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27장-1) 인생은 거짓말쟁이야!
(창27:23-24) 그 손이 형 에서의 손과 같이 털이 있으므로 능히 분별치 못하고 축복하였더라 이삭이 가로되 네가 참 내 아들 에서냐 그가 대답하되 그러하니이다
스스로 돕자?
서양 속담에“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라는 말이 있다. 이처럼 인간은 어떠한 일을 성취함에 있어서 자신이 그 일의 주동이 되고 싶은 욕망이 있다. 물론 이러한 심리적 현상은 인간을 발전하게 하고 진취적인 사람으로 만들기도 한다. 그러나 어떠한 일을 함에 있어 인간의 한계는 그 한계를 넘어서지 못함을 전제로 하여야 한다. 오늘 우리는 믿음의 어머니 사라와 같이 이삭의 아내 리브가가 아들 야곱과 함께 하나님을 도와서 그의 예언의 말씀을 성취해 드리려는 억지를 쓰고 있음을 본다.
오늘날 우리도 이와같은 일에 빠지곤 하는데 이것 또한 인간의 속성이라고 할 수 있다. 자기 성취 욕망과 조급함 그리고 교만함에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많은 사람들이 전도를 빨리 함으로서 주님이 빨리 올 수 있다는 생각에 빠지게 된다. 그래서 하나님이야 어떻게 생각하든지 말든지 우리의 생각과 계획으로 전도 프로그램을 만들어 세상 밖으로 나아간다.
그런데 대개 이러한 계획은 교회 성장이란 의미와 맞물려 있다. 여기서 우리는 과연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일을 성취하시는데 인간의 도움을 필요로 하시는가 하고 생각해 보아야 한다. 돕는다는 의미는 강한 자가 약한 자를 돕는 것이다. 따라서 전능하시고 전지하시고 스스로 계신 자 하나님은 누구의 도움도 필요없다.
어떠한 일을 하심에 그에게 있어서 새로운 일이란 없는 것이다. 그의 창조 사역은 6일째 되는 날 이미 다 끝난 것이다. 그는 이미 다 계획하셨고 다 이루셨다. 다만 한계 속에 살아가는 인간은 하나님께서 다 이루어 놓으신 부분 속을 그의 계획에 따라 살아가고 있을 뿐이다. 따라서 인간은 하나님을 돕는 자가 아니고,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일에 부름을 받아 동참할 뿐이다.
하나님께서 그의 영광을 위하여 미리 부르시고 택하신 사람들을 통하여 모든 일을 이루어 나가신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이삭은 이미 100세가 넘어서 눈이 어두운 상태였다. 그의 육신의 형제 이스마엘이 137세에 죽음으로 그 역시 죽음을 예상하고 이제 자신의 후계자 구도를 구축해야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두 형제가 태 중에 있을 때 전달된 하나님의 말씀을 망각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의 맏아들 에서를 불러 세워서 그를 축복해주려고 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을 망각할 때가 있다. 이삭의 눈이 어두운 것으로 보아 육체적인 기능이 서서히 마비되고 있었을는지도 모른다.
주께서도 눈은 우리 마음의 등불이라고 하셨는데 눈이 어두웠으면 그 마음의 생각도 흐려졌을 것이다. 그러나 에서에게“내 마음껏 네게 축복하리라”는 말속의‘마음’이란 의미는‘혼’(soul/히브리어 네페쉬)이란 뜻으로 하나님의 영적인 축복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이미 하나님의 축복은 야곱에게 내려진 상태이기 때문에 이삭의 뜻과는 관계없는 것이다. 만약 이삭의 축복으로 하나님의 언약이 바뀌어 버린다면 이삭은 하나님보다 위대한 자이고 하나님 위의 능력자가 되어야 한다. 따라서 이삭이 어떠한 축복을 하든지 간에 하나님의 예정과 작정은 변함없이 진행되고 성취되는 것이다.
여자의 대담성
이에 대한 리브가의 반응을 살펴보자. 리브가는 이삭의 말을 듣고 이것 큰일났다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눈까지 어두워질 정도로 쇠약해진 사랑하는 남편을 꾸짖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는가 보다. 아니면 이 말씀은 내게 주신 말씀이니까 자기가 도와드려야 한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리브가는 야곱을 불러들여서 하나님을 돕기 위한 공작을 꾸민다.
즉 믿음의 상속자 이삭의 축복을 받기 위하여 자기들이 이 부분을 성취시키는 도구로 생각한 것이다. 그녀는 야곱에서 염소의‘좋은 새끼’를 가져오라고 한다. 여기서‘좋은 새끼’라는 말은 두 마리의 새끼를 말한다.
그리고 리브가는 이삭이 좋아하는 별미를 만들어서 야곱에게 들려 보내기로 한다. 이때 야곱은 에서가 털이 많은 사람이라서 곧 탄로날 것을 두려워하여 그 일에 쉽게 찬성을 못한다. 야곱은 성취욕을 향한 질투의 화신이었지만 대담성은 없는 성격이었다.
이에 대하여 리브가의 대담성은 참으로 놀랄만하다. “너의 저주는 내게로 돌리리니 내 말만 좇고 가서 가져오라”고 한다. 이처럼 여자들은 상상치 못할 정도로 대담스러울 때가 있다. 여자들의 순발력과 센스 앞에는 남자들이 손을 들 수밖에 없다. 최근 사회 각계에서도 여성들을 선호하는 것은 여성들의 지혜를 창출해내는 순발력 때문인지도 모른다.
사실 여자는 남자를 돕는 배필로 지어졌기 때문에 남자의 부족함 내지 잘못을 거들어 줄 품성을 받았던 것이다. 선악과에 손을 대던 하와, 그리고 하갈을 아브라함의 침실에 넣던 사라의 대담성 못지 않게 리브가도 용감무쌍하기 그지없다.‘저주를 내게 돌리라’는 그녀 말을 생각해 보라. 그 얼마나 무서운 말인가? 이처럼 여인이 어떠한 일을 성취하기 위하여 내리는 결단은 매우 강인하다.
이제 리브가와 야곱은 합동으로 염소 새끼의 털로 무장하고 에서의 옷까지 걸치고 특별히 만들어낸 일품 요리를 만들어 가지고 이삭에게 나아간다. 여기까지는 리브가의 작품이다. 그리고 이제 야곱은 그 아버지 이삭에게 나아가서 천연덕스럽게“아버지의 마음껏 나를 축복하소서”하고 청한다.
이삭은 눈이 어두웠지만 이처럼 빨리 돌아온 아들이 의심스러웠는지“네가 어떻게 이같이 속히 잡았느냐”라고 다그쳐 물었다. 이에 대하여 야곱은“아버지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나를 순적히 만나게 하였다”라고 새빨간 거짓말을 한다. 그 거짓말에 하나님까지 동원시킨다. 이처럼 거짓말은 거짓말을 덮기 위하여 계속 거짓말을 만들어낸다.
지난 청문회 때 어느 정치가는 국회 연설에서 거짓말을 성립하기 위하여는 거짓말을 7번을 하여야 한다고 하였다. 최근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온 세상은 거짓말투성이가 되고 있어 요즘은 뉴스조차 식상해진다.
기독교인이 1천만 명이라고 하는 우리나라가 이처럼 거짓말 판이 되어 가는지 참으로 한심스러워진다. 이것은 우리의 육체 안에 아직 그리스도의 말씀과 성령 안에서 화합하지 못한 육체의 소욕이 살아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별수 없어!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언약을 받은 사람이라도 인간의 못된 성품이 있음을 보게 된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 이삭, 야곱 중에서 가장 인간의 속성을 리얼하게 표출하고 있는 것은 야곱이다. 그는 태어남으로부터‘찬탈자’즉‘사기꾼’이란 이름이 붙여졌으니 과연 그 이름 에 걸맞게 야비하고 거짓된 인간의 속성을 여지없이 발휘하고 있다. 이후 그의 삶에서도 우리는 세속적인 인간의 리얼한 속성을 발견하게 되는데 이것은 지금의 우리의 모습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인간의 속된 속성 중에서도 아브라함으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변하지 않는 것은 거짓말이다. 사단은 원래 거짓의 아비이다. 예수께서도“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음으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요 8:44)고 하셨다. 이 말은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자처하는 유대인들에게 하신 말씀이다. 이와같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에게도 2가지 속성이 있다.
인간의 육체 속에는 죄의 속성이 있어서 그 육체의 속성대로 살 때 사단의 지배를 받게 되고 성령의 지배를 받으면 영생을 누리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는 사단이 지배하는 세상과 하나님의 나라가 공존하고 있다.
모로가도 서울만 가자?
이삭은 아들 야곱에게 속아 넘어가서 그가 잡아온 별미를 먹고 그에게 축복하기 시작하는데 그 말이 참 가관이다. 그는 포도주로 흥을 돋우며 에서로 둔갑한 야곱에게 입맞추며 축복하기를“내 아들의 향취는 여호와의 복 주신 밭의 향취로다 하나님은 하늘의 이슬과 땅의 기름짐이며 풍성한 곡식과 포도주로 네게 주시기를 원하노라 만민이 너를 섬기고 열국이 네게 굴복하리니 네가 형제들의 주가 되고 네 어미의 아들들이 네게 굴복하며 내게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고 네게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기를 원하노라”고 하였다.
이것은 그의 뜻대로라면 에서에게 내려지는 축복으로 하나님의 계획하심과 다른 것이다. 사실 리브가가 하나님을 도왔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으면 하나님만 망신당할 뻔하지 않았는가?(그렇담 이건 어떻게 계산해야 하는지 머리가 복잡해진다) 그러나 잘잘못이야 어떻든 모로 가도 서울을 간 셈이 되었지만 여기서 우리는 이삭의 정신 상태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그가 과연 믿음의 조상으로 세운 아브라함의 절대 후계자인가? 그러나 오늘의 이 사건 속에서 우리는 믿음의 조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상징으로 나타난 순종의 본이 된 이삭이라도 이 땅의 모든 인간은 모두 잘못될 수 있다는 원리를 발견하게 된다. 그가 아무리 아버지 아브라함의 사랑과 믿음을 본받고 자라난 아들이라도 인간임에는 틀림없다.
따라서 이 땅의 인간은 성령의 도움없이 아무도 인간 속에 있는 죄의 속성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이에 대하여 바울은“너희가 영으로 살면 살 것이요 육으로 살면 죽을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그러니 신약의 시대에 살면서 예수를 영접하고 성령의 인침으로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우리는 얼마나 커다란 축복을 받은 자들인가? 이에 대하여 주께서도“여인에게 난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자는 없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가장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도다”라고 말씀하셨다.
또한 본문 속에서 우리가 알아두어야 할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 하여 선을 이룬다는 말씀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미리 아심 속에서 부르시고 택하셨기 때문이다. 이와같이 하나님은 자기가 세우신 일을 스스로 합당하게 이루어 가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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