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강해/창세기 강해

(창세기 25장-2) 후계자의 기준은“ZERO"

이요나 2007. 2. 15. 14:03

(창세기 25장-2) 후계자의 기준은“ZERO"

 

(창25:21-23) 이삭이 그 아내가 잉태하지 못하므로 그를 위하여 여호와께 간구하매 여호와께서 그 간구를 들으셨으므로 그 아내 리브가가 잉태하였더니 아이들이 그의 태 속에서 서로 싸우는지라 그가 가로되 이같으면 내가 어찌할꼬 하고 가서 여호와께 묻자온대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는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더라

 

하나님의 자결권

우리가 배우는 이 부분은 하나님의 택하심과 관련하여 신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다. 하나님의 성품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있다면 자결권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어떠한 일을 결정하실 때에 모든 것을 자기 스스로 결정하시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지음을 받은 인간도 그러한 성품이 있어서 모든 것을 스스로 결정하게 된다.

 

이것을 신학적인 용어로‘자유의지’라고 하는데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도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부르신 부르심에 인간의 의지적 선택이 필요한 것이다. 따라서 모든 인간을 위하여 준비하신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도 인간의 의지적 선택으로 동참하도록 하신 것이다. 이것 자체로 보아도 하나님은 공평하심이 틀림없고 우리를 인격적으로 대하고 계신 것이다.

 

믿지 않는 사람들이 늘 하나님의 불공평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데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깊이 알면 알수록 그분은 공평하시고 사랑이시며 은혜를 주시기 원하시며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축복하시되 그 축복은 영원무궁한 것이다. 바울은 예정론과 관련하여 우리에게 하나님의 선택적 축복을 설명할 때 이 부분을 들어서 설명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동역자로 사람을 부르실 때 그것은 그 사람의 어떠한 행위와 성품에 기인한 것이 아니라 이미 그가 태어나기도 전에 선택하신 것이다. 말라기는 이에 대하여“여호와께서는 에서는 그의 형이었어도 내가 야곱을 사랑하였고 에서는 미워하였다”라고 증언하고 있다. 그러면 이러한 기준은 어디에서 오는 것인지 살펴보도록 하자.

 

전지(全知)와 미리 아심

인간이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에 대하여 이해하지 못할 때 많은 오해를 갖게 되어 잘못된 결론을 짓게 된다.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에 대하여 성경은 명확히 기록하지는 않았지만 성경 전체의 기록과 그 흐름을 통하여 우리는 그의 뜻을 알 수 있다.

 

이 부분은 로마서 8장에 언급된 바와 같이“미리 아심”이라는 전제하에 이루어지는 주권적 선택이다. 또한 미리 아심뿐이 아니라 전지하심과 전능하심을 전제로 하고 있다. 인간은 한계 속에 있어서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이해하지만 하나님은 전지하시기 때문에 모든 것을 임의로 미리 아시며 정하실 수 있는 것이다. 그는 누구에게 가르침을 받으실 필요도 없으시며 그에게는 새로운 것도 없다. 그의 창조 사역 속에서 이루어지지 않은 것은 없다는 전제하에서 이 땅의 모든 일을 생각해야 한다.

 

바울이 말한 바“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의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다”라고 하심과 같이 하나님의 신적 선택, 즉 예정은 인간의 도움이나 선택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오직 하나님의 미리 아심과 예정하심에 따라 스스로 하시는 것이다. 이 예정 교리에 관하여는 교파간에 많은 논란이 야기되고 있는데 이것은 인간의 모든 사고와 능력을 제한되어 있는 범위 속에서 하나님의 진지하심과 미리 아심을 이해하려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내가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겼다”라고 말씀 하셨고,“내가 부른 자를 의롭다 하였고 또 영화롭게 하였다”라고 하셨다. 또한 하나님이 부르신 자들을 누가 대적하며 누가 송사 하리요 라고 하셨다. 그러나 구원에 관한 한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자유 의지적 동의를 요구하신다. 따라서 구원받을 인간이 미리 예정되어 있음에 관하여는 논란의 여지가 많다.

 

어떤 자를 선택하는가?

요한복음에서 주께서도“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과실을 맺게 하고 또 너희 과실이 항상 있게 하려함”(요 15:16)이라고 하셨다. 그러면 어떤 이들의 말과 같이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구원하셨을진대 우리가 구태여 전도를 하여야 할 바가 무엇이냐 생각하겠지만 그것은 그렇지 않다.

 

하나님에게는 예정이 안된 일이 없다고 보아야 할 것이나 우리 인간의 구원에 관하여는 인간의 선택의 여지를 주신 것이다. 따라서 그의 부르심에 인간의 의지적 선택으로 그의 완성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이다.

 

만약 어떤 사람이 당신을 택하였고 나를 택하지 않은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느냐고 묻는다면 그것은 아주 간단하다. 그것은 나는 예수를 믿고 있고 당신은 예수를 믿지 않는 것으로 쉽게 구분된다. 하나님의 사랑의 목적은 심판이 아니고 그 아들의 이름으로 세상을 구원하시는 것이다.

 

이러한 은혜의 문은 항상 열려 있어서 사람이 마음을 열고 그의 이름을 영접할 때 그는 곧 하나님의 자녀로 입문되는 것이다. 이는 요한복음에“내게 오는 자를 결코 내어쫓지 아니하리라”(요 6:37)고 기록됨과 같다. 이와같이 하나님의 선택은 그의 전지하심과 미리 아심속에 인간의 책임의 여지를 두셨기 때문에 하나님이 부르시면 인간은 응답하여야 하는 것이다.

 

볼품없는 완전함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어떠한 자를 선택하실까? 성경이 증거하는 하나님이 선택한 후계자의 기준은‘ZERO’이다. 그렇다면 야곱을 선택한 기준은 무엇이었을까? 이에 대한 성경의 대답은“하나님 마음이다” 인간은 이 문제에 대하여 알 이유도 간섭할 이유도 없다.

 

다만 하나님의 택하심만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나님이 선택한 사람이 어떠한 조건을 갖추어야할 이유는 하나도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 자신이 시작이고 모든 것을 이루시는 능력이 되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하나님의 기준과 관계없이 이삭은 쌍둥이라도 장자인 에서를 선호하였다. 왜냐하면 인간은 어떠한 기준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에서는 기록된 바와 같이 그는 붉고 털이 많은 외형적이고 호탕하며 강인한 기질의 소유자였다. 그리고 그는 늘 사냥을 즐기며 장남으로 뽐내며 자기의 육신의 정욕대로 삶을 즐겼다.(히 12:16) 이에 비하여 야곱은 태어남으로부터“발뒤꿈치를 잡은 자”라는 이름을 가진 자로 후일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찬탈자’라고 불렀다.

 

호세아 선지자가 그에 대하여“야곱은 태에서 그 형의 발뒤꿈치를 잡았고 또 장년에 하나님과 힘을 겨루어”(호 12:3)라고 증언함과 같이 그는 질투심과 투지력의 소유자로 완벽주의자 아니 결백주의자였다.

 

신약의 산상수훈에서 주께서는 이러한 자를 마음이 청결한 자라고 칭하셨다. 성경의 전후 기록을 살펴보아 그는 많은 생각에 집착하는 성격의 소유자임이 틀림없다. 성경 번역자들이 야곱을 가리켜 “장막에 거하는 종용한 사람”이라고 하여 그를“평범한 사람”(Plain) 혹은“조용한 사람”(quiet)이라고 하였지만 이 단어가 원어상으로는 욥을 가리켜“순전하고(perfect)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로 쓰인 단어와 같은 것으로 보아“종용한”은 오히려“온전한”(perfect) 혹은“성숙한”이란 의미가 더 정확할 듯 싶다.

 

따라서 야곱은 부모를 통하여 하나님의 약속에 대하여 배우며 가슴에 새기며 그 축복을 사모하여 이미 어머니에게 주어진 그 축복의 예언을 성취하기 위하여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았을 것이다.

 

기회를 노리는 자

기회를 모색하는 자에게는 항시 기회가 있기 마련이다. 우리는 호시탐탐 뱃속에서 리브가에게 미리하신 하나님의 약속을 수행하려는 야곱을 보게 된다. 사냥을 나가서 시장기에 허기진 에서의 코앞에 그가 좋아하는 팥죽을 쑤어 놓고 기다리고 있는 모습을 생각해 보라. 얼마나 치밀한 작전인가? 우리는 여기서 다시 한번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사람들의 조급한 생각을 보게 되는데 이 일은 사라와 아브라함에게도 있었던 일이다.

 

그들이 하나님을 돕고자 하여 결국 이스마엘을 낳지 않았던가? 그러나 오늘의 입장은 그때와는 다르다. 그는 차남이기는 하지만 이미 뱃속으로부터 하나님의 계시를 받은 터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조급함은 다시 그의 어머니 리브가와 합작하여 아주 완전무결하게 완성하고 마는데 하나님은 자신이 계획하신 일을 꼭 인간의 힘을 빌어서 완성시키시는 분이신가 생각할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그는 전지하신 하나님이 될 수 없다. 전능이란 칭호도 어울리지 않는다. 이러한 모순은 결국 인간의 조급함과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부족할 때 일어나는 것이라고 하겠다.

오늘날에도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한 채 인간의 힘으로 그의 계획을 도우려고 많은 땀을 흘리고 있는데 과연 하나님은 인간의 땀을 필요로 하고 계신 것일까?

 

그러나 어찌되었든지 여기서 에서는 야곱에게 태어남으로부터 주어진 장자권을 팔고 만다. 이에 대하여 성경은“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경홀히 여김이었더라”(창 25:34)고 기록하고 있다. 이 말씀은 장자의 직분이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권위임을 의미하며 아브라함의 혈통에 있어서의 장자권은 육체적 명분이 아니라 믿음으로 그의 나라를 이룩하는 영적인 상징이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 이러한 현상은 여러 번 나오게 된다. 즉 이것이 육신의 장자권을 의미하지 않는 증거로 셋이나 이삭, 야곱 그리고 유다와 다윗도 첫 아들은 아니었다. 그러나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기고 후일 자기가 동생 야곱에게 하나님의 축복권을 빼앗긴 것을 알고 후회하며 통곡한 일을 가리켜 히브리서 기자는“한 그릇 음식물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있을까 두려워하라 너희의 아는 바와 같이 저가 그 후에 축복을 기업으로 받으려고 눈물을 흘리며 구하되 버린 바가 되어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다”라고 기록하였다.

 

그는 회개하기 위하여 눈물을 흘린 것이 아니라 축복을 얻기 위하여 눈물을 흘렸던 것이다. 그러면 이러한 선택의 기준은 어디에 있을까? 그것은 물론 최고의 승리자에게 주는 것이다. 하나님의 전지하심과 미리 아심은 인생의 삶 전체를 모두 아시기 때문에 누가 승리할 것인지를 아시고 계신 것이다. 우리가 달리기를 할 때 누구에게 상금을 주겠는가? 오직 앞에 있는 상금을 향하여 줄기차게 달려와 상주실 자 앞에 선 최고의 승리자에게 주어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