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강해/창세기 강해

(창세기21장-3)여자는 일단 예쁘고 볼 일이야!

이요나 2007. 2. 16. 13:44

(창세기21장-3)여자는 일단 예쁘고 볼 일이야!

 

(창21:22-23) 때에 아비멜렉과 그 군대장관 비골이 아브라함에게 말하여 가로되 네가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이 너와 함께 계시도다 그런즉 너는 나와 내 아들과 내 손자에게 거짓되이 행치 않기를 이제 여기서 하나님을 가리켜 내게 맹세하라 내가 네게 후대한 대로 너도 나와 너의 머무는 이 땅에 행할 것이니라

 

격변하는 환경과 여인의 미모

20장과 22장 사이를 살펴보면 아브라함의 주거 환경이 몇 번 바뀐 것을 알 수 있는데 20장의 사건으로 보아 아브라함과 사라는 이삭을 임신 중에 블레셋의 영토에 들어온 것이 틀림없다. 그리고 본문 속에서 아브라함은 블레셋의 왕 아비멜렉과 언약을 세우고“그곳을 브엘세바라고 칭하고 블레셋 사람의 땅에서 여러 날을 보냈더라”는 기록으로 보아 아브라함은 사라의 해산을 위하여 헤브론의 마므레 상수리나무가 있는 장막으로 옮겼을 것이다.(창 14:18,18:1)

그리고 아브라함은 아들 이삭과 함께 그의 종들을 이끌고 브엘세바에 와서 거주하였다.(창 22:19) 이처럼 짧은 인생 여정 속에 주거를 여러 번 옮긴 사연은 잘 알 수 없지만 이삭이 구약속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이라고 생각할 때 예수께서 수태로부터 출생에 이르기까지의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여러 곳으로 옮기신 것을 생각할 때 아브라함과 사라도 성령의 인도하심 속에 격변하는 세상 정세에 대응하였을 것이 틀림없다.

 

하마터면 블레셋의 왕 아비멜렉의 후궁 신세가 되었을지도 모를 사라는 택한 자를 지키시며 언약을 지키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은 천 개까지 받고 수치를 벗어난다. 여기서‘네 수치를 풀게 하였다’라는 말은‘네 눈의 가리개’라는 의미로서 어쩌면 네 얼굴이 너무 예쁘니 이것으로 베일을 사서 사람들로 그 얼굴을 보지 못하게 하라’는 의미인지도 모른다.

 

여자의 미모는 예나 지금이나 때때로 화근을 불러일으키는 제일 조건이기도 하고 화를 복으로 바꾸는 무기이기도 하다. 모압 여인으로 과부가 되어 후일 보아스의 처가 되어 예수님의 족보에까지 오른 룻의 미모와 다윗왕의 정실이 된 우리야의 처 밧세바의 경우도 그렇고 또 멍청한 사람 나발의 처로서 다윗의 처가 된 아비가일를 보아도 이 여인들은 모두 미모의 여인으로 화를 당하고 또 그 화가 변하여 복을 받은 여인들이다.

 

세상인심과 약속

아브라함이 블레셋의 영토에서 사는 동안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많은 복을 주셨다. 졸지에 아브라함과 동서가 될 뻔한 아비멜렉은 하나님으로부터 아브라함이 선지자임을 예고받고 아브라함의 기도로 하나님의 징계에서 풀려났다.

 

그후 아비멜렉은 아브라함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고 그에 대한 두려움을 느끼기 시작하여 자기의 아들들과 그 후손들의 안위를 위하여 불가침조약을 맺기를 청하게 된다. 쫓아 버리자니 하나님이 두렵고 그냥 두자니 후환이 두렵고 그래서 아비멜렉 왕은 그의 군대 장관 비골을 앞세우고 아브라함에게 자손들의 안위를 보장하는 서약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여주기를 청원하기에 이른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택한 자의 삶 가운데 역사하셔서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그가 하나님의 종임을 보이시고 그들로 하나님의 이름을 경외하도록 하신다. 이에 아브라함은 쾌히 승낙을 하며 이왕에 이러한 일이 있을 때에 이방 가운데에서의 자기의 위치를 확고하게 다지기 시작했다.

 

그 지역은 사막 지역으로 식수를 확보하는 것이 주거 환경의 첫 번째 조건이었다. 그래서 아브라함도 식수의 확보를 위하여 우물을 팠었는데 그 지역 블레셋 사람들에게 늘 빼앗겨야 하는 고통을 받았던 모양이다. 예나 지금이나 텃새라는 것은 어쩔 수 없는가 보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그들과 일체 다투지 않고 하나님께서 신원하여 줄 것을 믿고 묵묵히 때를 기다려 왔었다. 오늘의 이 문제는 세상을 사는 그리스도인들이 배워야 할 하나님의 지혜이기도 하다. 오늘날 우리나라는 선교 대국으로 많은 선교사들을 세계 각국에 파송하고 있다.

 

나의 경우는 동경 호라이즌채플의 선교사로서 한국에 갈보리채플 개척을 위하여 파송된 특수한 경우지만 해외 파송 선교사의 경우 오늘의 본문은 귀감으로 삼아야 할 중요한 말씀이라고 생각한다.

 

일본에 있었을 때의 일이다. 내가 처음 일본에 당도했을 때만해도 한국 교회는 일본에서 명성을 날리고 있었다. 특히 오순절교단 순복음교회의 교세는 일본 전역에서 활기차게 확장되고 있었다. 순복음교회의 조용기 목사님은 일본 최대 복음 전도집회인 동경 쿠루세드에 15년 동안을 주강사로 초청되어 왔었다.

 

영생하는 하나님의 이름

그후 일본 순복음의 핵심지였던 동경 순복음교회의 분열을 기점으로 일본의 교회들은 서서히 순복음식 부흥원리에서 등을 돌리기 시작하였다. 나중에 일본의 중견 목사로부터 들은 이야기지만 일본 교회 지도자들이 조 용기 목사님의 성령운동에 동참을 약정하면서 일본 내에서는 순복음 계열 한인교회를 개척하지 않기로 약속하였다고 한다.

 

그 후 일본 오순절 교단의 선두가 되어 일본 전역에서 성령운동을 위한 집회들이 활기차게 진행되었고 여의도 순복음교회는 조 용기 목사님의 명성과 함께 성령 충만한 교회의 모델이 되었다. 그러나 그 후 동경 순복음교회를 선두로 일본 전국 대도시마다 한인교회가 개척되면서 일본 교회들은 서서히 등을 돌리게 되었다는 후문이다.(이 이야기는 일본인 중견목사의 한국교회 초청 집회에서 교계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나온 말이다)

 

물론 상술에 약삭빠른 일본인 민족성이 교회 성장 운동에서도 작용하여 순복음식 성령 운동에서 미국 계열의 오순절교단의 신유은사 집회에 눈을 돌린 예가 되었지만 은사 중심의 성령운동으로 교세 확장에 치중하였던 한국 교회의 해외 선교 전략은 다시 점검하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브라함 당시 이방인들은 사람들과 어떠한 언약을 할 때에는 양과 소를 언약의 증표로 주고받았었는데 아비멜렉은 아브라함에게‘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를 요구하였다. 이때 아브라함은 그 약속을 실행함에 있어 이방인의 풍습인 양과 소를 아비멜렉에게 주고 약속의 증표로 암양 새끼를 따로 놓아서 우물의 소유권을 확보하였다.

 

이것은 그가 오랜 세월 동안 이방인의 삶 속에서 터득한 생활 철학이었다. 왜냐하면 하나님과의 약속은 믿음 안에서 설정되는 영적 신뢰이지만 인간과의 약속은 육체적 한계와 환경의 변화 속에 수시로 변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심리를 알았기 때문이다. 중동 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물을 확보하는 일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이 물은 사람들뿐 아니라 가축들의 생명과 관계 있는 것으로서 절대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여기서 숫자‘7’은 하나님의 완전수로서 아비멜렉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를 요구하였으므로 그 언약이 완전해야 함을 증명하는 것이다.

 

또한 암양의 새끼를 준 것은 아비멜렉이 요구한 약속은 자손들을 위한 불가침조약이기 때문에 그 양들이 계속 새끼를 낳아서 양떼를 이룰 것을 전제하듯이 이곳에서 아브라함의 자손들이 번성할 것을 예견하고 그에 대한 언약의 징표를 삼았던 것이다.

 

브엘세바란 일곱 우물이라는 의미도 있고 맹세의 우물이라는 의미도 있다. 또한 여기서 아브라함이 에셀나무를 심고 성경에서 최초로‘영생하는 하나님’즉‘엘 올람’(El Olam)의 이름을 부른 것도 매우 흥미있는 일로서 이방의 빛을 향한 비전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