 물을 위하여 아버지 아브라함이 파놓은 우물을 맴돌게 된다. 이들이 블레셋 목자들과 다툼을 하며 자기들이 파놓은 우물들의 이름을‘에섹’(다툼),‘싯나’(증오),‘르호봇’(넓은 곳)이라고 불러야했던 이삭과 그의 종들의 상황을 생각해 보라.

 

지금 우리의 모습도 흡사 그렇지 않은가? 많은 크리스천들이 무엇이 진정한 축복인지도 모른 채‘이렇게 되는 줄 믿습니다’‘저렇게 하면 복을 받습니다’라는 말을 따라 다람쥐 쳇바퀴 돌듯 돌고 있지 않은가? 나는 그러한 믿음 생활 속에서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물질적인 축복을 주신다는 것에 감사를 드린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자신의 삶이 안식에 들어있는가 생각해 보아야 한다. 인간은 물질적 축복 속에서 종교 활동의 타성에 빠지기 쉽다. 이렇게 될 때 우리는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과 다를 바가 없다.

 

니고데모의 모순

이삭이 블레셋 가운데서 우물 파기 전쟁을 하다 보니 참 기가 막혔었는가 보다.‘내가 지금 뭐하고 있는가’싶었나 보다. 지금 내가 먹을 것을 위하여 이처럼 일해야 하는가 싶었나 보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정신없이 반복되는 삶 속에서 땀을 흘리다가 자신의 처지를 발견하게 되면 누구나 한번쯤은 생각하게 되는 문제이다. 그러나 사실 이것이 세상 사람과 그리스도인이 다른점이다.

 

어느 날 저녁 무렵에 주를 찾아온 니고데모에게 주께서는“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하늘나라에 들어 갈 수 없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라”(요 3:5-6)고 하셨다. 니고데모가 누구인가?

 

그는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가는 종교와 정치 지도자였다. 그는 명예와 부를 누리고 있었다. 그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는 주께서 말씀하신 거듭남에 대하여 깨닫지를 못하였다. 그러나 후일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를 터득하고 동참하게 된다. 이 문제만큼은 세상의 지식이나 인간의 지혜로는 터득할 수 없는 일이다.

 

이것은 성경을 많이 읽고 예배를 많이 드렸다는 것만으로 능히 알 수 없는 것으로 각 사람을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비밀인 것이다. 이것은 인생의 삶의 고통 속에서 좌절당하고 실패하여 허망함에 빠져있을 때 하나님을 알고자 하는 심령의 탄식 속에서 오직 그를 구원할 능력자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으로 홀연히 깨닫게 되는 믿음의 경륜이다.

 

성경은 이에 대하여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하셨다. 이와같이 하나님이 인간을 다루시는 방법은 다르지만 믿음의 원리는 변하지 않는 언약 속에 있다.

 

창녀의 발견

요한 복음 4장의 사마리아 여인을 보자. 이 여인과 니고데모는 아주 대조적이다. 니고데모는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며 남자이며 지도자이고,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갖고 있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적을 목격한 자였다.

 

그리고 사마리아 여인은 이름조차 나타나지 않는 이방 여인으로 육정에 사로잡혀 남자를 여러 번 갈아치운 창녀와 같은 신세로 하나님에 대한 바른 지식도 갖지 못한 채 막연하나마 자기의 고통을 구속할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었다.

 

또한 그녀는 그리스도의 이적을 본 일도 없다. 그러나 그녀는 진정한 예배에 대하여 알고 싶어했고 그 예배에 대하여 바른 가르침을 받았을 때 그녀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받아들이는데 많은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또한 그녀는 주께서 자신이 그녀가 심령 속에서 갈망하던 메시야임을 밝히자 주저없이 그 좋은 소식을 이웃에게 알리려 뛰어나간다. 이처럼 세상은 썩어짐으로부터 자기를 구속할 자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나심을 고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정작 빛 가운데 살고 있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은 그 메시야를 고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표적과 세상의 지혜를 찾아 헤매고 있다.

 

아브라함의 브엘세바

어쩌면 이삭은 삶의 허망함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고민 속에서 아버지 아브라함의 삶을 더듬어 보다가 불현듯 스치고 지나가는 세미한 음성을 만났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하여는 인간에게는 어떠한 기준이 필요한데 그 기준은 자기의 생각이나 세상에서 찾을 수 없는 것이다.

 

그 기준은 하나님이 부르시고 자기의 이름을 나타내시고 삶 속에 함께 하시며 믿음의 경륜을 이루게 하신 택한 종들 속에 있는 것이다. 비록 이삭은 하나님의 말씀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여 헷갈리는 인생을 살긴 하였지만 믿음의 아버지의 삶을 그대로 답습한 것은 매우 잘한 일이다. 그 결과 이삭은 삶의 경륜 속에서 말씀을 깨닫고 아버지 아브라함이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던 브엘세바로 올라간다.

 

사실 하나님께서는 처음부터 그곳에서 기다리고 계셨었다. 이삭이 잠시 그랄에 가서 있으면서 자기 아버지에게 있었던 그랄에서의 일을 기억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던 브엘세바로 올라오기를 기다리고 계셨던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 못하고 많은 인고의 생활을 겪은 후에야 찾아 올라온 이삭에게 여호와께서는 그 밤에 나타나시어“나는 네 아비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니 두려워 말라 내 종 아브라함을 위하여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어 네 자손으로 번성케 하리라”고 하신 것이다.

 

이 얼마나 감격스런 말씀인가? 여기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종이라고 불러주셨다. 엘리에셀이 종으로서 아브라함의 후계자의 물망에 오를 정도로 성실하였듯이 아브라함은 인간으로서는 처음으로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의 위대한 종의 반열에 오른 것이다. 아브라함에 대한 하나님의 신뢰를 이보다 더 확실한 표현은 없을 것이다.

 

이 브엘세바는 과거 아브라함이 블레셋 왕 아비멜렉과 우물을 판 증거의 맹세의 장소이다. 그곳에는 아직 아브라함이 기념 식수로 심어놓은 에셀나무가 무성하게 버티고 있었다. 블레셋 왕 아비멜렉이 아브라함과 함께 하시는 여호와의 손을 보고 자기의 자손들을 위하여 하나님의 이름으로 아브라함과 불가침조약을 맺기 위하여 군대 장관 비골을 대동하고 나타났던 곳이다.

 

그 때 아브라함은 자기의 우물을 늑탈한 그들을 책망하고 아주 이참에 후일을 위하여 우물의 분쟁을 종식시키는 언약을 체결한 것이다. 오늘에서야 브엘세바로 올라온 이삭은 아마 블레셋 백성들과 우물의 소유권 문제로 전전긍긍하다가 아버지 아브라함 시대에 하나님의 이름으로 맺어놓은 언약을 기억하였는지도 모른다.

 

우리가 어느 사람의 뒤를 좇다보면 의미도 없이 그의 행동을 그대로 답습하게 된다. 내가 귀국하여 서울 갈보리채플을 개척하면서도 똑같은 경우를 겪어 왔었는데 처음에는 동경 호라이즌의 히라노 코오이찌 목사의 방법을 답습하였었고 후일 미국을 방문하면서부터는 척 스미스 목사의 목회 방법을 그대로 답습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교회 운영 방법과 운영 형태, 그리고 그들의 설교 방법과 목회 방법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모습을 닮아가려고 무던히 애를 써 왔다. 그런데 얼마 전에 와서야 홀연히 발견한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가장 큰 원인, 즉 하나님의 양들의 갈증을 영원히 해결할 생수는 오직 영생하는 하나님의 말씀 속에 있음을 발견한 것이다.

 

따라서 믿음의 차세대는 자기가 경험해 보지 못한 믿음의 길을 가기 위하여는 하나님이 택하신 믿음의 선진들의 이야기인 성경에 귀를 기울여야만 한다. 바울도 구약은 우리 앞에 당할 일의 거울이라고 하였다. 따라서 이삭은 자기 아버지 아브라함의 삶 속에서 함께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한 것이다.

 

회복되는 명예

이삭이 하나님의 뜻 가운데로 돌아오자 모든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기 시작한다. 블레셋 지역을 떠나기를 원했던 아비멜렉은 친구와 군대 장관을 대동하고“우리를 해하지 말라”는 조약을 들고 나온 것이다. 그들은 아브라함 때와 같이“하나님이 너와 함께 계심을 우리가 분명히 보았다”라고 증언하였다. 이에 이삭은 그들과 잔치를 벌이고 흔쾌히 맹세를 하였다.

 

만감이 교차되는 순간이었으리라. 오늘 우리가 살펴본 창세기 26장은 21장 하반부에 있었던 일을 그대로 복사하여 갔다놓은 것과도 같다. 지명과 인명, 그리고 방법에 이르기까지 너무 흡사하여 오해할 정도이다. 그러나 이 메시지를 통하여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우리 차세대 믿음의 사람들에게는 매우 중요하다.

 

우리가 무엇을 기준으로 할 것인가를 가르치는 부분이다. 창세기 26장은 우리에게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음미하여 그 뜻을 깨달을 것을 가르친다. 그리고 또 한가지는 우리 앞에 세우신 성경에 기록된 증인들의 삶의 모습을 통하여 하나님을 발견케 하는 것이다.

 

 이때 여기서 우리는 그들의 삶을 답습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삶 속에 살아서 숨쉬는 여호와의 언약의 말씀과 그들의 믿음 생활 속에 나타난 삶의 열매들을 통하여 현실의 문제에 적응하는 지혜를 얻어야 한다. 그러나 이삭에게 또 다른 근심이 다가오기 시작하는데 다름 아닌 두 아들들의 혼사 문제였다. 그의 장남 에서가 헷 족속의 딸을 둘이나 맞아들였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