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강해/창세기 강해

(창세기 22장-3)딜레마에 빠진 그 순간을 음미하라!

이요나 2007. 2. 16. 13:33

(창세기 22장-3)딜레마에 빠진 그 순간을 음미하라!

 

(창22:9-14) 하나님이 그에게 지시하신 곳에 이른지라 이에 아브라함이 그 곳에 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 놓고 그 아들 이삭을 결박하여 단 나무 위에 놓고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그 아들을 잡으려 하더니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그를 불러 가라사대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시는지라 아브라함이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매 사자가 가라사대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아무 일도 그에게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살펴본즉 한 숫양이 뒤에 있는데 뿔이 수풀에 걸렸는지라 아브라함이 가서 그 숫양을 가져다가 아들을 대신하여 번제로 드렸더라 아브라함이 그 땅 이름을 여호와이레라 하였으므로 오늘까지 사람들이 이르기를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 하더라

 

유식과 무식의 차이

우리는 앞에서 사랑과 예배의 본질과 시작에 대하여 배웠다. 우리가 어떤 일을 할 때 알고 하는 것과 모르고 하는 것 중 어느 쪽이 정확하겠는가? 우리가 초등학교에서부터 대학교 과정까지 오랜 세월 동안 학문을 끊임없이 연구하는 일도 모두 우리 삶을 풍요롭게 하기 위한 이론들을 터득하기 위해서이다. 이론은 실제적 적용을 전제로 하며 최고 권위자에 의하여 확증된다. 따라서 우리가 오랜 세월 배운 학문은 자신이 소속된 조직의 최고 권위자에게 인정받고 그 능력을 발휘하여 자신의 위치를 확보하게 된다.

 

또한 우리가 터득한 지식의 체계는 다른 분류의 지식들과 더불어 수평적 공통 분모를 이루어야 한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지식 체계는 연결 고리 속의 축적된 지식이 함께 합리적 토대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기록된 내용의 지식의 축적 과정만을 생각한다면 성경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성경의 저자는 인간이 아닌 하나님 자신이 쓰신 것이기 때문에 그의 도우심 없이는 한 발짝도 더 나아갈 수 없다.

 

최근 교육방송을 타고 김용옥이라는 철학자가 매스컴의 인기가 높아지자 목소리의 톤을 한 단계 높여 무식(無識)이라는 단어를 남발하는 모양이다. 그러나 무식과 유식의 범위가 무한대 속에 있음을 감안할 때 그가 말하는 무식의 범위가 어느 기준 점을 가지고 말하는 것인지 가늠할 수 없다. 그러나 그의 외침이 오늘날 한국의 기독교인들을 향한 일침이라면 나는 차라리 할말을 잃어버리고 싶다.

 

그의 말이 틀린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아는 성경은 김용옥 씨가 배운 것처럼 학문의 체계를 통하여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만약 성경을 학문을 터득하듯 하여 깨달을 수 있다면 기도도 물론 신적 존재, 즉 성령의 인도하심도 필요 없다.

 

수학 공식처럼 배우고 외우고 자기 나름대로 체계화하여 정리만 잘하면 그의 노력에 따라서 최고의 권위자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성경의 주체는 유일하신 야훼 하나님이시다. 오직 그의 지식은 그 분만이 알 수 있고 또한 오직 그가 알게 하신 자만이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감히 김용옥 교수에게 말하기를 성경에 대하여 만큼은 이제 더 이상 무식한 말씀 좀 그만하였으면 좋겠다.

 

이사야 선지자로부터 600여 년 전에 예고된 세례 요한은 주님을 보는 순간“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라고 외쳤다. 사실 예수님과 세례 요한은 친척으로 동시대의 동년배이다. 그들은 어린 시절을 함께 뒹굴며 지냈을 법하다. 그러나 세례 요한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세례를 주라는 하나님의 명령이 떨어진 후 예수께서 자기 앞에 나오기까지 목수의 아들 예수가 그리스도인지를 몰랐다.

 

그는 이를 증거하여“나로 물로 세례를 주는 것은 그를 이스라엘에게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요 1:31)고 하였고 다시“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를 보내어 물로 세례를 베풀라 하신 그이가 나에게 말씀하시되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는 이인 줄 알라 하셨기에 내가 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언하였노라”(요 1:31-33)고 하였다. 이처럼 하나님의 계획은 그의 택한 자에 의하여 그의 때에 그의 성령에 의하여 스스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우리는 본문 속에서 번제 할 나무를 사랑하는 아들의 등에 지우고 묵묵히 하나님이 지시한 산으로 오르는 아브라함의 모습을 본다. 여기서 아브라함은 자기들과 함께 왔던 종들에게“우리는 가서 경배 드리고 다시 올 것이다”라고 하였다. 여기서“다시 올”라는 말은 복수 동사로써‘나와 아들 이삭은 돌아올 것이다’라는 뜻이다. 그리고 묵묵히 모리아 산을 오르는 이삭의 모습에서 우리는 십자가를 지고 갈보리 언덕을 오르는 주님을 만나게 된다.

 

하나님이 준비하심

이삭은 자기가 무엇을 할 것인지 또한 경배의 목적을 모르고 있다. 다만 하나님의 산을 오르는 것은 순전히 아버지 아브라함의 뜻을 따른 것이다. 이삭은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다음과 같이 물었다.“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 할 어린양은 어디에 있나이까?”이에 아브라함은“내 아들아 번제 할 어린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고 대답한다. 참으로 기기 막힌 순간이다.

 

억장이 무너지는 순간이다. 백살의 죽은 몸에서 낳은 독자가 아닌가? 그 아들을 하나님께 번제로 드리기 위하여 묵묵히 하나님의 산에 오르는 아브라함의 심경을 생각해 보자. 삶의 소망과 생명의 피가 한 순간에 땅으로 쏟아져 내리는 죽음의 시간이다. 아브라함은 3일간 죽음의 길을 아들과 함께 걸어야했다.

 

이러한 아브라함의 믿음이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 이에 대하여 히브리서 기자는“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그는 약속을 받은 자로되 그 외아들을 드렸느니라 그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그가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히 11:17-19)고 증거하고 있다.

 

이러한 결단은 하나님을 얼마나 믿을 수 있느냐에 따라서 결정되며 이것은 또한 미리 약속의 말씀을 하신 분이 어떠한 능력의 소유자인 것을 능히 알아야만 행할 수 있는 것이다. 이와같이 아브라함은 오랜 믿음 생활 속에서 하나님은 자기가 하신 약속은 스스로 지키시는 분이심을 터득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시험도 모든 것을 아시고 능히 그 시험을 이기게 하실 수 있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이다. 성경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능히 감당할만한 시험을 우리에게 주시며 감당하지 못할 때에는 피할 길을 주신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모리아 산은 지금의 예루살렘 지역이다. 아브라함은 이곳에서 48km정도 떨어진 브엘세바에 살고 있었다. 보통 성인들이 16km를 걸을 수 있다고 가정할 때 이 거리는 3일 길이었다. 바울 사도는 그의 사랑하는 성도들을 향하여“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사…”(고전 15:3-4)라고 말하였는데 이때는 아직 신약 성경이 쓰여지고 있던 시대라 할 때 바울이 말하는‘성경대로’라는 말은 어디를 가리키는 것인가?

 

나의 생각으로는 이것은 바로 창세기 22장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지금 아브라함과 이삭은 살아있는 죽음의 세계를 경험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아브라함은 깊은 딜레마 속에서 미리 자기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네 아들 이삭의 씨를 통하여 기업을 이으시겠다’라는 말씀을 음미하고 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아직 이삭은 혼전으로 그의 씨를 얻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오늘 본문 속의‘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준비하신다’라는 번역은 좀 우회적인 번역이다.

 

이것의 바른 해석은‘하나님이 자기 자신을 준비하신다’(God will provide himself)이다. 이 말은 아브라함을 통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을 미리 예언한 것으로서‘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어린양의 제물이 되신다’라는 의미이다.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성취로 증명되었다.

 

아브라함의 딜레마

우리는 온전한 그리스도의 순종을 목격한다. 성경에서 우리는 이삭의 나이가 30세 전후라고 추측한다. 그리고 아버지 아브라함은 130살 정도의 노인이다. 힘으로 따지면 이삭이 앞 설 나이이다. 이삭은 충분히 그 아버지의 결박에 항거하여 그 자리를 박차고 일어설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삭은 말 한마디 없이 순종하였다. 그렇다면 이삭도 아브라함과 같이“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것”이라는 온전한 믿음이 있었던 것인가? 그러나 성경은“순종이 제사 보다 낫다”라고 말하고 있다.

 

이와 같이 예수님께서도 십자가의 고난을 바라보며 오직 아버지의 뜻에 자신을 맡기셨다. 성경은 예수님의 그 때의 고통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내 아버지여 만약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마 26:29) 십자가를 피할 수 있는 그의 능력에 대하여는 그를 잡으러 온 대제사장의 종의 귀를 베어버린 베드로에게“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영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 아느냐”(마 26:53)라고 하신 말씀 속에서 발견된다.

 

주께서는“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않겠느냐”(요 18:11)라고 말씀하심으로 이 일이 하나님의 뜻임을 말씀하셨다. 그리고 묵묵히 간구하여“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서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소서”(요 17:5)라고 하셨다. 이 말씀은“내가 이 때를 위하여 왔나이다”라는 애통하는 고백으로 끝을 맺으신다.

13절의“여호와 이레”라는 말씀은 역시 예언의 말씀임이 틀림없다. 첫 번째 하나님의 속제 제물은 하나님께서 친히 준비하신다는 의미였고, 두 번째는‘여호와의 산에서 이루어진다’라는 의미이다.

 

여호와의 산은 다름 아닌 수천 년 동안 수많은 제사들이 하나님 앞에 올려졌던 모리아 산으로 다윗이 돈을 주고 산 여부스 사람 오르난의 타작마당으로서 여호와의 사자가 가리킨 곳이다. 후일 이곳은 솔로몬에 의하여 성전이 세워졌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물로 드렸던 곳에 천년 후에 솔로몬에 의하여 성전이 세워지고 그리고 다시 천 년 후에 바로 그 자리에서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예수님께서 처형당하신 그 언덕이 골고다 언덕이라고 불린 유래를 살펴보자. 모리아 산은 성전이 세워진 곳에서부터 경사를 이루면서 정상으로 이어지게 되는데 솔로몬은 이곳에 성전을 짓고 성벽을 쌓고 다른 부속 건물들을 많이 지었다.

 

그때 그 성 북쪽 지역에 넓고 커다란 바위가 있었는데 이 바위는 엄청나게 크고 평평하여서 성전의 벽돌을 다듬기에 안성맞춤이었다. 그래서 그곳에서 석공들이 돌을 쪼개고 다듬었는데 후일 헤롯이 성전을 지을 때에도 이곳은 같은 목적으로 이용되었었다.

 

이렇게 많은 벽돌들을 만들게 되자 그 바위는 패여 해골모양으로 보이게 되어서 사람들은 이곳을 히브리어로‘골고다’즉‘해골’이라고 불렀다.‘골고다’라는 말을 라틴어로 번역하면‘갈보리’라는 뜻이다. 바로 주께서 처형당하신 골고다 그 언덕이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물로 드리던 모리아 산의 정상인 것이다. 이로써 아브라함의 믿음의 시험은 끝나고 기업을 이을 자 이삭의 시대가 예고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