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강해/창세기 강해

(창세기19장-4) 말씀없는 믿음의 결과

이요나 2007. 2. 17. 10:22

(창세기19장-4) 말씀없는 믿음의 결과 

 

(창19:31-33)큰 딸이 작은 딸에게 이르되 우리 아버지는 늙으셨고 이 땅에는 세상의 도리를 좇아 우리의 배필될 사람 이 없으니 우리가 우리 아버지에게 술을 마시우고 동침하여 우리 아버지로 말미암아 인종을 전하자 하고 그 밤에 그들이 아비에게 술을 마시우고 큰 딸이 들어가서 아비와 동침하니라 그러나 그 아비는 그 딸의 눕고 일어나는 것을 깨닫지 못하였더라

 

담배 이야기

본문 속에서 의인이라 칭하는 롯의 가족 안에 태동된 타락의 모습을 보게 된다. 이러한 악의 태동은 처음부터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갓 태어난 어린아이의 천진난만한 얼굴을 보라. 그리고 현재 세상의 삶 속에 처한 나의 모습을 보라. 목사라 하는 내 가슴을 열어 보아도 아직도 시커멓게 눌러 붙어 있는 악의 그림자들이 소리를 지르고 있지 아니한가?

 

이것은 왼손잡이가 그 습관을 고치는 것만큼이나 심각하다. 언젠가 한 젊은이가 담배의 고통을 하소연해 왔다. 누구나 대수롭지 않게 멋으로 시작한 담배가 이제는 원수가 되었단다. 담배와의 전쟁은 사실 장난이 아니다.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나는 중학교 3학년 때 이미 담배를 손에 들고 살아야 했다. 어려서부터 배앓이가 있었는데 그럴 때마다 한 모금씩 빨려준 담배가 그만 중독이 된 것이다. 학교에서 정학처분은 물론 퇴학직전에 간신히 구원받은 일도 있었다. 고등학교 때부터는 내 방안에서만큼은 공식적으로 허용이 된 상태였다. 그리고 대학에 들어가면서 시 나부랭이를 씁네 하고 몰려다닐 때에는 골초가 되어서 하루 평균 3갑을 피워댔다.

 

지금 생각만 해도 내가 폐암에 걸리지 않고 이렇게 건재한 것인지 참으로 신기하다. 신학교를 다니면서도 담배만큼은 어쩔 수 없었다. 금식기도원에 가서도 밥은 굶으면서도 담배를 놓지 못해서 울고 내려 왔던 일도 여러 번 있다.

 

죽을힘을 다해서 견디면 이틀이었다. 일본에 건너가서도 신학원을 다니면서도 어쩔 수 없었다. 큰 교회의 선교 회장으로 봉사하며 월 한번씩 대 예배의 대표 기도를 하는 집사가 담배라니? (참으로 능지처참할 놈이다. 하나님이 벼락을 안 내리고 살려두신 것이 신기하다)

 

그처럼 찐드기 같이 따라붙던 담배를 끊게 된 것은 내가 목사가 되기 불과 1년 전 일이다. (아유! 창피해라!) 신학원 2학년 때 동경 호라이즌채플의 히라노 코오이찌 목사를 만나 그의 설교 테이프를 통하여 말씀을 듣기 시작하면서 담배는 견딜 수 없는 고통거리였다. 그러한 고통 속에서도 담배를 놓지 못하던 어느 날 생각지도 않던 주의 음성이 들려왔다. 침대에 등을 받치고 앉아서 성경을 보고 있을 때였다.

 

저녁 무렵부터 담배를 피우고 싶은 것을 참고 있었던 참이었다. 그러나 성경을 보면서도 머리 한쪽에서는 담배가 피고 싶다는 생각이 떠나지 않고 있었다. 사실 나의 입에는 불만 붙이지 않았지 저녁 무렵부터 들고 있던 담배가 물려 있었다. 저녁 먹은 것이 얹혀서 내려가지 않는 것 같아서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지경이었다.‘이만큼 참았으면 많이 참은 거야’하는 위안을 하며 라이터를 켜서 부치는 순간 치익 소리를 내며 불꽃이 눈썹을 향해 솟아올랐다.

 

저녁 내내 라이터를 주물럭거리는 바람에 조정스위치를 건드렸는가 보다. 놀래서 침대 밑으로 굴러 떨어지면서 어디선가 벼락같은 소리가 머리통을 치고 갔다.“얘야! 나라는 존재는 너에게 있어 담배만도 못하냐? 난 너의 태어남으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이처럼 너를 소중히 여겨 왔는데 너는 성경을 보면서도 담배를 쥐고 있어야 할 정도로 내가 너에게 있어 그렇게 의미없는 존재였단 말이냐? 네 고통을 잊게 하는데 있어 나라는 존재는 담배보다도 못한 존재였구나!”번개처럼 머리를 때리고 지나가는 이 소리는 지구가 떠나가는 소리만큼이나 크게 들렸다. 그 순간 내 머리의 어느 한 부분이 날아가는 것만 같음을 느꼈다. 그후 나는 21일 금식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3일 보식(補食)을 한 후 다시 7일 금식을 하였고 또 3일 보식 후 다시 3일 금식을 했다.

 

말씀과의 독대

이번의 금식은 순복음식(?) 금식이 아니라 집에서 조용한 가운데 말씀과 독대(獨對)하면서 갖는 금식이었다. 형식도 없고 어떠한 의식도 필요 없었다. 무릎을 꿇고 기도할 일도 없었고 큰 소리로 통성으로 기도할 일도 없었다. 잔잔한 복음 성가가 흐르는 가운데 나는 묵묵히 앉아서 히라노 코오이찌 목사의 강해 설교를 하루 종일 들을 뿐이었다. 45분짜리 설교 테이프를 하루에 10개 이상 들었다.

 

그리고 일본어 성경 카셋트를 따라 들으며 창세기부터 정독하기 시작했다. 전화는 부재를 알리는 녹음 상태로 놓고 집안에는 라면은 물론 커피와 설탕 봉지 하나 없도록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다. 은행카드와 돈은 미리 조카딸에게 맡겨 놓고 집안에는 식수밖에 없었다. 이번 금식은 3일이 제일 힘들었다.

 

그리고 7일째와 14일째에 다가오는 유혹은 각기 달랐다. 그리고 21일 되던 마지막 날은 배고픔의 유혹이 아니라 40일 금식으로 연장하고픈 교만함이었다. 나는 이 교만의 유혹을 물리치기 위하여 조카딸에게 맛있는 죽을 냄새를 풍기면서 끓이도록 일러두었었다. 그때부터 나는 주님과 독대(獨對)하는 시간을 갖게 되었는데 주님은 묵묵히 말씀 삼매경에 빠져 있는 나를 방해하지 않고 그만한 자리에서 나를 편안한 눈으로 지켜보고 계셨다. 그때부터 나는 혼자 방안을 서성이며 중얼거리는 버릇이 생겼다.

 

누가 보면 꼭 누구하고 말하는 사람 같기도 하고 대본 연습을 하는 연기자 같다고나 할까? 때로는 죽은 듯이 앉아서 탄식의 침묵 속에서 서너 시간을 보내기도 하였는데 이 때는 나 자신도 어쩔 수 없었다. 그러나 그 눌림과 고통의 시간은 내 생활 중에 가장 중요하고 소망하는 행복의 시간이었다. 지금도 이 시간은 하루도 빠지지 않고 진행되는데 이 시간에는 희한하게도 전화 한 통 없다. 그 시간이 지나면 많은 것으로 아파하고 많은 것으로 충동되었던 나의 마음이 다시 잔잔한 물결 위에 서게 된다.

 

당신의 소금기둥은 없는가?

당시 소돔 성으로 추측되는 사해 서남부에는 벨 우스둠(Jebel Usdum, 소돔 산이라 뜻하는 아랍어)이라 칭하는 높이 7백 피트, 길이 5마일의 큰 소금 산이 있다. 이 산은 지질학자들에 의하여 그 지역의 바닷물에 의하여 축적된 것이 아니라 어떤 커다란 재난의 발생으로 큰 화산이 폭발하여 땅속에 쌓여 있던 소금들이 솟구쳐 비처럼 내려 쌓인 것이라고 결론지었다.(이 지역은 거대한 단층지대로서 대홍수 이후 대륙의 융기되는 동안 끊임없이 일어났던 지진지대였다)

 

또한 롯의 아내가 소금기둥이 되었다는 것은 돌아보는 순간 신체적인 변화를 일으킨 것이 아니라 쏟아져 내리는 소금비에 묻혀 버린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지금도 그 지역에 가보면 사람 모양의 기둥들이 있는데 사람들은 이것을 롯의 아내라고 부른다고 한다. 성경에“하늘로부터 내린 유황과 불”이란 기록은 지진 폭발로 솟구쳤다 떨어지는 불타는 가스와 황산일 것으로 구약에서“하나님의 불”에 해당하는 단어가 신약에서“유황”을 의미하는 단어 “테이온”이 같이 사용된 것 또한 흥미롭다. 따라서 이러한 기록들을 볼 때 성경 속에 일어난 천재(天災)적 사건들 속에서도 사람에게 논리적 이해와 사고를 갖도록 자연을 운행하시는 창조자의 합리적인 방법을 볼 수 있다.

 

오늘날 모압과 암몬 자손이 거하는 지역은 요르단이다. 요르단의 수도는“암만”으로 암몬에서 나온 말이다. 따라서 아랍민족은 이스마엘과 모압과 암몬을 중심으로 하는 민족들이다. 모두 아브라함과 혈연관계를 갖은 민족들로서 성경 속에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철천지원수가 되어 싸우고 있다.

 

흡사 이것은 기독교 각 교파간에 다투는 것과도 비슷하다. 주께서 12제자들에게“너희가 서로 사랑하는 것으로 사람들이 너희를 내 제자라 하리라”고 하신 말씀은 상당히 의미있는 말씀이다. 우리가 창세기 19장 소돔 성의 멸망 사건에서 꼭 기억해야 할 것은 왜 의인이 세상의 심판에 함께 고통을 받아야 하는가 이다.

 

우리의 초점은 멸망받을 소돔성에 왜 롯이 거하고 있었는가에 있다. 그리고 롯은 하나님을 섬기는 의인으로서 왜 소돔성에서 계속 살고 있었어야 했는가를 생각해야 한다. 이 문제의 발단은 그가 소돔을 향하여 장막을 치면서부터 기인된 것이다.

 

세상의 매력을 바라본 순간 그 마음 속에서 싹튼 악의 뿌리는 그 세상의 악으로 말미암아 고통을 당하면서도 롯에게 그곳을 벗어 던지지 못하도록 얽어매어 버리고 만 것이다. 예수께서 헤롯의 누룩을 조심하라고 하신 말씀도 이러한 의미이다.

 

에스겔 선지자는 소돔의 죄에 대하여 말하기를 먹을 것이 많고 시간이 남아서 게을러졌다고 하였다. 지금 우리나라의 사정을 보아도 마찬가지이다. 새마을운동을 일으키며 잘살아 보겠다고 땀흘려 일할 때에는 이처럼 세상이 악하지 않았었다. 그러나 먹을 것이 풍족해지자 일손을 멈추고 소위 문화이니 예술이니 하는 것에 관심을 쏟게 되고 그것은 결국 육신의 향락을 추구하는 행위를 태동하게 된다.

 

그리스도인의 환경

지금 우리의 가정 환경을 살펴보자. 아이들과 함께 살아가는 가정 한 복판까지 들어와 자리잡고 있는 음란물들…. 어른들은 성인이 되어서 보아도 된다 하고 틀어 놓은 성인 비디오나 텔레비전 연속극들이 이제는 이불 속에서 아이들과 함께 바라보며 낄낄대는 안방극장이 되어 버렸다. 만약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당신의 자녀가 잘못된 길로 나가 있다면 그 책임은 전적으로 부모인 당신들에게 있다.

 

만약 당신의 가정에 사람들에게 사악한 생각을 주는 요소가 없고 하나님의 말씀과 찬송과 아름다운 삶으로 가득 찬 가정 속에서 성장하였다면 절대로 당신의 자녀는 잘못될 일이 없다. 그것은 이삭의 성장을 통해서 알 수 있다. 본문 속에서 롯이 왜 삼촌 아브라함의 집으로 가지 않았는가 의심스럽다.

 

아브라함이 살던 곳은 헤브론 아래의 브엘세바로 소돔과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다. 또한 롯의 딸들은 롯의 가르침으로 그 음행의 소돔성의 생활 속에서도 처녀의 순결을 지켜 왔지만 그들의 지식은 열악하여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는 어떠한 수단도 좋다는 잘못된 분별력과 신앙관을 가지고 있었다.

 

우선 그들의 잘못은 아버지 롯 외에는 이 땅에 의로운 사람이 없고 자신들은 의로운 씨를 전해야 하는 사명이 있다는 잘못된 생각에서 근친상간이라는 어처구니없는 범죄를 저지르고 만다. 이것은 우리 한국교회 성도들이 자기 교회의 교리가 최고라고 자만하며 다른 것을 들으려 하지 않는 교만함과도 같다.

 

그만큼 풍부하지 못한 깨달음 없는 지식의 판단으로 '세상은 모두 악이다, 썩었다, 이것도 하면 안 된다, 저것도 위험하다, 너희는 내가 주는 것만 먹어야지 잘못하면 이단에 걸린다'는 식으로 성도를 가르칠 때 그 성도들은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지식을 터득하지 못하여 신앙의 균형을 잃고 남을 정죄하고 자신의 교만함에 빠져버리게 되는 것이다.

 

 

오늘 롯의 두 딸은 흡사 열악한 성경적 지식 속에서 세상의 모든 악한 것을 익혀온 온실 속의 성도들의 모습이다. 그래서 이들이 어쩌다 이단에게 물리면 죽을지 살지 모르고 달려가게 되는 것이다. 이제 세상은 모름지기 지식의 시대가 되었다.

 

이제 우리가 하나님의 지식을 바르게 얻고자 한다면 주께서는 우리의 눈과 가슴을 열고 마음속으로 들어와 우리를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실 것이다. 이제 멸망의 세계를 앞둔 우리 의인들은 좀더 큰 눈을 뜨고 세상을 직시하고 우리의 영혼의 문제를 생각해 볼 때다. 그러기 위해서는 올바른 성경적인 지식 속에서 그 가르침을 따라 아름다운 가정 환경을 유지하며 성령의 보호하심을 받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