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강해/창세기 강해

(창세기 26장-1) 차세대 크리스천, 그 문제점 분석(1)

이요나 2007. 2. 15. 13:59

(창세기 26장-1) 차세대 크리스천, 그 문제점 분석(1)

 

(26:1-6) 아브라함 때에 첫 흉년이 들었더니 그 땅에 또 흉년이 들매 이삭이 그랄로 가서 블레셋 왕 아비멜렉에게 이르렀더니 여호와께서 이삭에게 나타나 가라사대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고 내가 네게 지시하는 땅에 거하라 이 땅에 유하면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고 내가 이 모든 땅을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라 내가 네 아비 아브라함에게 맹세한 것을 이루어 네 자손을 하늘의 별과 같이 번성케 하며 이 모든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을 인하여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라 이는 아브라함이 내 말을 순종하고 내 명령과 내 계명과 내 율례와 내 법도를 지켰음이니라 하시니라 이삭이 그랄에 거하였더니

 

지식의 혼란

창세기 26장에서 우리는 매우 중요한 차세대 믿음 생활의 원리를 배우게 된다. 우리는 26장 전체 속에서 하나님의 통치하심과 인간의 순종, 즉 인간의 자유 의지적 동의에 대한 성경적 고찰을 하게 된다.

 

믿음의 세계는 우리가 경험해 보지 못한 세계이다. 이 땅의 모든 사람이 자신의 앞날과 운명을 예측할 수 없듯이 하나님의 계획 또한 예측할 길이 없다. 그러나 이 땅에서는 수천 년 동안 많은 선지식들이 하나님의 섭리와 인간의 존재와 그 정해진 일들을 알아내기 위하여 연구하고 궁리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노력은 인간의 역사와 그 역사 속에 나타난 천체 현상과 그에 따른 자연적 대응 현상들을 토대로 통계하고 사고한 것을 체계화한 것에 그칠 뿐이었다.

 

이원론적 뿌리를 내리고 있는 헬라 사상이나 동양의 유불선 즉, 도(道)와 덕(德)을 중심으로 체계화한 공자와 노자 사상, 주역이나 불교의 윤회 사상 등 이 모든 것이 결국 천체의 관측 범위와 인간의 사고적 존재 범위를 넘지 못한 철학적 학문과 사상일 뿐이다. 이러한 사상들은 현대인의 생활 속에서 지식의 팽창과 함께 무분별하게 영입된 검증되지 못한 형이상학이 되어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지적 공간을 혼란시키고 있다.

 

이들은 한결같이‘항상 있었던 것이 지금도 진행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그렇게 진행할 것’(It will be so of itself)이라는 우주관과 가치관으로 사람들의 생각을 미혹시키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우주론과 가치관들은 모두 창조주의 창조 섭리를 배격하는 영적 세력이 배후에 있음을 알아야 한다.

 

미혹하는 영의 세력

성경은 이에 대하여“먼저 이것을 알지니 말세에 기롱하는 자들이 와서 자기의 정욕을 좇아 행하며 기롱하여 가로되 주의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뇨 조상들이 잔 후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할 때와 같이 그냥 있다 하니 이는 하늘이 옛적부터 있는 것과 땅이 물에서 나와 물로 성립한 것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 것을 저희가 부러 잊으려 함이로다”(벧후 3:3-5)라고 지적하고 있다.

 

여기서 기롱하는 자들이란 주의 재림을 조롱하는 거짓 교사들을 가르친다. 앞으로 이러한 사상은 더욱 강렬하여져서 이미 교회 속에서도 장차 주의 재림으로 있을 이 땅에 대환란과 교회의 휴거를 부인하는 가르침이 만연될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성경은 교회의 완성 즉‘요한계시록’에 가까울수록 그러한 가르침을 시작한 뿌리들을 경계하며 그러한 영들의 가르침 속에서 스스로 자각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 그들은 또한 영원불멸의 세계를 추구하며 휴머니즘의 성취와 우주 만물 속에 놓여진 자연 섭리에 순응함으로 이 땅에서 파라다이스를 이룰 수 있다는 사상을 고취시키고 있다.

 

따라서 유불선 즉 동양 철학 사상은 불교의 윤회 사상과 함께 종말을 향하여 계속 진행되고 있는 하나님의 성취적 예정 프로젝트를 부인하고 원(圓)을 중심으로 돌고 도는 무한대 사상을 유포시키고 있다.

 

년 말에 김 용옥 교수가 EBS 강연에서 성경의 밀레니엄 사상에 도전하여 밀레니엄은 기독교도들이 예수라는 가상 인물을 중심으로 만들어낸 종교적 산물이라고 억지를 쓴바 있다.

그는 이에 한 술 더 떠서 세상은 동양 사상과 같이 십이지(十二支)와 십간(十干)을 중심으로 계속 순회할 따름이라고 말하므로 어리석음의 극치를 토해내며 백의 도포를 걸치고 스스로 신비에 쌓이고자 하는 종교 행위의 촌극을 빚어내고 말았다.

 

왜 흔드시는가?

본문 서두에 아브라함 때에 있었던 흉년이 다시 100년 만에 다시 있었음을 기록하고 있다. 오늘 나는 이 글을 보면서 백년마다 일어나는 기근이라면 차라리 낫겠다는 생각이 든다, 왜냐하면 지금의 우리는 매년 홍수다 가뭄이다 하여 곤욕을 치루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근대에 와서는 예측조차 할 수 없는 천재(天災)로 지구촌은 ‘엘리뇨’‘라니냐’로 몸살을 앓고 있다. 이제 이와 함께 빈번히 나타날 종말론적 천체적 징조들에 대하여 그들은 자기들의 이론들을 어떻게 변명해 나갈 것인지 그 귀추가 매우 궁금해진다. 평온 속에 불어닥친 가뭄으로 이삭은 하나님의 지혜를 놓쳐버리고 아버지 아브라함의 망령을 되살려내고 말았다.

가뭄이 들자 그는 우선 아버지 생전에 잠시 자리를 잡았었던 아비멜렉이 다스리는 불레셋의 땅 그랄 지역으로 내려갔다.

 

그러나 여러 상황이 미덥지 못하여 다시 애굽으로 내려가려고 하였다. 이때 하나님께서 그에게 나타나“애굽으로 내려가지 말고 내가 네게 지시하는 땅에 거하라”고 하셨다. 지금 이삭 앞에 나타나신 하나님은 이삭이 모리아 산에 제물로 드려질 때 나타나신 이후로 이삭에게 처음 등장하신 것이다.

 

성경을 살펴보면 믿음의 조상 즉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중 그 삶에 대한 이야기가 가장 적게 기록된 것은 이삭이다. 이처럼 연단으로 격동의 믿음 생활 속에서 온전한 믿음의 경륜을 터득한 개척자의 차세대는 비교적 평안한 삶을 누리게 마련이다. 왜냐하면 개척자가 세상의 모든 바람의 방패막이가 되었기 때문이다.

 

우리말에 부자가 망해도 3년은 먹을 수 있다는 말이 수긍이 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믿음을 이어갈 차세대로 하여금 평안에 안착하도록 내버려두시지 않으신다. 이 세상 주관자가 호시탐탐 하나님의 백성을 노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방법은 우리가 환란을 당하지 않게 하시는 것이 아니다. 도리어 환란 속에서도 믿음을 잃지 않고 지키게 하시는 것이다.

 

주께서 베드로에게“시몬아 사단이 너를 밀 까부르듯 청구하였으나 내가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라고 말씀하셨다. 이와같이 주께서는 환란 가운데서 하나님의 지혜를 구하는 우리의 믿음을 요구하신다.

 

말씀의 오해

여기서“거하라”는 의미는‘정착하라’는 의미가 아니고,‘잠시 머물다’라는 의미이다. 하나님께서는“이 땅에 유하면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겠다”라고 하시며 과거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던 언약을 상기시키셨다.

 

“내가 이 모든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내가 네 아비 아브라함에게 맹세한 것을 이루어 네 자손을 하늘의 별과 같이 번성케 하며 이 모든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을 인하여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라”여기서‘네 자손’이란 물론 예수 그리스도를 지칭하는 말씀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삭에게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이 불변하심을 상기시키는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아직 이삭에게는 후손이 없었고 자기 생전에 이와같은 환경 적 시련을 경험하지 못한 이삭으로는 그 환경으로부터 오는 두려움 때문에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을 상실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삭에게 그 언약을 상기시키신 데는 다른 이유가 있었다. 이는 하나님께서는 다시“이는 아브라함이 내 말을 순종하고 내 명령과 내 계명과 내 율례와 내 법도를 지켰음이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이것은 거저 얻은 은혜가 아니라 아브라함의 의지적 순종과 동의가 포함되었음을 상기시키는 말씀이다. 사실 계명과 율례와 법도는 아브라함 이후 400년이 지나서 모세를 통하여 시내 산에서 주어졌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말씀에 대한 순종의 삶 속에는 이미 그러한 율법과 계명이 다 포함되었던 것이다. 이삭에게 오늘 이 말씀을 주신 것은 지구가 떠나가더라도 인간의 삶을 이끌어 가시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오직 그 말씀에 의지하여 살아갈 준비가 되어 있는가를 물으신 것이다.

 

불순종의 시작

그러나 이 말씀을 받은 이삭의 상태를 살펴보자. 6절에“이삭이 그랄에 거하였더니”라고 기록되었다. 여기서‘거하였다’라는 말은‘정착하였다’라는 말이다. 우리는 여기서 왜 이삭이 이러한 실수를 저질렀을까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이것은 이삭은 아브라함의 믿음 생활 속에서 함께 살아오면서 아버지의 믿음을 답습해 왔지만 실제로 이삭은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을 경험해 보지 못한 채 아버지의 믿음과 축복을 물려받은 것이다.

 

오늘날도 부모의 믿음을 물려받은‘크리스천 마마보이’들이 많다. 아브라함이 온전한 믿음의 사람이 되기까지 오랜 연단이 있었듯이 오늘의 초대 믿음을 가진 사람들도 그 믿음 생활의 축복을 받기까지는 말할 수 없는 연단의 세월을 답습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자녀들은 그 연단의 방패막이 속에서 부모의 뒤를 따라왔기 때문에 그들 앞에는 축복이란 글자만이 있었을 뿐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믿음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뿌리를 내려 온전해지기를 원하시기 때문에 그들에게 자기 부모들의 믿음을 상기시키며 그들이 축복을 받은 것은 말씀에 대한 온전한 순종이 있었음을 깨닫게 한다.

 

이삭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으나 그 말씀의 진정한 의미를 음미하지 못한채 현실 환경에 적응하려고 급급했던 것이다. 즉 그는 하나님의 말씀의 뜻을 온전히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왜냐하면 8절에 다시“이삭이 거기 오래 거하였더니”라고 기록되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그가 애굽으로 떠나기로 마음을 먹었을 때 그에게 내가 지시한 곳에‘잠시 머물러 있으라’고 하셨던 것이다. 그런데 그는 그 말씀의 의중을 깨닫지 못하고 그곳에 눌러 앉아 버렸다.

 

왜 인간을 닮으려고 하는가?

말씀에 대한 온전한 이해가 이루어지지 않을 때 그것은 결국 불순종으로 이어지고 그 불순종은 결국 하나님과의 단절을 야기하게 되어 삶 속에서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받지 못함으로 결국 세상의 두려움에 빠지는 것이다.

 

성경은“두려움 뒤에 오는 것은 형벌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삭의 불순종은 어떠한 결과를 낳고 말았는가? 그는 세상 가운데서 삶의 두려움을 느낀 나머지 자기 아버지 아브라함과 똑같은 실수를 저지르게 되는데 자기 아내를 자기 여동생이라 하여 생명을 보전하려 한 것이다. 세상 말로 그 아버지의 그 아들이 되고 만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영향력을 벗어난 하나님의 사람들의 전형적인 삶의 모습이다. 결국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깨닫지 못한 결과 불순종을 낳게 되고 그 결과 하나님과 교제가 단절된 인간은 두려움에 싸여 결국 자기 아버지의 행함을 답습하게 된다.

 

최근 많은 교회 속에서도 하나님의 말씀보다 자기 지도자를 닮으려는 일들이 있는데 그들의 결과가 어떻게 될 것인지는 뻔하다. 결국 이삭은 어떻게 되었는가? 그는 거짓말이 탄로나서 아비멜렉 왕으로부터 책망을 받고 만다. 이것은 하나님의 사람의 잘못 때문에 하나님의 이름이 이방 가운데서 망신을 당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