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강해/창세기 강해

(창세기21장-2)똑같은 아들은 아니지!

이요나 2007. 2. 16. 13:47

(창세기21장-2)똑같은 아들은 아니지!

 

(창21:10-12) 그가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이 여종과 그 아들을 내어 쫓으라 이 종의 아들은 내 아들 이삭과 함께 기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매 아브라함이 그 아들을 인하여 그 일이 깊이 근심이 되었더니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네 아이나 네 여종을 위하여 근심하지 말고 사라가 네게 이른 말을 다 들으라 이삭에게서 나는 자라야 네 씨라 칭할 것임이니라

 

조강지처의 위치

여자라는 위치는 참으로 대단하다. 더군다나 아내라는 위치는 참으로 고귀하고 위대한 존재이다. 나는 아직 아내가 없어서 실감을 해 보지 못하지만 성경 말씀과 인간사 삶 가운데서 보면 아내의 위치는 참으로 존경받을 위치인 것만은 사실이다.

 

바울은 아내는 ‘연약한 그릇’이라고 표현하며 주께서 교회를 사랑한 것처럼 사랑하라고 하였지만 솔로몬의 어머니는 그의 사랑하는 아들에게“왕들을 멸망케 하는 여인들을 삼가라”고 주의하였다. 어쨌든 남자에게 있어 여자의 위치는 매우 중요한 존재이다.

 

아직도 남성 우월주의자들은 여자들의 위치를 격하시키는 경향이 있지만 창조시의 여자들의 위치는 남자와 동등한 위치에 있었다. 지금 복제 양 돌리의 경우를 보자. 돌리가 그 모체의 단세포로 배양되어 탄생된 복제의 생명이지만 그 개체는 정상적인 배란을 통하여 낳은 양들과 다를 것이 없다.

 

이와 같이 비록 여자가 남자의 갈비뼈를 취하여 만들어졌다 하더라도 이것은 남자의 부분적 예속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우리가 우리의 모양과 형상대로 여자와 남자를 만들자”(창 1:26)라고 하심과 같이 남성성과 여성성의 개체의 인격으로 창조하셨다.

 

이것은 범죄로 인하여 아담이 하나님 앞에 판결을 받을 때에“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한 여자가 내게 주어서 먹었다”(창 3:12)라는 진술에서도 증명된다. 아담의 진술 속에는 남자가 여자를 다스릴 위치가 아님과 하나님 앞에서의 여자의 위치가 남자인 자기와 대등한 존재였음을 의미하고 있다.

 

그 후 선악과를 범한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의 남녀의 위치가 수정되어 여자는 남자를 사모하는 위치에 있게 되었다. 또한 창세기 3장 20절을 보면 아담이 여자에게‘하와’라는 이름을 주게 되는데 이름을 지어준다는 것은 그에 대한 주권을 선포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바울은 이에 대하여“여자의 머리는 남자요 남자의 머리는 예수 그리스도요 예수의 머리는 하나님이시라”(고전 11:3)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그 인격적 높낮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의 질서를 말하는 것이다. 그 후 성경 속에서는 여자로 인하여 엄청난 일이 발생하기도 하고 때로는 남자들이 하지 못할 위대한 일을 성취하기도 한다.

 

본문에서는 그동안 아브라함의 후계자 문제를 거들다가 엄청난 문제를 발생시킨 사라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정한 기일이 되어서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을 낳으므로 확고한 위치에 오르게 된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택한 자의 깨닫지 못한 허물 때문에 그 계획을 바꾸지는 않으신다. 또한 그들의 행한 일들에 대한 책임도 요구하지 않으신다. 다만 잘못은 잘못으로 끝을 맺고 그 결과를 통한 깨달음 속에서 진보되는 믿음을 요구하실 뿐이다.

 

언약의 말씀편에 서신 하나님

본문 속에서 사라는 자기가 낳은 아들이 하갈이 낳은 아들과 같은 위치에 있지 않음을 주장한다. 어떻게 보면 참으로 냉정한 처사다. 하갈의 입장에서 보면 하갈은 사라의 몸종으로서 아브라함의 첩이 되기를 소망했던 것도 아니다.

 

이 계획은 사라의 기획과 아브라함의 제작으로 하갈이 연출한 것뿐이다. 그런데 이제 하갈과 그의 아들 이스마엘은 아브라함의 후계자의 구도에서 쫓겨나야 하는 처지가 되고 만 것이다. 이스마엘 측에서 생각해도 참으로 기가 막힌 일이다.

 

사라가 이삭을 낳기 전까지 이스마엘은 누가 뭐라고 해도 노년에 얻은 아브라함의 사랑하는 아들이었다. 사라의 눈총이야 어떠했든지 간에 그는 아브라함의 사랑을 독차지하며 성장했다. 또한 이스마엘은 아버지의 혈통을 받은 할례를 받은 하나님의 히브리 백성임이 틀림없었다.

 

이와 같이 이스마엘은 누가 뭐라고 해도 아브라함의 씨라는 명분과 할례의 언약을 행한 히브리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언약의 아들 이삭을 낳은 사라가 자기가 낳은 이삭의 언약적 위치를 요구하므로서 그 권리를 박탈당해야 하는 처절한 순간에 처한 것이다. 이에 아브라함은 깊은 고민에 빠지게 된다. 이에 대하여 하나님께서는 사라의 손을 들어주셨다. 왜냐하면 사라의 요구는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에 입각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난감한 지경에 처한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는“사라가 이른 말을 다 들으라”고 하시며“이삭에게서 나는 자라야 네 씨라 부를 것이다”라고 하셨다. 이것은 아브라함이 낳은 아들이 다 아브라함의 씨가 아니라 언약의 말씀대로 낳은 아들이라야 믿음의 아들이라는 말씀이다.

 

이에 대하여 바울은“아브라함에게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여종에게서 하나는 자유있는 여자에게서 났다”라고 하였고 다시“여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있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다”라고 말하였다.(갈 4:22-26)

 

여기서 바울은 우리의 시선을‘종’에게서 낳은‘육체의 아들’과‘자유’한 여인이 낳은‘약속의 아들’에 초점을 맞춘다. 바울은 다시 두 비유를 들어 우리의 위치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 하나는 시내산으로부터 종을 낳은 자니 곧 하갈이라 이 하갈은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산으로서 지금 있는 예루살렘과 같은 곳이니 그가 그 자녀들과 더불어 종노릇하고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다”(갈 4:24-26)

 

바울은 이 비유를 통하여 당시 율법에 매여 종교 활동에 빠진 사람들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교회를 대조시키며 다시 말하기를“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고 말하였다.

 

자유자와 종의 의미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해 보자.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그가 친히 이 땅에 오셔서 인간의 원죄를 십자가의 제물로 청산하시고 친히 그들의 머리가 되시어 영으로 그를 믿는 자들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정하셨다. 그러나 그 당시 아직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 못하고 율법에 매여서 종교 활동에 빠져 있던 하나님을 믿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들을 핍박하였다.

 

이삭의 돌잔치에서 이삭을 회롱한 아브라함의 또다른 아들 이스마엘이 행한 것처럼 말이다. 바울은 이 말씀을 이끌어 내어“그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자를 박해한 것 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갈 4:29)라고 당시의 상황을 설명하였다.

 

이것이 지금 우리 믿는 자 안에서 다시 어떻게 적용되어야 할 것인지는 실로 다시 한번 생각하고 음미해 볼 일이다. 바울은 성령에 의지하여 장차 주의 날에 받을 우리의 기업을 바라보며“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여종과 그 아들을 내어 쫓으라 여종의 아들이 자유있는 여자의 아들과 더불어 유업을 얻지 못하리라”(갈 4:30)고 선언하였다.

 

여기서 바울이 자유있는 여자의 자손이라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 모든 유대인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는 그리스도인을 가리키는 것이다. 성경은 이 문제를 통하여 하나님 말씀과 믿음의 영적 관계를 우리에게 제공하며 다시 믿음의 세계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사마리아 여인과 주님의 대화를 통하여 율법적 행위의 예배에서 영적 예배로 패러다임되어야 할 것을 가르친다. 따라서 우리의 예배는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와의 온전한 교제를 위한 말씀과의 만남과 삶 속에서의 말씀의 실현을 요구하고 있다.

 

우리는 본문에서 자신의 말씀을 스스로 지키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된다. 이스마엘과 함께 사라에게서 쫓겨난 하갈은 바란 광야에서 길을 잃고 헤맨다. 아마 하갈은 그 아들과 함께 자기의 고국 애굽으로 돌아가려 했을 것이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그들이 돌아갈 곳까지 충분한 먹을 것과 물을 주었을 것이다.

 

 여기서 하갈이 길을 잃었다는 것은 애굽으로 돌아가는 길을 중단하고 자신의 길을 인도할 하나님 앞에 의지하기를 시사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미리 말씀하신 것을 스스로 지키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무더운 중동 광야에서 길을 잃고 먹을 것이 떨어진 하갈은 이스마엘과 함께 죽음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죽음을 앞둔 모자(母子)가 화살이 닿을 거리를 사이에 두고 죽음 앞에서 통곡을 하고 있었다. 이때 하갈에게 나타나셨던 하나님의 사자가 이스마엘의 울음 소리를 듣고 나타난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특이한 것은 먼저 하갈에게 나타난 사자는“여호와의 사자”였으나 오늘 나타난 사자는“하나님의 사자”이다. 물론 이 두 분은 궁극적으로 같은 분이실 것이다.

 

그러나“야훼 하나님”은 그의 백성과의 구속적인 언약관계의 하나님의 이름이고(the becoming one),“하나님의 사자”라는 이름은 전능하신 창조주요 우주 만물과 모든 인간을 섭리하시는 총체적인 하나님을 의미로써 이스마엘이 언약의 백성이 아님을 시사하고 있다.

이로써 하갈은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을 중단하고 오늘날 시나이 반도에 해당하는 바란 일대에 장막을 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