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22장-4)육신의 끝 그리고 또 다른 세계의 시작
(22:15-18)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두 번째 아브라함을 불러 가라사대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 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를 아끼지 아니 하였은즉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셨다 하니라
언약의 확증
본문에서 또다시 여호와의 사자가 아브라함을 부르고 있다. 성경은 두 번째라고 기록했다. 이 두 번째라는 의미 속에서 우리가 살펴보아야 할 단어는‘여호와의 사자’이다. 앞에서 이스마엘과 함께 광야를 헤매던 하갈에게 나타난 분은‘하나님의 사자’였다. 먼저도 잠깐 설명을 하였지만“여호와”라는 의미는‘∼의 무엇이 되신 분’(the becoming one)이란 의미를 내포한다. 즉‘여호와는 그의 백성의 그 무엇이 되신 분’이란 뜻으로 장차 이 땅과 믿는 모든 사람들을 구속하실 제2위의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호칭이다. 또한‘하나님의 사자’란 총체적 주관자이신 하나님“엘로힘”이신 것이다.
우리는 12절과 16절의 말씀 속에서 삼위일체의 하나님을 발견하게 된다. 왜냐하면 12절에서“네가 네 아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라는 말씀 속의‘내게’는 예수 그리스도를 지칭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 여기서 하나님 자신을 가리켜 맹세를 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우리가 누구와 맹세를 할 때에는 자기보다 큰 자를 세워두고 맹세하게 된다. 그래서 사람들은 누구와 호언장담할 때에 ‘내가 하늘을 두고 맹세하지만’이란 말을 많이 쓴다.
그러면 이 우주 만물 천지에 하나님보다 더 큰 자가 누가 있단 말인가? 이에 대하여 히브리서 기자는“누구든지 맹세할 때는 맹세하는 자 보다 더 큰 자를 가리켜 맹세해야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자기보다 더 큰 이가 없으므로 자신을 가리켜 맹세하였다”(히 6:13)고 기록하였다.
맹세란 모든 일의 최종적 확정을 의미하는 것으로 맹세를 통하여 아브라함에게 미리 말씀하신 축복을 이행하시겠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지금 처음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실 때의 그 약속의 말씀을 다시 거론하시는 것이다.
“내가 네게 큰복을 주고”여기서 먼저‘축복’이라는 말씀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창조 사역에서 축복의 첫 단어는 물고기와 공중의 새들에게 주신 생육과 번성과 충만의 축복이었다. 그리고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지은 사람에게는 생물들에게 주신 축복 위에 정복의 축복을 더하셨다.
그러나 이러한 축복은 인간의 죄로 말미암아 소멸되고 홍수의 대멸망 이후 하나님의 은혜의 사람 노아와 그 아들들에게 다시 이어졌다. 그러나 인간 속의 죄의 속성은 이러한 축복의 의미를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보다는 자신의 욕망들을 달성하기 위한 도구로 사용하므로“땅에 충만하라”는 명령을 거부하고 하늘의 비밀을 밝히기 위하여 바벨탑을 쌓기에 이르렀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그들 속에서 오직 한 사람 아브라함을 불러내어“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창 12:2)고 약속하셨다.
이제 하나님의 복을 한 사람에게 주어 그 사람 자신이 복이 되게 하신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계획은 아브라함을 통하여 모든 자들이 복을 받을 길을 열어 놓으신 것이다. 그 방법에 대하여 성경은“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임이라”고 하셨다.
축복의 업그레이드
이 축복은 이 땅의 모든 왕들을 이기고 돌아올 때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멜기세덱”에 의하여 다시 업그레이드된다. 멜기세덱은 손을 들어“천지의 주재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시여 아브라함에게 복을 주옵소서”라고 축복하였다. 그리고 이 축복은 하나님 자신이 아브라함의 방패와 상급이 되어 그의 자손으로 하늘의 뭇 별과 같이 이루게 하실 것을 약속하신 것이다. 그 하나님의 약속이 천신만고 끝에 오늘에서야 확정된 것이다.
그 약속을 받기 위하여 그는 100세에 얻은 아들을 그의 말씀대로 하나님께 드렸다. 하나님의 요구는 아브라함의 신실한 믿음이었다. 얼마나 자신을 신뢰하는가에 대한 시험이었다. 이러한 시험은 그리스도에게도 있었다.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도 연약한 육신으로 오셨으므로 친히 육신의 시험을 감당하여 모든 연약한 자의 머리가 되셨던 것이다.
이에 대하여 성경은“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주께서 그 사랑하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가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히 12:5-6)고 하였고, 다시“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 아니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 하시나니 어찌 아버지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니니라”(히 12:7)고 기록하였다.
창세기 15장에서 하나님께서는 후일의 아브라함의 자손을 가리켜 하늘의 별들을 바라보게 하셨다. 그러나 오늘은 하늘의 별들과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시겠다고 하였다. 하늘의 별이나 바닷가의 모래나 우리가 셀 수 없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이러한 약속을 승계한 기름부음 받은 왕으로서 인구 조사를 하려다가 하나님의 진노를 샀던 다윗을 기억한다.
최근 많은 교회들이 성도들의 전도라는 미명아래 또 숫자 놀음을 하고 있는 것은 참으로 우스운 일이다. 다윗을 징계하신 하나님께서는 그 말씀대로 하나님의 자손의 숫자를 셈하는 자를 징계하실 것이다.
사람의 눈으로 얼마의 별을 셀 수 있을까? 2,000? 5,000? 옛날의 천문학자들은 육안으로 볼 수 있는 것은 약 3,000∼6,000개 정도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망원경이 발명된 후 과학자들은 하늘의 별은 1025 정도라고 측정한다. 더욱이 바닷가의 모래의 숫자도 이와 같다는 과학자들의 연구 결과는 우리를 놀라게 한다. 여기서 네 씨라는 말은“예수 그리스도”를 지칭하는 것이다.
성경에서 잠시 사라지는 이삭
본문 속에서 놀라운 것을 발견하게 되는데 앞에서 아브라함은 사환들에게“우리가 다시 돌아오리라”하고 말했었다. 그런데 성경은“아브라함이 사환에게 돌아왔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면 이삭은 어디에 간 것일까? 여기서 우리는 성경 속의 딜레마에 또 빠지게 된다. 그러나 신약의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에 어려움이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오늘 본문 속에 나오는 이삭의 모리아 제단은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인 것을 알기 때문이다. 지금 성경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의도적으로 이삭을 언급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예수께서는 죽으신 후 부활 승천하여 이제 그리스도의 날에 그의 신부인 교회를 데리러 올 때까지는 이 세상에 계시지 않기 때문에 이삭도 그의 신부 리브가를 맞이하기까지는 성경에 등장하지 않는다.
지금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께서 보내신 성령이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 즉 그의 교회를 모으고 있는 것처럼 이제 곧 아브라함의 종“엘리에셀”이 등장하여 이삭의 신부를 맞이하는 것이다.
우리는 앞으로 24장에서 그리스도께서 공중 혼인 잔치를 통하여 맞이할 신부의 모습의 모형을 리브가의 모습을 통하여 보게 될 것이다. 이삭은 죽었다. 그의 육신의 세계는 끝이 났다. 그리고 다시 시작되는 또 하나의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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