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강해/창세기 강해

(창세기 20장-1)왕에게 헌팅 된 아흔 살 유부녀

이요나 2007. 2. 16. 13:56

(창세기 20장-1)왕에게 헌팅 된 아흔 살 유부녀

 

(창20:1-3) 아브라함이 거기서 남방으로 이사하여 가데스와 술 사이 그랄에 우거하며 그 아내 사라를 자기 누이라 하였으므로 그랄 왕 아비멜렉이 보내어 사라를 취하였더니 그 밤에 하나님이 아비멜렉에게 현몽하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취한 이 여인을 인하여 네가 죽으리니 그가 남의 아내임이라

 

사랑이라는 것

이 말씀은 하나님의 사람들을 이해하기에 중요한 자료가 되는 부분이다. 많은 사람들이 크리스천은 죄를 짓지 말아야 하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 그 말은 궁극적으로 맞는 말이다. 그리스도인은 이미 그 죄에 대하여 해결을 받은 사람들이다. 따라서 죄와 무관한 삶을 살아야 할 사람들이다.

 

바울은 이에 대하여 너희는 누룩없는 하얀 가루였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죄가 완전히 없어졌다는 말과는 다른 의미이다.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이러한 우리의 주장과 설명이 이상히 들리겠지만 이해를 위하여 다시 한번 거론할까 한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싫든 좋든 인간의 조상 아담에게서 비롯된 죄의 속성을 갖고 태어났다. 이것은 선택의 여지가 없이 되어버린 창조주의 소관이다. 또한 최초의 인간 아담이 하나님께서 세우신 언약을 파괴함으로 빚어진 것이다. 그러나 공평하신 하나님께서는 선택의 여지조차 없이 죄의 후손으로 태어난 사람들을 위하여 또 다른 길을 예비하셨다.

 

그것은 다름 아닌 죄의 구속자이신 그의 아들 예수인 것이었다. 이를 위하여 예수는 죄의 인간의 모습으로 오셔서 모든 인간의 죄를 위하여 하나님과의 화목 제물이 되셨다. 이 생명의 제물을 받으신 하나님께서는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들을 죄 없다고 하셨고 그들을 모두 의인으로 인정하셨다.

 

그러나 이것으로 인간의 죄의 속성이 완전히 없어진 것은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의가 그를 믿는 자들에게 전가되어 죄 없음으로 인정받은 것이다. 인간의 죄의 속성은 우리가 육의 몸에서 벗어나 새로운 것으로 덧입을 때 완전히 벗어나는 것이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과 믿는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 앞에서의 차이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즉“죄인이다”“의인이다”하는 엄청난 판결이 붙어버린 것이다. 이와 같이 예수를 믿는 자들은 태어남으로의 죄로부터 삶 가운데 알고 지었든 모르고 지었든 모든 죄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인내하신 앞날의 죄까지 모두 해결된 것이다. 따라서 일단 죄의 용서를 받고 하나님 앞의 새로운 사람에게는 죄를 떠난 의로운 사람으로서의 인생을 살아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죄를 짓는 그리스도인이 세상 사람들의 지탄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그러면 인간은 태어남으로부터 갖고 있는 원죄의 속성을 이기고 의인의 삶을 살 수 있는 것일까? 그에 대한 성경의 대답은“인간은 불가능하다”이다. 이것이 바울의 로마서의 주제다. 크리스천도 죄의 속성이 몸 안에 있는 이상 그 죄로부터 완전해질 수는 없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이다.

 

그러면 죄에 대한 방법은 전혀 없는 것인가? 이를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 그의 이름으로 성령을 선물로 주셨다. 인간으로는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루셨다.

 

아담의 범죄로 모든 인간이 죄인이 되었듯이 그리스도의 피 흘림으로 그에 속한 모든 사람이 의인이 된 것이다. 아담의 죄가 죄 없는 모든 사람에게 임하였듯이 그리스도의 거룩한 의가 그의 이름을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전가되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하나님의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여서 그의 능력으로 죄의 속성을 벗어나는 것이다.

 

우리 몸 속에 있는 죄의 속성은 세상의 물질 세계와 연대하여 우리를 유혹하고 주장하려 하듯이 우리 안에 계신 거룩하신 영이신 “성령”께서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를 깨우쳐 그의 거룩함에 거하게 하신다.

 

하나님의 능력의 말씀은 우리의 골수를 쪼개고 능히 세상의 죄를 이기고 그 유혹에서 벗어나게 한다. 따라서 그의 말씀 안에서 역사하는 하나님의 성령의 능력에 힘입어 살아갈 때 인간은 죄의 속성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은 육신에 거하기 때문에 세상의 신이 지배하는 물질 세계에서 온전한 삶을 누린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이러한 것은 성령의 충만함으로 사도의 직무를 다 했던 베드로와 바울의 실수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베드로는 사도 중의 머리임에도 불구하고, 또한 주로부터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안에서 믿음으로 하나임을 환상과 주의 말씀으로 깨우침을 받고서도 이방 교회의 형제들과 음식을 먹는 것을 유대의 지도자들에게 들키게 되자 자리를 떠나는 차별의식을 버리지 못했었다. 또한 바울도 바나바와 선교여행을 나서면서 마가의 일로 다투며 갈라섰던 일들은 인간의 성정이 그대로 남아있는 모습들이다.

 

배짱이었나, 개버릇이었나

많은 사람들이 교회 지도자들을 주목하고 있다. 특히 성도의 입장에서는 자기 지도자들의 모습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설교의 말씀으로 은혜를 받다가도 그의 삶 속에서 나타나는 언행들로 인하여 상처를 받고 실족하기 일쑤다. 이에 대하여 성경은 주의 제자들에게 실족하는 자들에게 화가 임할 것이라고 엄중히 경계하였다.

 

주께서 그의 제자들에게“너희는 세상의 등불이니 등경을 켜서 등경 위에 두어 그 집으로 들어오는 사람들로 보게 하기 위함”(눅 8:16)이라고 하셨다. 결국 그리스도인이 이렇게 되어야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데 이것은 인간의 힘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말씀에 의지하여 성령의 충만하심 속에서 살아갈 때 그 말씀 안에서 역사하시는 성령의 능력으로 성취할 수 있다.

 

본문 말씀도 이러한 관점에서 살펴보아야 한다. 내가 성경 속에서 좋아하는 내용들은 성경의 솔직성이다. 아브라함이든 모세이든 다윗이든 바울이든 그들의 잘못과 죄상이 낱낱이 기록되어 있다. 사람들은 자기의 비행이나 과거가 밝혀지는 것을 매우 두려워한다. 그러나 지금의 시대는 그러한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이제 세상은 솔직하고 맑고 깨끗한 투명한 삶을 요구하고 있다. 특히 지도자의 입장에 있는 사람들은 모든 분야를 떠나서 죄의 문제에 인정을 받지 못하는 이상 그는 그 자리를 지켜 나갈 수 없게 될 것이다.

 

우리는 왜 아브라함이 애굽 변방 네게브 지역을 지나 무역과 상업의 중심지이며 블레셋(Palestine)의 수도인 그랄까지 갔는지 알 수 없다. 기근이 나서 그곳으로 옮겼는지 아니면 어떠한 사건이 발생하였는지 알 수 없다.

 

그러나 우리가 아는 것은 그는 헤브론 일대의 거대한 족장으로 남부럽지 않은 지도자였다는 것이다. 우리가 한가지 추측할 수 있는 것은 지금이나 옛날이나 성령의 인도함을 받은 사람들의 삶은 늘 새로운 것을 향한 끊임없는 도전적 삶이라는 것이다. 더군다나 아브라함은 매우 호기심이 많고 충동적인 사람이었다.

 

그래서 하나님의 비전을 본 순간 그는 망설임 없이 일가 친척을 떠나 가나안으로 왔었다. 따라서 아브라함이 자기의 가솔을 이끌고 블레셋의 수도 그랄로 나온 것은 자신을 이방의 빛으로 삼으시겠다는 하나님의 비전의 성취에 대한 그의 꿈과도 무관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최근 많은 사람들의 상담 중 60%가 비전에 관한 것이다.

 

그런데 그들은 하나님의 뜻을 따를 생각은 하지 않고 자기 위치에서 눌러 앉고자 하는 욕심들로 가득 차 있다. 이것은 나도 경험한 바로서 만약 내가 하나님께서 갈보리채플로 부르실 때 따라 나오지 않았다면 지금 어떠한 상태에 처했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사람들은 좋은 주거 환경을 꿈꾸며 최고의 행복을 추구하면서도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으라는 말씀에는 뒷전이다.

 

이에 대하여 성경은“묵은 술을 먹고 새 술이 좋다고 할 사람이 없다”라고 기록하였다. 이것은 순종이 아니라 불순종이며 이로서 믿는 자의 삶 속에 환란이 일어나는 것이다. 그리고 그 환란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결국은 정해진 길로 나아가게 되는 것이다. 어쨌든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은 변하지 않는다.

 

90세의 절세가인

우리는 참으로 한심한 일을 리메이크하는 아브라함과 사라의 모습을 보게 되는데 과거 애굽에서 써먹던 것을 또 우려먹고 있는 것이다. 인간은 세상살이의 문제가 생기면 늘 자기의 지혜로 해결하려는 속성이 있다.

 

아브라함이 25년 동안 산전수전을 겪으면서 얻은 결론은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함이 없다는 것일 것이다. 어쩌면 이 사건은 믿음이 없었던 애굽에서도 하나님께서 지켜 주셨으니 하나님의 말씀대로 애까지 임신한 상태인데 이것은 당연히 하나님께서 나서 주실 것이라는 배짱이었는지도 모른다.

 

이 일을 아브라함과 사라가 공모하여 과감히 행한 것을 보면 그러한 우리의 해석도 배제할 수 없다. 그러나 그렇다면 더욱 나쁜 짓이다. 차라리 두 사람이 손잡고 하나님의 방법을 요구했어야 할 것이다.

 

또한 이 때의 사라의 나이가 90살이었는데 사람들 앞에 그처럼 아름다워 보였다는 것도 특이하다. 참으로 절세 가인이었나 보다. 90세에 왕으로부터 헌팅 당할 정도의 미인은 인류의 역사상 오직 한 여인 사라 뿐일 것이다.

 

창세기 18장에서 사라는 이미 폐경된 여인이었다. 폐경이 되었다면 여자로서는 볼 장 다 본 여자인데 왕에게 헌팅을 당하다니 놀랄 일이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이삭을 낳게 하기 위여 회춘(回春)을 시키셨을 것이다. 따라서 아브라함도 정기가 살아나고 사라도 다시 여자의 생리가 시작되었을 것이지만 이미 늘어진 피부까지 다시 꽃다운 나이로 돌아갔을 리는 만무하다. 이것은 나중에 우리가 아브라함을 만나는 날 사라에게 들을 수밖에 없는 성경 밖의 비밀이다. 아∼ 아름다운 90세의 사라여! 당신은 영원한 공주였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