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강해/창세기 강해

(창세기 24장-3) 크리스천의 결혼, 어떻게 결정할 것인가?

이요나 2007. 2. 16. 13:19

(창세기 24장-3) 크리스천의 결혼, 어떻게 결정할 것인가?

 

(창24:56-58) 그 사람이 그들에게 이르되 나를 만류치 마소서 여호와께서 내게 형통한 길을 주셨으니 나를 보내어 내 주인에게로 돌아가게 하소서 그들이 가로되 우리가 소녀를 불러 그에게 물으리라 하고 리브가를 불러 그에게 이르되 네가 이 사람과 함께 가려느냐 그가 대답하되 가겠나이다

 

첫발을 디딜 때 역사

우리는 본문 속에서 우리의 믿음 생활에서 꼭 알아야 할 말씀을 만나게 된다.“나의 주인에게 주의 인자와 성실을 끊이지 아니 하셨사오며 여호와께서 길에서 나를 인도하사‥”이것은 리브가를 만난 후 하나님을 찬양하는 엘리에셀의 감사 기도이다.

 

그는 자기 주인 아브라함의 하나님 여호와를 불러 찬양하며 자기 주인에게 더하신 하나님의 인자와 성실을 찬양하고 있다. 이것은 그가 오랜 삶 속에서 체험한 택하신 인간을 대하시는 하나님의 성품이신 것이다. 그분은 오래 참으신 그의 자비하심 속에서 자신이 하시고자 하시는 일을 성실하게 이행하시는 분이시다.

 

또 우리가 여기서 터득해야 할 말씀은“길에서 나를 인도하심…”이다. 많은 크리스천들이 하나님을 오해하고 있다. 예수께서도 부활의 개념을 잘못 알고 있는 사두개인들에게“너희가 성경도 알지 못하므로 오해하였다”라고 하셨다.

 

많은 성도들이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믿고 바라는 것은 무엇이든지 주신다고 생각해서 무지몽매로 매달리는 과오를 범하고 있다. 특별히 오순절계열의 교회에서는 이러한 부분을 강조하므로 성도들을 무지 속으로 이끌고 있다.

 

나 역시도 과거 이러한 경험을 했던 사람으로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어이가 없다. 한 예로 자기가 원하는 결혼 대상이 있으면 그 사람의 사진을 갖다 놓고 기도하라고 가르치기도 하고 극단적으로 양복을 한 벌 걸어놓고 아침저녁으로 그 대상을 생각하면서 기도하면 성취된다고 가르친다.

 

이것은 성황당에 아침저녁으로 소원을 비는 행위와 다를 것이 전혀 없는 일이다. 이것은 미국의 크리스천 사이언스 종교 단체에서 유행하는 심리학적 교리로써 교회 성장에 맞물려서 교묘하게 각 교회에 스며들어 왔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이처럼 무지몽매한 기도를 들으시는 분은 아니시다. 그분은 모든 것을 아시며 모든 것에 능하시나 지식과 질서의 하나님이시며 성경에 기록된 말씀의 도를 넘지 않으신다.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가 아니라 코걸이면 코걸이, 귀걸이면 귀걸이인 것이다. 아브라함의 종 엘리에셀은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 뜻을 하나님께서 스스로 이루실 것을 아는 신뢰감 속에서“그 길을 행하였을 때” 그 일을 손수 이루시는 하나님을 만난 것이다. 이것은 아브라함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그가 메소포타미아에 있을 때 환상 속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그 부르심을 따라“첫 발을 내 딛었을 때”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것이다. 인간이기에 실수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그의 행함 속에서 그의 계획대로 이끌어 가시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그의 뜻을 알고 믿음의 첫 발을 내딛었을 때 이루어진다.

 

진리의 인도란 무엇인가?

본문은 하나님의 사람의 결혼에 대하여 성경상 처음 언급된 부분임으로 그것에 초점을 맞추어서 설명을 하고자 한다. 물론 이삭이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임을 생각할 때 교회, 즉 그를 믿는 성도들은 그의 신부임이 틀림없다. 따라서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모형이며 또한 엘리에셀은 성령의 모형이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인 우리를 예수님께 이끌어 가는 성령의 사역을 배우게 된다.

 

우선 그는 하나님의 삼위일체로서 아브라함의 종 에벤에셀이 아브라함의 마음을 알듯이 성령은 하나님의 마음을 아신다. 성경도 누가 하나님의 마음을 알겠는가 하고 묻는다. 오직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께서 그의 깊으신 뜻을 아신다고 증거하고 있다.

 

예수께서도 그의 제자들에게 성령에 대하여 소개하기를 그는 진리의 영이라고 소개한다. 또한 진리의 영이 오시면 너희를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신다고 하셨다.(요 16:13) 그러면 우리는 여기서“진리”가 무엇인가를 먼저 알아야 할 것이다. 주께서 고난 받으시기 전 날 그는 겟세마네 동산에 올라 극심한 탄식으로 하나님 아버지께 간구하셨는데 특별히 자기의 제자들을 위하여“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 같이 나도 저희를 세상에 보내었으니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요 17:18-19)라고 하셨고, 다시“하나님의 말씀은 진리니이다”(요 17:17)라고 하셨다.

 

이 세상에 진리는 오직 하나다. 고대로부터 수많은 학자와 철인들이 그 진리를 알고자 하였으나 진리는 오직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이요 그를 아는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길로써 감추어졌던 것이었다.

 

여기서 우리가 아이러니를 만나게 되는데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이고 성령은 진리의 영이시고, 또 주께서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하셨으니 혼동이 올 수도 있겠으나 이 세분이 한 분이신 하나님임을 알 때 우리는 이 문제에서 해결된다.

 

따라서 주인인 아브라함의 마음과 또 그와 함께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아는 엘리에셀은 자신이 무리하여 하는 일이 하나도 없다. 그의 뜻대로 첫 발을 내딛고 그가 가고자 하는 길을 성실히 행하였을 뿐이다. 그가 한 것이 있다면 오직 기도였다.

 

그 기도도 많은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질세라 무릎 꿇고 소리쳐 외치는 기도가 아니라 조용하고 차분한 마음으로 드린 묵도였다. 왜냐하면 엘리에셀이 리브가의 가족들에게 일의 자초지종을 설명할 때에“내가 묵도하기를 마치지 못하여 리브가가 물 항아리를 어깨에 메고 나왔다”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기도는 어떻게 할 것인가?

또한 많은 사람들이 기도에 대하여도 오해를 하고 있다. 주께서도 성전 앞으로 당당히 나가서 조리있게 외치는 바리새인의 기도에 비교하여 자신의 죄에 눌려서 뒷전에 서서 자기의 주장도 아뢰지 못한 채 오직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구하는 사람의 기도를 하나님께서 받으셨다고 말씀하셨다. 기도란 무엇인가?

 

우리의 필요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구할 때 주시는 은혜인 것이다. 그러나 이 기도는 나의 주장에 의하여 드려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의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드려지는 것이다. 우리는 처음부터 하나님 앞에 나아가 무엇을 청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죄인된 우리 앞에 계신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청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너희가 내 안에 있고 내 말이 너희 안에 있으면 무엇이든지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고 하신 말씀은 주께서 그의 계명대로 행하는 그의 제자들에게 주신 말씀이다. 이처럼 우리가 드리는 기도는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드려져야 한다.(참조: 하나님이 원하시는 기도-척 스미스 목사 저서)

 

아브라함의 종 엘리에셀이 묵도하고 있는 동안 졸지에 생전 구경조차 하지도 못했던 금팔찌 선물을 받은 리브가는 두근 반 세근 반 거리는 가슴을 안고 어머니에게 달려가서 이 일을 고한다. 아마 아버지 브두엘은 나이가 들어 자식 라반에게 살림을 맡기고 뒤로 물러섰든지 아니면 다른 후처의 집에 있었는지 모른다.

 

어쨌든 리브가의 손목에 걸친 금팔찌를 본 리브가의 오빠 라반은 단숨에 우물가로 달려가 엘리에셀을 맞는다. 그에 대하여는 우리가 후일 이삭의 아들 야곱의 시대에 자세히 알게 되지만 본문에서 보는 바와 같이 라반은 물질적인 사람임이 틀림없다. 그는 아브라함의 종 엘리에셀에게 가서“여호와께 복을 받은 자여 들어오소서”라고 호들갑을 떤다.

 

요즘도 성령 대망회 같은 축제를 여는 곳에 가면 그들의 목적을 금방 알 수 있는데 그러한 운동을 추구하는 모임 속에서 느낄 수 있는 것은 라반과 같은 모습이다. 그들은 개성이 강하여 모두 어떠한 목적 의식을 가지고 있다.

 

진정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온유하고 묵묵한 질서 속에서 강인한 모습을 볼 수 있다고 할 때 그들은 곧 폭발할 폭탄과 같은 격동 속에 휩싸여 있다. 어쨌든 예수께서 그의 제자들에게 소개하는 성령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하여 보내심을 받은 진리의 영으로서 자신을 위하지 않는다.

 

이러한 모습은 엘리에셀도 마찬가지이다. 라반이 어떠한 태도로 나오든지 간에 엘리에셀은 자기의 태도에 변함이 없다. 그는 자기 앞에 차려놓은 진수성찬에 시장기를 풀지 않고 자기의 임무를 진술하기 전에는 먹지 않겠다고 한다. 왜냐하면 성령의 목적은 자기를 위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를 준비하러 왔기 때문이다.

 

무엇으로 결정할 것인가?

그는 먼저 여호와께서 자기 주인에게 축복하셨음을 설명한다. 이것은 아브라함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설명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주인의 아들 독자 이삭에게 주인의 모든 소유를 다 주었음을 강조하고 있다. 예수께서도“무릇 아버지께 있는 것은 다 내 것이라”(요 16:15)고 하셨다.

 

그들에게 이삭을 소개한 엘리에셀은“내 아들을 위하여 아내를 택하라”는 자신의 임무를 설명한다. 또한 그는 아브라함에게 받은 명령의 자초지종을 하나도 빠짐없이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여자가 나를 좇지 아니하면 어찌하오리까 한즉 주인이 내게 이르되 나의 섬기는 여호와께서 그 사자를 너와 함께 보내어 네게 평탄한 길을 주시리니 너는 내 족속 중 내 아비의 집에서 내 아들을 위하여 아내를 택하라”

 

이 말은 집을 떠나기 앞서 아브라함 앞에서 맹세를 할 때 주고받은 말이었다. 이와같이 성령은 그의 가르침에 있어서 기록된 말씀의 범위를 넘지 않는다. 주께서도“그는 스스로 말하지 않고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리라”고 하셨고“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 하실 것”이라고 하셨다.

 

성령 운동을 한다는 사람들이 말하는 것을 들으면 참으로 기가 막힌 일들이 많다. 성경에서 듣지도 보지도 못한 일들을 벌리면서 마치 성령 운동을 마치 푸닥거리하는 무당 놀음으로 만들어 놓는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다.

 

엘리에셀은 아브라함으로부터 명령을 받은 후 길을 떠나 지금까지 있었던 일을 하나도 빼지 않고 소상하게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자기가 그 목적지에 도착하여 먼저 하나님께 묵도로 구한 것과 그 간구 즉시 리브가를 만나게 된 일, 그리고 리브가가 자신이 하나님께 구한 기도와 같이 행한 일 등을 소상히 설명하고 그녀가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신부임을 확정하여 그의 코와 손목에 금장식으로 채웠음을 설명한다. 또한 이 모든 일이 오직 그 아들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자기를 바른 길로 인도하셨음으로 오직 하나님께 머리 숙여 경배하고 찬송하노라고 고하였다.

 

그는 가부간의 태도를 분명히 하여 자기의 행할 바를 행하게 해달라고 그들의 의사를 요구한다. 주께서도 성령은 인도하시고 가르치시며 생각나게 하신다고 소개하셨고, 그는 우리를 무리하게 이끌지 않는 인격이심을 가르쳐 주셨다. 성령은 우리를 진리로 인도하시지만 우리의 인격을 무시하지 않는다. 그는 우리의 자유 의지를 존중한다.

 

왜냐하면 우리를 지으실 때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 지으셨기 때문이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순간 성령께서는 우리를 인(印)처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확정하시지만 우리를 그에게 이끌어 가심에 있어서는 절대적으로 우리의 사고와 자율적 의지를 요구한다. 이와 같이 엘리에셀도 리브가의 결단을 촉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