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강해/창세기 강해

(창세기 24장-2) 결혼, 내 결정에 부모의 동의인가?

이요나 2007. 2. 16. 13:23

(창세기 24장-2) 결혼, 내 결정에 부모의 동의인가?

 

(창24:12-14) 그가 가로되 우리 주인 아브라함의 하나님 여호와여 원컨대 오늘날 나로 순적히 만나게 하사 나의 주인 아브라함에게 은혜를 베푸시옵소서성중 사람의 딸들이 물길러 나오겠사오니 내가 우물곁에 섰다가 한 소녀에게 이르기를 청컨대 너는 물 항아리를 기울여 나로 마시게 하라 하리니 그의 대답이 마시라 내가 당신의 약대에게도 마시우리라 하면 그는 주께서 주의 종 이삭을 위하여 정하신 자라 이로 인하여 주께서 나의 주인에게 은혜 베푸심을 내가 알겠나이다

 

부모의 준비

우리는 앞에서 이삭의 결혼을 준비하는 아브라함을 보았다. 그 당시의 평균수명을 120세 이상으로 볼 때 이삭의 40세는 오늘의 30세와 같다고 하겠다. 이 때는 인생의 가장 아름다움을 느끼고 알 수 있는 황금기라고 할 수 있다. 주께서도 30세를 전후하여 공생애를 시작하셨다.

 

최근 많은 젊은 그리스도인들이 결혼의 문제로 고심하고 있음을 생각할 때 창세기 24장은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다. 우선 이삭은 장성한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그 나이에 이성교제에 대한 언급이 일체 없다. 그는 믿음의 아버지 아브라함의 사랑 속에서 하나님과 함께 살아가는 법을 터득하며 자기의 인생을 준비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아버지의 오랜 경륜을 통하여 아버지 아브라함의 삶 속에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였을 것이다.

 

또한 이삭은 히브리인의 창시자로서 많은 하인들을 돌보며 주변의 이방 족장들과 온전한 교제를 이루어 하나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는 아브라함의 믿음 생활을 터득하며 성장하였을 것이다. 이러한 믿음의 생활 환경들이 믿음의 승계자 이삭의 온전한 순종과 신뢰의 믿음을 형성한 것이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과연 어떠한 가족 환경을 이루고 있는가? 미국 여행 중 그리스도의 가정을 방문하면 우리 피부로 금방 느껴오는 것은 기쁨으로 가득한 아름다운 가족관계이다. 그 생활 속에 녹아있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믿음 속에서 당당한 삶을 살아가는 하나님의 사람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많은 사람들이 한국적 그리스도인에 대하여 말한다. 새벽 기도에 참여하고 있는가? 구역 예배와 금요 철야에 참여하는가?

 

십일조 생활과 함께 주일날은 아침부터 밤까지 봉사하고 있는가? 주의 종을 잘 섬기고 있는가? 그런데 그들의 가정을 가보면 완전 따로 국밥이다. 아들 따로 딸 따로 아버지 따로 어머니 따로의 믿음 생활이다.

 

믿음의 형식은 있는데 삶 속에 녹아있는 신실한 믿음의 아름다운 자태는 보이지 않는다. 입안에 들어간 음식물이 서로 섞이지 않은 채 위로 넘어가는 것과도 같다. 윗물이 맑지 않으면 그 줄기는 어쩔 수 없이 흙탕물이 될 수밖에 없다. 사랑하지 않는 부부 생활을 하면서 자식의 결혼 생활만큼은 행복해지기를 바라는 것은 돌연변이를 낳는 것보다도 힘든 일이다.

 

좋은 나무와 좋은 열매

자식은 부모의 열매다. 좋은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고 나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는 것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이치이다. 따라서 좋은 열매를 얻기를 바란다면 나무가 맑은 물과 부지런한 농부의 돌봄 속에 있어야 한다.

 

주께서는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고 하셨고“아버지는 농부”라고 하셨다. 아버지께서 열매맺지 못하는 가지마다 잘라 버리신다고 하셨다. 그리고 너희는 이미 나의 말로 이미 깨끗하여졌으니“너희가 내 안에 있고 내 말이 너희 안에 있으면 무엇이든지 구하라”고 하셨다.(요 15:1-5) 이것이 주께서 말씀하신 아름다운 열매를 거두는 법칙이다.

 

물론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주안에 있다. 그러나 주안에 있는 것만으로는 좋은 열매를 얻을 수 없다. 주께서 너희는 이미 내가 일러준 말로 깨끗하여졌다고 하셨다. 이것은 주의 말씀의 능력으로 육체의 정욕과 더러움과 질투와 분노와 조급함과 악독을 버렸다는 의미이다. 또“내 말이 너희 안에 있으면 무엇이든지 구하라”(요 15:7)고 하신 말씀은 삶 속에서 그의 말씀을 묵상하며 그의 뜻 안에 삶을 누리고 있다는 의미이다.

 

이 세상에서 누가 아들에 대하여 가장 잘 알 수 있는가? 아니 누가 아들을 가장 사랑하는가? 말할 것 없이 아버지보다 아들을 더 사랑하는 사람은 이 세상에 없으며 아버지보다 아들을 더 잘 아는 사람은 없다. 따라서 자식의 신부감을 구하는 데는 그 아버지의 배려와 생각을 따라갈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 그러면 현대의 젊은이들은 어떠한가? 과연 자신의 배우자 문제를 부모에게 맡기고 있는가? 아마 90% 이상은 모두 아니오 라는 답변을 할 것이다. 내 배우자이니 내가 구한다는 것이 요즘 젊은이들의 생각이다.

 

또한 결혼상담소라든가 소개팅 아니면 개인적인 교제를 통하여 본인들이 결정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부모에게 동의를 얻는 것이 아니라 통보의 절차로 결혼하는 경우가 70%이다. 게다가 결혼 전에 미리 맛을 보고 결정하는 경우가 75%이다. 키스 정도는 95%이고 성적 스킨십은 85%이상이다. 이 통계가 300명의 크리스천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것이라 생각할 때 참으로 허탈하다.

 

기도의 목적

많은 사람들이 시대가 시대이니 만큼이란 말을 많이 한다. 그러나 수천 년이 흐르는 동안 사람이 살아가는 원리는 전혀 바뀐 것이 없다. 아침에 뜨는 해는 태초부터 지금까지 변함이 없고 하루 세끼 밥을 먹어야 인간은 산다. 아담의 결혼이래 인생은 이 땅에서 정해진 삶의 환경을 뛰어 넘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다. 따라서 결혼의 원리도 마찬가지이다.

 

결혼의 법칙은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여 온전한 결혼 생활을 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았고 하나님의 법을 떠나 자신의 욕정대로 배우자를 선택한 사람들은 불행한 결과를 초래하였다. 성경은 우리의 거울이고, 하나님께서 친히 쓰신 인생 매뉴얼인 것이다. 즉 삶의 규범인 것이다. 어느 선인이 쓴 도덕경도 어느 고명한 학자가 쓴 인생 문제의 논문도 하나님께서 쓰신 경전보다 더 깊고 높은 것은 이 지구상에 없다.

 

아브라함의 명을 받은 종 엘리에셀은 그 먼길의 여행을 지체하지 않고 나홀 성에 도착하여 약대와 함께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자신의 여행 목적을 위하여 하나님께 기도한다. 그는 하나님을 가리켜“우리 주인 아브라함의 하나님 여호와”라고 부른다. 그는 오랜 세월동안 아브라함을 섬기면서 그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였다. 또한 아브라함이 자기를 택하신 하나님께 어떻게 순종하였는지도 익히 체험하였다. 그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의 이름을 불러 자기의 임무를 고한다. 이미 길을 떠날 때 주인 아브라함으로부터“나를 택하시고 부르신 하나님께서 미리 그의 사자를 보내실 것”이라는 믿음의 말씀을 받은 상태이다.

 

이제 자기의 기도는 이미 시위를 떠난 화살과도 같다. 하나님의 계획과 아브라함의 믿음 안에서 결정된 사항을 청구하는 것뿐이다. 어쩌면 이것은 땅 짚고 헤엄치기와 같다. 성경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기도는 모두 받은 줄 알라고 가르친다. 따라서 우리의 기도는 이 기준을 넘지 말아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의 기도로 하나님의 뜻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그것은 오해다. 하나님의 계획은 그분이 예정하신 대로 그분의 때에 그분께서 이루시는 것이다. 다만 우리의 기도는 하나님의 뜻 안에서 가장 최선의 길을 요구하는 것이다. 지금 엘리에셀은 이미 예정되고 결정되었으나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일에 대하여 최선의 방법을 요구하는 것이다.

 

이미 준비된 것을 찾는다

엘리에셀은 지금 자기가 만나야 할 주인의 아들 이삭의 신부감을“순적히 만나게 하여 달라”는 기도를 하고 있다. 그리고 그는 그것이 자기 주인 아브라함에게 내리는 하나님의 은혜임을 알고 있다. 이러한 기도는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알 때 가능하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께서 미리 이루어 놓으신 일을 가만히 앉아서 받지 않았다. 믿음의 기도는 하나님은 어떠한 방법이라도 가능하다는 믿음의 전제에서 가능한 것으로 자기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을 하나님께 요구하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결정된 일에 대한 인간이 할 수 있는 행할 길을 얻는 지혜이기도 하다.

 

이러한 일은 사사기의 기드온의 기도에서도 나오는데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기드온은 하나님을 시험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인간에게 시험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기드온 이미 하나님이 그를 쓰시기로 작정하신 것을 알았기 때문에 정말로 하나님의 능력이 자기 같은 사람에게 일어날 것인가를 확인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눈에 보이지 않는 분이시고 인간은 한계 속에 살고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능력이 임한 자기 자신을 시험해 본 것이다. 엘리에셀은 그곳에서 한 소녀를 만날 것을 제안한다.

 

그러나 그는 인간의 순리를 벗어나 무리한 요구를 하지 않았다. 그 때는 저녁 때였고 성에 사는 사람들의 딸들이 물을 길러올 것은 정한 이치였기 때문이다. 나는 많은 사람들이 이치에 맞지 않는 요구를 기도하는 볼 때마다 참으로 견딜 수 없는 무례함을 느낀다.

 

엘리에셀은 자기 주인의 처 사라와 같이 성실한 여인을 생각하며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자기 주인의 아들 이삭의 신부감은 삶의 헌신이 준비된 여인일 것을 알고 있었다. 먼저 그는 나그네를 대하는 여인의 태도를 살폈다. 성경은 나그네를 잘 접대하라고 가르친다. 이로써 천사를 대접한 사람이 있다고 하였다.

 

그는 그 성을 방문한 나그네로서 갈증을 해소할 마실 물을 요청한 것이다. 그리고 자기뿐 아니라 자기의 약대에게까지 물을 먹이는 처자를 만나면 그가 이삭의 신부로 알겠다는 제안을 한다. 참으로 슬기로운 제안이다. 그러나 이것은 중동 지역의 우물의 형태를 안다면 그 일이 쉽지 않은 것임을 금방 알게 된다.

 

중동 지역의 평지에서 돌로 쌓은 여러 계단을 밑으로 내려가야 깊은 우물이 있다. 그도 그럴 것이 그곳은 사막과 암반 지대로서 물이 귀한 지역이다. 또한 낙타 한 마리가 보통 75∼185 리터의 물을 마신다고 할 때 평지 위에 꿇어앉은 열 마리 낙타에게 우물에서 물을 길어 먹이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닌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준비하심은 온전하여 엘리에셀은 자신의 기도대로 순적히 나홀의 손녀 리브가를 만났고, 그의 기도대로 성취되는 기쁨을 맛보며 그의 기도에 응답하신 하나님께 경배하고 리브가의 손목에 금 고리를 채워준다. 이처럼 성령께서 우리의 연약함을 도와 하나님의 뜻대로 드리는 기도는 그에 합당한 열매를 맺게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