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강해/창세기 강해

(창세기22장-1)네가 사랑의 진실을 얼마나 아는가?

이요나 2007. 2. 16. 13:41

(창세기22장-1)네가 사랑의 진실을 얼마나 아는가?

 

(창22:1-2)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아브라함아 하시니 그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감당할수 없는 시험

본문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에게 커다란 충격을 주는 내용이다. 또한 우리는 여기서 아브라함의 최고의 믿음을 만나게 된다. 1절의“그 일 후에”는 적어도 21장으로부터 30년 정도의 기간이 흐른 후의 일이다. 23장에서 127세로 세상을 마감하는 사라의 죽음과 함께 전달되는 연대 정보에서 이삭이 35세였음을 시사해준다. 본문에서 아브라함이 이삭을 가리켜‘아이’라는 히브리어의 ‘나알’이란 단어는‘종’또는‘청년’으로 번역되고 있어 유동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본문 속에서도‘아이’라는 단어는 아브라함이 이삭과 함께 데리고 간‘종’과 같은 단어를 사용한 것으로 보아 이삭과 그 종들은 같은 또래의 건장한 청년이었음이 틀림없다. 아마 그동안 아브라함은 행복한 시간들을 보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스마엘을 떠나보낸 상처도 어느 정도 아물었고 간간이 이스마엘의 안부를 접해 가면서 아브라함은 생애 최고의 풍요로운 삶을 누렸을 것이다.

 

호사다마라고 갑자기 폭풍이 일어난 것이다. 느닷없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의 침묵을 깨시고“나는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제물로 받기를 원한다”라고 하신 것이다. 아브라함이 이 아들을 얻기 위하여 넘어야 했던 산이 몇이었으며 건너야 했던 강이 얼마였던가? 이제 오랜 믿음의 경륜 속에서 하나님을 알만큼 알고 믿음의 선봉장으로서 나름대로 충실하게 믿음 생활을 해온 아브라함에게 100살에 얻은 아들을 번제로 바치라는 하나님의 요구는 참으로 기가 막힌 일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아브라함의 하나님을 향한 초인간적인 믿음을 발견한다. 우리가 성경을 통하여 객관적으로 바라보기 때문에 아브라함의 내적 고통을 충분히 느낄 수는 없지만 이것은 한마디로 어불성설이다.

 

인간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시험이다. 이에 대하여 야고보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 속에는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단에 바치는 행함이 포함되어 있었음을 시사하며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는 매우 진보적인 해석을 하였다.(약 2:21-24) 최근 많은 사람들이 자식의 헌신을 두고 쉽게 서원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한 부모의 무모한 감정에 사로잡혀서 하나님께 서원 기도를 하므로서 그 아들들의 진로에 적지 않은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

 

완전히 하나님의 뜻은 생각지도 않고 자기 중심이 되어서 내 아들을 당신의 종으로 드리오니 받아 주소서 하는 일방통행이다. 이것은 하나님에 대한 무지에서 오는 일로서 하나님은 인간의 뜻대로 행하시는 분이 아님을 먼저 알아야 한다. 그리고 성경의 여인들이 하나님의 한 아들을 얻기 위하여 어떠한 희생적 삶을 살았는가를 먼저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헌신과 관련된 단어들

한나의 경우를 생각해 보자. 그는 이스라엘의 한 여인으로서 엘가나에게 시집을 와서 아들을 낳지 못하여 많은 수모와 설움을 겪어왔다. 그녀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여인으로서 어찌 자식을 달라는 기도를 하지 않았겠는가? 그녀는 오직 아들을 바라면서 수십 년 동안 기도해 왔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의 기도는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한 기도였지 그 당시 부패한 제사장 엘리의 가문 때문에 새로운 하나님의 제사장을 세우고자 하는 하나님의 뜻에는 부합되지 않았던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을 이끌고 나갈 합당한 제사장을 낳을 여인을 찾고 있었고 드디어 택함을 받은 한나는 그 첩으로 인하여 더 이상 여인의 한을 억제하지 못하고 자식을 주시면 하나님께 그대로 드리겠다고 서원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이러한 지식을 깨닫지 못하고 많은 여인들이 자기 감정에 치우쳐 자식을 하나님께 드리겠다는 서원 기도를 남발하는 것은 그 기도의 의미가 무엇인지조차 모르는 무지함 때문이다. 하나님의 종은 나의 드림이 아니라 그의 택함인 것이며 그러한 서원 기도 역시 하나님께서 주시는 연단 가운데 성취되는 은혜 속에서 이루어져야 하며 그리고 그의 일생이 하나님의 종으로 드려지도록 성장의 과정을 책임져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삼손의 일생을 보건대 하나님의 계시 속에 그의 종을 낳은 부모로서 충실한 삶을 지키지 못하여 삼손의 장래가 암담해진 사건을 잘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본문에는 성경의 핵심이 되는 두 단어가 처음 등장한다. 즉‘사랑’과‘경배’이다. 우리가 성경에서 어떠한 단어의 의미를 바로 알고자 할 때에는 성경에서 처음 등장한 곳을 찾아서 그 의미를 분석하여야 한다.

 

한 예를 들면‘은혜’라는 단어의 진정한 의미를 알기 위하여는 그 단어가 성경에서 가장 처음 나온 창세기 6장의 노아가 받은 하나님의‘은혜’를 살펴보아야 한다. 성경에서 처음으로 접하는‘사랑’이라는 단어는 우리가 생각하는 의미와 아주 다른 위치에 있다. 우리는‘사랑’하면 여자와 남자간에 이루어지는 애틋한 정을 연상하거나 어머니의 따뜻한 사랑을 떠올리게 된다. 그러나 오늘 성경에서 언급된 사랑은‘아버지의 사랑’이다.

 

본문에서“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이라고 말씀하신 문맥 속에서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사랑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연상해 보자. 나는 아직 아들을 낳아 보지 못하여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이 어떤 것인지 잘 알 수는 없지만 그 사랑하는 아들을 제물로 드려야만 하는 아버지의 사랑은 인간으로서는 가질 수 없는 사랑인 것이다. 내 아들보다 소중한 것이 무엇이 있어서 하나밖에 없는 독자를 제물로 드릴 수 있겠는가? 이것이 성경이 요구하는‘사랑’ 즉‘아가페’이다.

 

사랑의 본질과 개념

우리는 본문의 사건을 골고다(갈보리)에서 제물로 드려진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으로 일컫는다. 성경이 상징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위험한 발상이지만 본문의 내용이 그리스도의 상징적 모형임을 갈라디아 3장 16절과 히브리서 11장 17절에서 확증하고 있다. 그렇다고 아브라함이 이삭을 향한‘사랑’이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신 하나님의‘사랑’과 동일선상에서 볼 수는 없겠지만 우리는 이러한 사건을 통하여 하나님의 진정한 사랑의 의미를 접근할 수 있다.

 

그러면 종말을 살고 있는 우리가 알고 있는 사랑의 의미는 어떠한가? 과연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온전한 지식을 갖추고 있는 것일까? 왜 우리는 사랑의 본체이신 하나님을 섬기면서도 사랑의 본질에 대하여 무지한 것일까? 이에 대하여 바울은 말씀 밖으로 넘어 가지 말라고 경고한다.

 

우리가 하나님에 대하여 알 수 있는 방법은 오직 하나님의 계시를 통하는 방법 외에는 없다. 물론 자연 계시를 통하여 하나님에 대하여 알 수 있겠으나 이것도 역시 그가 인간의 마음을 열어서 자신을 알게 하지 않으면 인간은 하나님에 대하여 조금도 알 수 없다. 그래서 우리가 그를 알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의 죄의 문제를 척결하고 나아가야 한다. 성경은 하나님에 대하여 알려주는 유일한 하나님의 계시 문서이다. 우리는 보다 확실한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인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바로 가질 수 있다. 따라서 성경을 통하여 사랑에 대한 본질과 개념을 살펴보도록 하자.

 

삶과 사역의 원동력

복음서에서‘사랑’이란 단어의 시작은 하늘로부터 시작된다. 예수께서 사역에 앞서 세례 요한에게 침례를 받으실 때에 하늘로부터“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내가 기뻐하노라”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왔다.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주신 말씀이었다. 여기서 우리는 왜“내 사랑하는 아들이다”라는 말이 구태여 필요했던 것인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우리 한국 사람들은 참으로‘사랑’이란 말에 인색한 편이다.

 

오랜 세월 유교적 풍토 속에 살아온 민족이 되어서 그러한지 우리의 입은 사랑이라는 말의 표현에 매우 인색하다.‘사랑’이라는 말은 이불 속에서나 속삭이는 것으로 착각을 하기 쉽다. 미국이나 유럽을 잠깐 나가 보면 우리는 참으로 아름다운 광경을 삶 속에서 목격하게 되는데 바로 사랑에 대한 인간의 표현이다.

 

부부간에는 물론 자녀들, 친구들, 그리고 교회와 직장 동료 사이에서의 포옹과 입맞춤은 참으로 신선하고 아름답다. 그리고 그들 속에는 기쁨이 넘쳐 있다. 물론 인간의 이러한 사랑의 표현이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사랑에 궁극적으로는 도달하지 못한다 할지라도 그들의 삶 속에는 사랑이라는 진실과 기쁨이 확대되어 있다. 사랑 속에는 근본적으로 기쁨이 내재되어 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구속 사역을 앞둔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게“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고 하신 말씀을 음미해 보자. 한 가장이 힘든 세상 속에 나아가 땀 흘리며 인내하는 그 고통의 목적이 어디에 있는가 생각해 보자. 만약에 내게 사랑하는 가족들이 없다면 인간의 땀은 무익하다.

 

세끼 밥을 먹기 위하여 일을 한다고 생각하면 인간은 짐승의 범위를 넘을 수 없다. 인간의 땀과 인내는 가족을 사랑하는 기쁨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과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그 위대한 사랑의 힘이 세상의 고통을 이기게 하는 것이다.

 

영원한 사랑의 의미

두 번째 하늘로부터의 음성은 그의 제자들에게 주신 것이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에게 들으라”(마 17:5)는 하나님의 음성은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한 메시야의 구속 사역을 눈앞에 두고 세 명의 제자들과 변화산상에 오르셨을 때 하늘로부터 제자들에게 주신 말씀이다.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은 구름 속에서 백옥처럼 빛나는 옷을 입고 이미 이 세상 사람들이 아닌 모세와 엘리야와 함께 말씀을 나누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본 것이다. 현실 세계 속에서 장차 주께서 다시 오실 때의 세상을 미리 가 본 것이다. 이곳에는 시간과 공간의 제한이 없는 영원의 세계임이 틀림없다.

 

내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 현실과 아주 먼 거리에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우리는 원자를 중심으로 시간과 공간 속에 물질을 이루고 있지만 하나님의 영원의 세계는 또 다른 조직의 세계로 한계를 벗어난 초월의 세계일 것이다.(우리도 이제 그곳으로 가서 부활의 영체로 천사의 모습과 같이 살 것이지만..) 베드로는 인간이 감당할 수 없는 두려움과 황홀함을 견딜 수 없어“우리가 여기가 좋사오니 초막을 셋을 지어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게 하소서”라고 중얼거렸다.

 

그 때 하늘로부터“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에게 들으라”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 베드로는 그의 편지 베드로후서 1장에서 그 영광 속에서 들려온 하나님의 음성을 회상하며“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이는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를 부르신 이를 알게 하기 위하여”(벧후 1:3)라고 말하며, 다시“정욕 때문에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셨다”(벧후 1:4)라고 하며“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를 앎으로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벧후 1:2)라고 축복하였다.

 

주께서 사도들에게 다음 세상을 미리 보이신 것은 우리에게 믿음으로 그 영원한 생명의 세상이 있음을 알게 하시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사랑’은 현실에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영광 속에 오는 영원한 세상에서 누릴 영생을 소망하고 표출하는 능력인 것이다.

 

사랑의 목적

또한 하나님의 사랑의 본질에 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하는 제자 요한은“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함이라”(요 3:16)고 증거하였다.

 

또 그는 종말을 사는 우리를 향하여“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사랑은 여기에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의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요일 4:9-11)라고 가르치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사랑의 본질은 위에서 말한 사랑의 개념들과 상반된 의미를 갖고 있다. 위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보내심을 받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후계자들의 사역에 앞서 그 사역에 원동력을 불어넣어 줌으로써 그들이 기쁨으로 그 일을 할 수 있도록 하신 하나님의 사랑의 본체를 보이신 것이었다. 그러나 사도 요한을 통하여 나타나신 하나님의 사랑은 사랑의 목적과 원칙을 시사하신 것이다. 사랑은 내가 받아 기쁨을 누리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그 기쁨으로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것이 목적이다.

 

그의 사랑은 세상을 사랑하셔서 그 사랑의 능력으로 세상을 죄에서 구속하기 위하여 그의 사랑하는 아들을 내어주신 인간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생명을 희생한 무한의 사랑인 것이다. 이 아가페의 사랑의 진실을 사람들이 얼마나 알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