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강해/창세기 강해

(창세기21장-1)기막힌 웃음과 영원한 웃음

이요나 2007. 2. 16. 13:49

(창세기21장-1)기막힌 웃음과 영원한 웃음

 

(창21:5-6)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낳을 때에 백 세라 사라가 가로되 하나님이 나로 웃게 하시니 듣는 자가 다 나와 함께 웃으리로다

 

정한 시기

드디어 100살의 아브라함이 아들을 낳았다. 고향을 떠난 지 25년, 그동안 넘은 산이 얼마이며 건너온 강이 얼마였었는가? 우리는 이러한 것을 가리켜 천신만고(千辛萬苦)라고 한다. 오늘의 본문 서두에는 보는 이로 감격할 만한 말로 장식하고 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사라를 돌보셨고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사라에게 행하셨으므로 사라가 임신하고 하나님이 말씀하신 시기가 되어 노년의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낳으니 이 짧은 글 속에서는“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가 3번이나 나온다.

 

이 말씀을 분석하면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돌보시고”“행하시고”“정한 시기”로 연결되고 있다. 특히 여기서 주목할 구절은“정한 때”이다. 요한복음을 쓴 사도 요한도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하심이 “때”를 따라 이루어지고 있음을 강조하였다. 솔로몬 전도자는“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 만사가 다 때가 있나니”라고 말하고 있다.(전 3:1)

 

우리가 한 인생을 살면서“때”맞추지 못하여 얼마나 낭패를 많이 보게 되는가? 최근에 전 세계적 추세 속에서 주식에 열기가 높아지면서 많은 사람들이 주식 투자에 열을 올리고 있다. 나는 주식에 대하여는 문외한이지만 주식 투자는 하루 하루 급변하는 정세에 밝아야 하고 사회 전반의 전체적 흐름을 잘 파악하지 않으면 뜬구름 잡는 식이 되버릴 수밖에 없을 것이라 생각된다.

 

나는 옛날부터 “때”를 잘 맞추지 못하여 많은 실패를 맛보며 살아왔다. 내가 어떤 일을 할 때에는 남이 한 일을 뒤쫓아가는 경우는 없었다. 언제든지 현 시대보다 앞서 있어서 사람들이 아직 그것을 인식하지 못했기 때문에 대중성을 이루지 못해 흥행에서는 늘 분투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갈보리채플 사역만 해도 마찬가지다.

 

내가 7년 만에 한국에 들어왔을 때 일본의 경제 불황과 달리 한국은 모든 면에서 호황을 누리고 있었다. 교회는 10년 간 성장 정체 추세에 있었지만 그래도 한국교회는 여전히 축복을 누리며 교회들은 현실 유지를 지향하고 있었다. 그러한 때에 나는 오직“성경 말씀으로”를 외치며 교회의 문호 개방과 강해설교 운동을 부르짖었다.

 

왜냐하면 미국 생활을 정리하고 복음의 불모지 일본에 갓 돌아온 히라노 코오이찌 목사가 개척한 동경 호라이즌 채플이 개척하여 3년 만에 300명이라는 큰 성공을 이룩하였기 때문이었다.

 

영혼육의 커뮤니케이션

히라노 코오이찌 목사로부터 2년 동안의 강해 설교와 산뜻한 교회 성장 아이디어를 전수 받은 나는 이것만이 정체되고 있는 한국 교회들을 개혁시킬 수 있다는 판단아래 내 모든 정열을 쏟아 부었었다. 그런데 이것은 결국 계란으로 바위를 친 격이 되고 말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조선말기에 개화를 부르짖던 신진 세력과 다를 것이 없다고나 할까? 유대교 뿌리 속에서 복음을 전파하던 제자들의 영적 고통을 피부로 몸소 체험하였다.

 

나는 일본인과 한국인의 문화적, 정신 연령의 격차를 포착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교회만을 놓고 볼 때 한국은 일본보다 수적으로 월등히 앞서 있다. 그렇다고 이것은 한국이 일본보다 복음의 총체적 인지도가 높다고 할 수는 없다.

 

복음은 교회의 숫자를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복음이 인간의 삶 속에 어떻게 나타나 있느냐가 중요하다. 교회 숫자만을 놓고 볼 때 선진국 유럽의 어느 나라도 우리나라를 앞서지 못한다. 그러나 유럽은 이미 그들의 삶의 바탕에 하나님이 임재하고 계시다. 즉 하나님의 이름이 문화, 예술, 역사 그리고 사회, 정치, 경제 전반부에 깔려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일본도 예외는 아니다. 일본은 우리보다 100년을 앞서 문호를 개방하였고 서양문물과 함께 복음이 왕실과 상류층의 삶 가운데 녹아 내려 국민생활 전체로 파급되었었다.

 

이 서양 문화는 고대 바벨론 왕국, 헬라 시대와 로마 시대를 거쳐 유럽 문명이 토착화되는 과정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축복이 바탕이었다. 이러한 관점에서 불 때 우리나라는 미국보다 200년, 일본보다 100년의 격차를 갖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것은 어려서부터 서양 문물 속에서 성장된 사람과 40대에 서양 문화를 받아 삶에 적용하는 사람과의 총체적 차이와도 같다고 하겠다.

 

현재 우리나라의 대형 교회의 양대 산맥은 유럽과 미국에서 공부를 마치고 들어 온 인테리급 목회자와 부흥사측 순수 토박이 목회자로 분류할 수 있다. 그리고 나머지는 한국내의 교단 신학을 한 목회자들이다. 현재 상황 속에서 두 양대 산맥의 세력 균형을 볼 때 이 시대의 흐름은 서양 세력을 선호하고 있는 실정이다.

 

최근‘민들레 영토’라든가‘아름다운 땅’이라는 크리스천 카페 문화가 한창 뿌리를 내리고 있지만 그 시작에 있어서는 갈보리채플의 카페‘AlRock AlRock’(알록알록)이 앞서 있었다. 나는 최근에 와서야 이러한 비전이 성취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때를 맞추어야 함을 절실히 느끼고 있다.

 

한국에서의 갈보리채플의 예수 운동을 부르짖으며 새로운 음악과 교회문화 그리고 예배의 갱신과 오직 성령 안에서의 말씀 운동이라는 새로운 교회 문화가 정착되기 위해서는 그러한 문화를 소화해 낼 국가적 문명의 바탕이 먼저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을 깨닫는데 7년이 걸렸다. 이 깨달음은 창세기를 연구하면서 터득한 것 같다.“밤으로부터 시작되는 하루 그리고 영·혼·육의 커뮤니케이션 그리고 균형…” 이러한 것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처럼 앞서 달리기를 좋아하던 내가 모든 시간을 내려놓고 내 앞에 다가오는 것을 바라보며 오늘의 일을 하기 시작하면서 나는 하나님의 시간을 발견한 것이다.

 

하나님의 시간

본문 속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는 전지하신 그의 아심을 따라서 그의 뜻대로 정하신 때를 만들어 가신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는 시간과 공간의 창조자로서 영원한 시간을 다루시며 그의 기쁘신 뜻을 따라 그의 사역자들을 온전하게 만들어 가시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것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자기의 생각과 시대적인 충동에 의하여 조급히 무엇을 이루려 앞서 나가다가 결국은 실패를 하고 만다. 하나님께서 99세 때 사라에게 자식을 주겠다고 했을 때 아브라함과 사라는 기가 막혀서 웃고 말았다. 그런데 지금은 그의 말씀대로 그의 정하신 날에 아들 이삭을 낳고 웃고 있는 것이 아닌가? 첫 번째의 웃음은“기가 막힌 웃음”이요, 두 번째의 웃음은 하나님이 주신“영원한 웃음”이다.

 

우리말에 늙은이 말을 잘 들으면 자다가도 떡을 얻어먹는다는 말이 있다. 오랜 인생의 삶 속에서 경륜을 터득한 노인의 말도 그러하거늘 영원부터 영원까지 다스리시며 창조해 나가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 일까보냐? 아무려면 적은 지식과 좁은 견문과 알량한 생각을 갖고 한치 앞도 보지 못하는 나 일까보냐?

 

더군다나 그의 사역을 위하여 창세 전에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의 지혜를 앞서서 우리가 그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우리는 이쯤에서 우리가 붙잡고 전전긍긍하는 인간의 시간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지식과 지혜의 시간으로 들어가야 할 것이다. 성경은 이에 대하여 이미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간 자는 하나님이 모든 일을 쉬심과 같이 쉰다고 기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