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강해/창세기 강해

(창세기22장-2)절 많이 한다고 그것이 예배는 아니지요!

이요나 2007. 2. 16. 13:38

(창세기22장-2)절 많이 한다고 그것이 예배는 아니지요!

 

(창22:6-8) 아브라함이 이에 번제 나무를 취하여 그 아들 이삭에게 지우고 자기는 불과 칼을 손에 들고 두 사람이 동행하더니 이삭이 그 아비 아브라함에게 말하여 가로되 내 아버지여 하니 그가 가로되 내 아들아 내가 여기 있노라 이삭이 가로되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 아브라함이 가로되 아들아 번제할 어린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하고 두 사람이 함께 나아가서

 

아브라함과 이삭의 예배

창세기 22장에서 우리가 공부하여야 할 두 번째 제목은‘경배’즉 예배다. 우리는 앞에서 하나님 앞에서의 우리의 헌신과 관련된 ‘사랑’에 관하여 살펴보았다. 우리는 사랑이라는 것은 우리가 받는 것으로만 여겨 왔는데 세상 말처럼 사랑은 받는 것이 아니라 주는 것이다.

 

그 사랑은 원래 이 땅의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것으로서 먼저 그의 사랑하는 아들에게 나타내신 바 되었고 다시 그의 제자들에게 지명하신 것으로서 이 세상을 구속하기 위한 하나님의 기쁘신 뜻이었음을 배웠다. 이와같이 오늘 우리가 살펴볼‘경배’의 의미도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 달리 커다란 의미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

 

본문에서 배울‘경배’의 단어적 의미는“엎드려 절하다”라는 뜻이다. 엎드려 절하는 것으로만 본다면 이슬람교도들이나 불교 신자들에게 우리는 질 수밖에 없다. 그러면 머리를 숙인다는 의미는 무엇일까? 새벽마다 쌓는 새벽 예배일까? 아니면 1년에 몇 차례씩 이를 악물고 단행하는 금식 기도일까? 어쩌면 주일마다 경건하게 드려지는 나의 모습일 수도 있다. 정말 어떻게 드려야 진정한 예배인지 목회 생활 7년이 된 나도 감을 잡을 수가 없다.

 

진정으로 하나님이 받으시는 신령한 예배를 준비하기 위하여 기도로 무장하고 찬양과 말씀과 물질을 준비하고, 안내 봉사에서부터 화장실 청소에 이르기까지 완벽한 준비를 갖추고 드려진 주일 예배, 그러나 예배를 끝내고 성도들이 돌아간 후 하나님 앞에 홀로 선 나는 할말을 잃어버린다. 내 마음에도 합당하지 못했던 이러한 예배를 과연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받으셨을까? 그러면서 또 나는 내일의 예배를 준비한다.

 

본문 속에서 첫 번째로 등장하는‘경배’의 의미는 매우 심각한 사건을 전제로 하고 있다.‘사랑’이라는 말씀이 하늘로부터 온 것에 비하여‘경배’라는 말은 예배자의 입에서 나왔다. 그러나 이 예배의 요구가 하나님으로부터 나왔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하여야 한다. 따라서 이 예배는 택한 자에게 요구하시는 하나님의 권리임을 알 수 있다. 예배는 예배를 드리는 자가 아니라 예배를 받으시는 자의 뜻에 부합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할 때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 뜻에 합당한 예배를 드릴 수 있을까 하는 모순에 부딪치게 된다. 왜냐하면 죄의 육체 속에 거하는 인간으로서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계시하지 않고서는 알 수도 느낄 수도 없기 때문이다. 만약에 우리가 자연 계시만을 통하여 하나님을 접할 수 있는 것이라면 인간의 예배는 각 사람의 심성과 민족의 풍속을 따라 각양 각색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자신을 알 수 있도록 계시 문서를 주셨는데 이것이 우리가 보고 있는 성경인 것이다. 따라서 예배에 관한 것도 그 예배를 친히 받으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미리 말씀으로 주신 것이다.

 

>이스라엘 민족과 예배

원래 예배는 그의 택한 백성 이스라엘에게 주신 것이다. 이에 대하여 성경은 이스라엘 민족의 우월감에 대하여 그들이“하나님의 말씀을 맡았다”라고 기록하였다. 그리고 다시“그들은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들에게는 양자됨과 영광과 언약들과 율법을 세우신 것과 예배들과 약속들이 있고 조상들도 그들의 것이요 육신으로 하면 그리스도가 그들에게서 나셨으니 그는 만물 위에 계셔서 세세 찬양 받으실 하나님이시라”고 하였고 아멘으로 화답하였다. 따라서 이 세상 사람들이 어떠한 모양으로 예배를 드린다 해도 그 예배의 정통성에 있어서 유대인을 앞서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하다.

 

그들은 수천 년 동안 그 계시된 말씀으로 주신 율법에 의하여 하나님 앞에 정결한 예배를 드리기에 힘써 왔던 백성이고 또한 어느 시대든지 이느 곳에서든지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드리는 예배를 즐거이 받으셨다. 그러나 이 예배는 그리스도의 오시기 전까지만 계시된 것으로서 성경은“하나님이 이 모든 날의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다”(히 1:2)라고 기록하였다.

 

이 약속은 이미 선지자를 통하여 주신 것인데 성령이 증언하기를“주께서 이르시되 그날 후로는 내가 그들과 맺을 언약이 이것이라 하시고 내 법을 그들의 마음에 두고 그들의 생각에 기록하리라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되리라 그 날에는 사람이 자기 형제를 가르쳐 이르기를 주를 알라 하지 아니할 것은 그들이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나를 앎이라”(히 8:10-11)고 하심과 같다. 여기서 우리는 성경이 가리키는 그 날이 어느 날인지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우리는 복음서 어디에서도 성전에서 예배드리시는 주님을 발견할 수 없다. 주께서는 각 고을을 돌며 회당에서 때로는 산에서 때로는 들에서 배 위에서 잔치집에서 초상집에서 그리고 예루살렘 성전에서 백성들을 가르치셨다. 그리고 그는 이른 새벽에서 밤늦은 시간까지 하나님 앞에 기도를 드리셨다. 그러나 그 당시 유대인이 집행하는 예배에 참가하신 기록은 그의 공생애에서 찾아볼 수 없다. 다만 주께서 율법에 의하여 행하여진 일들에 대하여는 할례와 12살의 성인식과 그리고 세례 요한에게로부터의 침례의식이 있었다. 그 때로부터 주께서는 친히 예배를 받으실 하나님의 아들로서 이 땅에서의 사역을 하셨다.

 

이에 대하여 성경은 율법과 선지자는 세례 요한의 때까지라고 기록하고 있다. 우리는 요한복음 4장에서 예배할 장소에 대한 정통성을 논하는 사마리아 여인에게“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요 4:21)고 하셨다.

 

그러나 주께서는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가 어떠해야할 것에 대하여는“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라”(요 4:22)고 하셨다. 이 말씀은 앞에서 잠깐 말한 바와 같이 예배는 하나님께서 택한 자에게 주신 은혜로서 하나님을 아는 자들이 드리는 축복의 표시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요 4:23)고 말씀하시므로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예배의 갱신의 때가 왔음을 예시하셨다.

 

>예배의 갱신과 오직 한 제물

예배의 갱신에 대하여는 히브리서 기자가 우리에게 자세히 증거한다.“새 언약이라 말씀하셨으매 첫 것은 낡아지게 하신 것이니 낡아지고 쇠하는 것은 없어져 가는 것이니라 첫 언약에도 섬기는 예법과 세상에 속한 성소가 있더라 예비한 첫 장막이 있고 그 안에 등잔대와 상과 진설병이 있으니 이는 성소라 일컫고 또 둘째 휘장 뒤에 있는 장막을 지성소라 일컫나니 그곳에는 금향로와 그룹들이 덮는 영광의 언약궤가 있으니 이것에 관하여는 이제 낱낱이 말할 수 없노라”(히 8:13-9:5)

 

또 성경이 기록하되“성령이 이로써 보이신 것은 첫 장막이 서 있을 동안에는 성소에 들어가는 길이 아직 나타나지 아니한 것이라 이 장막은 현재까지의 비유이니 이에 따라 드리는 예물과 제사는 섬기는 자를 그 양심상 온전하게 할 수 없나니 이런 것은 먹고 마시는 것과 여러 가지 씻는 것과 함께 육체의 예법일 뿐이며 개혁할 때까지 맡겨둔 것이라”(히 9:8-10)고 증거하였다.

 

이로써 우리는 주께서 이 세상에 계실 때 성경에 미리 말씀하신 한 예배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우리를 영원한 길로 인도하기 위하여 갈보리 언덕 위에서 자기의 몸으로 단번에 드리신 십자가의 죽음이다.

 

이 예배에 대하여는 주께서도 미리 말씀하셨는데 주께서 아직 이 땅에 계실 때에 그를 따르기를 원하는 어느 서기관에게 말하기를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들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마 8:20)라고 하셨다.

 

여기서“머리를 두다”라는 헬라어는“머리를 숙이다”와 동일한 의미로서‘경배’즉‘예배’를 가르친다. 이와 같이 이 땅에는 아직 예수께서 하나님께 예배드릴 처소가 없으셨던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이 땅의 모든 권세를 받으신 분이시고, 또 친히 예배를 받으실 창조자이시기 때문이며 아직은 세상 임금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께서는 친히 모든 사람의 머리가 되셔서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을 하나님께 이끌어가기 위하여 성경에 미리 말씀하신 희생 제물이 되지 않으시면 안되었던 것이다.

 

그는 하나님을 향한 온전한 예배를 위한 제물이 되기 위하여 자기와 이 땅에서 그 사역을 담당할 제자들과 그를 따라 하늘의 문으로 입성할 이 땅의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을 위하여 피와 땀으로 간곡한 기도를 하나님께 드리셨고 단번에 자기 몸을 화목제물로 드리심으로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셨다.(히 10:5,7,10 빌 2:8) 이것이 그의 처음 예배이자 마지막 예배인 것이다. 그리고 예수께서는“다 이루었다”라고 하시고“머리를 숙이시고”그 영혼이 아버지께 돌아가셨다.(요 19:30)

 

오늘의 나의 예배는?

이와 같이 본문 속에서 드려지는 하나님이 받으시는‘경배’즉 예배는 하나님의 부르심과 하나님의 뜻대로 최선의 길을 선택하여 신속히 행하여지는 온전한 마음의 부복인 것이다.

본문 속의 아브라함은 왜 하나님께서 이삭을 제물로 받으시기를 원하는지 그 이유를 잘 알지 못하였다. 다만 그의 마음 속에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부르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그를 다시 살리실 것이라는 믿음으로 나아간 것이다.

 

이삭도 그 자신이 하나님 앞에 제물로 바쳐져야 하는 사실도 모른 채 아버지 아브라함의 뜻에 따라 결박된 채 제단에 올랐던 것이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경배’인 것이다. 이와 같이 내 목적과 계획에 맞추어 준비된 형식을 갖추어서 드려지는 예배가 아닌 오직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방법에 의하여 드려지는 우리의 무조건적 순종이 참다운 예배인 것이다. 또한 본문에서와 같이 예물은 우리가 드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합당하게 받으실 예물을 친히 준비하시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성경은“여호와 이레”라고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오늘날 우리들이 드리는 찬송, 설교, 간증, 교제, 헌금, 기도와 같은 예배의식(Worship service)이 아닌 인간의 지식과 지혜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 속에서 드려지는 헌신과 순종, 그리고 인간의 준비와 행위로 드려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이신“진리의 성령”에 의하여 준비되고 인도되어지는 예배, 이것이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예배이며‘경배’인 것이다.

 

온전한 예배의 틀을 만들기 위하여 예수께서 우리 믿는 자 전체의 예배자가 되시어 갈보리 언덕을 오르신 것이다. 그리고 주께서 드리신 단 한번의 예배를 받으신 하나님께서는 그 문으로 들어오는 모든 죄인들을 자녀로 용납하신 것이다. 오늘 우리가 하나님 앞의 드리는 우리의 예배는 과연 얼마나 온전한 것인가? 다시 생각해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