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30장-2) 3대째 신앙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창30:31-32) 라반이 가로되 내가 무엇으로 네게 주랴 야곱이 가로되 외삼촌께서 아무것도 내게 주실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하여 이 일을 행하시면 내가 다시 외삼촌의 양떼를 먹이고 지키리이다 오늘 내가 외삼촌의 양떼로 두루 다니며 그 양 중에 아롱진 자와 점 있는 자와 검은 자를 가리어 내며 염소 중에 점 있는 자와 아롱진 자를 가리어 내리니 이같은 것이 나면 나의 삯이 되리이다
나도 크고싶어서리
야곱이 마누라 둘을 얻기 위하여 14년을 무임 봉사하고 나니까 이제 인생이 허무해졌나 보다. 본의 아니게 두 명의 첩까지 거느리게 되었고 그 속에서 자식새끼는 어느덧 열둘이나 낳았으니 먹고 살 일이 캄캄했을 것이다. 철모르는 새끼들은 점점 커 가는데 모아둔 재산이라고는 쥐뿔도 없으니 밤이면 밤마다 고향 생각이 절로 났을 것이다.
사랑하는 라헬이 요셉을 낳게 되자 더 이상 이대로는 살 수 없다고 생각한 야곱은 라반에게 이제 고향으로 돌아가야겠다고 마음을 털어놓는다. 그러나 14년 동안 라반을 지켜 본 야곱은 라반이 쉽사리 자기의 딸들을 놓아줄 것 같지 않아서“내가 어떻게 외삼촌을 섬겼는지 아시지요”라고 사정을 한다. 이미 라반은 야곱이 온 후로 많은 축복을 받아서 엄청난 부자가 되었다.
본문에“내가 깨달았다”라는 말은 내가‘점쟁이를 통하여 알아본 결과’라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 그래서 라반은 야곱을 어떻게 해서라도 붙잡아 두려고“네가 사랑스럽게 여기거든 여기 거하라 네가 정하는 품삯을 내가 주리라”고 야곱을 어른다.
라반의 머리 속에는 지난번과 같이 야곱이 성큼 7년의 조건을 걸어올 것을 예상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야곱의 머리는 자기의 수를 능가하지는 못할 것이라고 자만하고 있었다. 즉“야곱, 너는 결코 나를 이길 수 없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방법좀 연구해 봐!
라반의 머리가 이에 미치자 야곱은 이 때다 하고“내가 올 때 삼촌의 재산이 별 볼일 없었으나 이제 두 떼가 된 것은 하나님께서 나의 공력을 따라 축복한 것이지요”라고 자기가 복 덩어리임을 은근히 자랑하며 나도 집을 이루어야 할 것 아니냐고 자기 속을 내비친다.
참으로 고수들의 머리 싸움이다. 서로 자기의 속을 감춘 채 줄다리기를 하는 것이다. 이쯤 되자 라반은 본격적으로 협상을 제기한다.“내가 무엇을 주랴?”상대를 알면 무엇이 두려우랴! 너 정도는 날고 뛰어봐야 내 상대가 안 된다는 뜻이다. 그런데 야곱이 꺼내놓은 흥정은 생전 듣도 보도 못한 조건이 아닌가. 정상적인 사람의 머리로는 도저히 납득이 안 되는 조건이다.
야곱은 눈에 있는 것을 놓고 흥정을 하는 것이 아니라 아직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을 놓고 흥정을 하는 것이다. 라반은 먼저처럼 기간을 정할 줄 알고 네가 정하는 대로하리라 약속을 하였던 것인데 야곱이 전혀 생각지 않았던 방법을 들고 나온 것이었다.
오늘 내가 삼촌의 양들 속에서 아롱진 것과 검둥이와 점박이를 골라내어 하얗고 잘생긴 놈만 맡아서 기를 테니까 만약 그 새끼 속에서 검고 얼룩지고 점박이인 놈들이 나면 모두 달라는 것이다. 아마 라반은 야곱의 머리가 어떻게 된 것이 아닐까 싶었을 것이다.
아직 야곱은 콩 심은데 콩 나는 법칙을 터득치 못한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것은 생각할 필요조차 없는 흥정인 것이다. 라반은 기뻐서 어쩔 줄 모르며 아들들을 불러서 양의 떼 중에서 검둥이와 점박이와 아롱진 것을 가려내서 야곱과 사흘 길 떨어진 곳에서 특별 관리하게 하였다. 아마 라반의 아들들도 야곱이 14년 동안 4명의 마누라 등쌀에 머리가 어떻게 된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제 세월이 가면 갈수록 자기들은 부자가 될 판이다.
관찰하고 연구하여
그러나 그들의 계산은 오산이었던 것이다. 그가‘멘델의 법칙’ 즉‘우성과 열성의 법칙’을 미리 알았다면 아연실색하였을 것이다. 그렇다고 야곱이 수천 년 후에나 멘델에 의하여 터득될 지혜를 깨달은 것도 아니다. 그러면 야곱은 어떤 생각에서 자신있게 이런 제안을 할 수 있었을까? 우리는 그가 14년을 라반의 양들을 쳤음을 알고 있다.
야곱은 오랜 세월동안 양들을 치면서 양들이 교배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 속에서 목동 야곱이 터득한 것은 흰 양끼리 교배한 속에서도 검둥이와 점박이가 나온다는 것이다. 또한 얼룩진 것끼리 교배를 하였는데도 흰둥이가 나오지만 그 확률에 있어서 검고 아롱지고 점박이인 것들이 우세함을 발견한 것이다. 또한 야곱은 힘 좋고 싱싱한 놈들이 좋은 새끼를 낳는 것을 알았다. 그리나 더 중요한 것은 양들이 교미를 시키기 위해서는 양들에게 발정을 시켜야 하는 것이다.
자기 마누라들이 사랑을 탈취하기 위해 잠자리 싸움을 하였듯이 어쨌든 이 짐승 놈들을 발정시켜야 교미를 시킬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오랜 경험 끝에 짐승의 최음제를 발견하였는데 바로 그 발정 재료가 버드나무와 살구나무와 신풍나무 푸른 가지의 진에서 나는 냄새였던 것이다.
그래서 야곱은 버드나무와 살구나무와 신풍나무의 껍질을 벗겨서 하얀 진물이 흐르게 하여 양들이 물을 먹으로 오는 개천 앞에 갖다 놓은 것이다. 양들이 물을 먹으러 올 때 그 나무의 진에서 나는 냄새를 맡고 발정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경험과 체험으로?
아마 이러한 일들을 알아내는 데는 자신의 부부 생활도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이미 그는 열 두 명의 자녀를 낳지 않았는가? 더구나 라헬은 합환채의 최음 효과를 경험하지 않았던가? 어떤 학자들은 야곱이 나무의 껍질의 흰 무늬를 보게 한 일을 놓고 태중 표시(Prenatal Marking)가 있다고 말한다. 태중 표시란 임신 중에 어떤 것을 보게 하여 생각하게 되면 그 본 모습대로 잉태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본문 38절의‘새끼를 밴다’라는 히브리어“야함”은‘발정하다’라는 의미인 것이다.
그러나 야곱은 14년의 목자 생활과 인생 여정 속에서 짐승의 발정 과정과 수천 년 후에 발견될 멘델의 법칙을 터득한 것이다. 이처럼 야곱은 오랜 세월 속에서 양들의 생육과 번성하는 과정을 세밀히 관찰하는 훌륭한 목자가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야곱은 이 중대한 결정을 자신의 경험에 의존한 것만은 아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터득한 지식은 어디까지나 통계일 뿐 꼭 그렇게 된다는 보장이 없기 때문이다. 생명의 탄생이 빵 틀에서 찍어내듯이 되는 것이 아닌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야곱은 어떻게 그처럼 당당한 모험을 할 수가 있었을까? 야곱은 사실 꿈속에서 이미 하나님의 계시를 받았던 것이다. 우리가 다음 장에서 배우게 되겠지만 야곱은 자기 아내들을 불러내어서 고향으로 돌아갈 계획을 의논한다.
기기서 야곱은 그 동안에 이루어진 일들에 대하여 꿈에 하나님의 사자가 나타나“네 눈을 들어 보라 양 떼를 탄 수양은 다 얼룩무늬 있는 것 점 있는 것 아롱진 것이니라”고 말하셨다고 증거하였다.
이삭도 그랬었지?
레레이 문제는 오늘날 우리에게 커다란 신학적 메시지를 제공한다. 왜냐하면 인간은 체계화된 지식과 그 지식을 바탕으로 경험되고 체험화된 통계를 중요시하고 절대시하는 속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세상의 모든 철학과 학문의 체계는 여기서 출발한다. 또한 이 땅의 모든 종교도 이러한 범주를 벗어날 수는 없다.
우리가 창세기 26장에서 이삭이 자기 아버지의 믿음의 바탕을 그대로 답습하며 방황하는 모습을 살펴보았다, 물론 이삭은 과거 블레셋 땅에서 성공적 삶을 살았던 아버지 아브라함의 행로를 답습하므로서 어느 정도 안정된 삶을 누릴 수 있었다. 그러나 세상으로부터의 삶의 근본적 문제를 해결해 내지는 못하였다. 이삭은 그것을 터득하기까지 오랜 세월 블레셋 목자들과 우물 다툼을 하여야 했다.
그는 성경 속에서‘브엘세바’에 나타난 하나님을 찾아내고 그리로 올라가서 하나님을 찾았다. 이삭은 하나님의 언약을 믿는 인간의 삶 속에 말씀으로 살아계시는 믿음의 원리를 터득한 것이다.
즉 믿음의 원리는 같으나 각 사람에게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은 다르다는 것을 터득한 것이다. 오늘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다시 공부한 셈인데 이처럼 하나님께서 인간을 섭리하시고 다루심에 있어서 기존된 어떠한 방법을 쓰시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주권 속에서 하나님의 계획과 뜻을 이루어 나가시는 것이다.
냉수 마시고 속 차리자!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 교회 부흥에 성공한 방법을 답습한다. 교회 성장을 목적으로 한 성령 운동이라는 미명 아래 예언이다, 방언이다, 다락방이다, 새벽기도이다, 거룩한 웃음이다, 금식기도이다 등등. 우리 교회사 속에 쏟아져 나온 교회 성장 히트 상품들은 그 종류에 있어서도 다양하다.
아직 한국 교회에서 히트하지 못한 것이 있다면 갈보리채플 말씀운동이다. 이처럼 모든 방법을 얻기 위해서는 머리를 싸매고 뛰어다니면서 성경 속에서 해답을 찾자는 데는 모두 시큰둥한지 모르겠다.
어느 목사님이 나에게 강해 설교 노하우만 모두 전수해 줄 수 없느냐고 한 일이 있었다. 글쎄 나도 그런 방법이 있었다면 이처럼 매일 책상 앞에서 성경책을 파고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내가 경험한 바로는 주께서는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성경을 가르칠 때) 역사하신다는 것이다. 이것은 야곱이 라반에게 제안했던 것과 같아서 하나님의 계획하심과 역사하심에 의하여 미래에 이루어질 일이지 지난 과거 속에서 미리 가져 올 수 있는 구체화되고 체계화된 통계 이론이 아닌 것이다.
즉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계신 것이지 죽은 사람과 함께 장사된 사장된 기록문서가 아닌 것이다.(따라서 성경은 기록 문서라 해도 오늘을 위한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인 것이다) 만약 이것이 사중복음 또는 오중복음과 삼박자 공식이었다면 나는 벌써 졸업하고 종쳤을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이미 오중복음과 삼박자를 답습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모든 교회는 모두 대형 교회가 되어있어야 한다.
한국 교회는 아직도 예정론이다, 불가항력적 은혜다, 다락방 전도다, 열린 예배다, 새벽기도와 금식기도다, 그리고 부흥 전도집회, 신유은사집회, 예언집회, 인간 심리학 상담 등의 과정 속에서 방활을 하고 있는 상태다.
그러나 이제는 그러한 것들이 더 이상 통하지 않는 바다 끝에 와 있다. 만약 이런 것들을 통해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온전하고 튼튼한 양들을 낳을 수 있다고 결론짓는 양반이 있다면 그 사람이 누구라 해도 하늘에서 내리는 벼락을 맞을 것이다.
성경은 말씀하신다.“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라” 이와같이 창세 전에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께서는 각 사람을 부르신 뜻과 그의 지혜로 미리 아심을 따라 준비하시고 이끌어 가는 것이다.
그러니 선지자를 꿈꾸는 사람들아! 일찌감치 냉수 먹고 속차리자. 그리고 성경 속에서 예수님을 만나자. 우리를 부르신 분이 계시니 때가 이르면 주께서 강권하시리라.(오해하지 마시기를‥위에서 지적한 내용은 그런 것이 우리 믿음 생활에 필요 없다는 것이 아니다. 다만 그것은 우리 믿음 생활의 바탕이 되어야 하는 것이지 교회 성장을 위한 종교 활동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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