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강해/창세기 강해

(창세기20장-2)그 사람 건드리지마 다쳐!

이요나 2007. 2. 16. 13:53

(창세기20장-2)그 사람 건드리지마 다쳐!

 

(창20:7-8)이제 그 사람의 아내를 돌려보내라 그는 선지자라 그가 너를 위하여 기도하리니 네가 살려니와 네가 돌려 보내지 아니하면 너와 네게 속한 자가 다 정녕 죽을 줄 알지니라 아비멜렉이 그 아침에 일찌기 일어나 모든 신복을 불러 그 모든 일을 말하여 들려주니 그 사람들이 심히 두려워하였더라

 

음행은 하나님께 범죄

아비멜렉이라는 이름은 애굽의 바로왕의 이름과 같이 한 개인의 이름이 아니라 블레셋 왕국의 왕을 가리키는‘내 아버지는 왕이다’라는 의미의 이름이다. 흥미로운 것은 하나님께서 택한 백성이 아닌 이방인의 꿈에 나타나신 것이다. 이러한 일은 다니엘서에도 나타나는데 이스라엘을 포로로 이끌고 간 바벨론의 느브갓네살 왕에게도 나타나셨고 후일 이스라엘 민족을 풀어준 고레스 왕이나 다리오 왕을 감동시켜 유대인으로 하나님의 성전을 다시 짓게도 하셨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이 땅의 모든 사람을 다스리신다. 또한 이러한 일은 모두 그리스도의 날의 구속사적인 입장에서 보아야한다.

 

본문에서 놀라운 대화를 발견하는데“의로운 백성도 멸하시냐”라는 아비멜렉의 질문이다. 물론 여기서 의롭다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같이 택한 백성들이라는 의미는 아니지만 하나님 앞에‘의롭다’는 말을 쓸 정도라면 그는 하나님을 아는 사람이었음이 틀림없다.

 

오늘 하나님과 논쟁을 하는 아비멜렉은 참으로 당당하고 그 의제에 있어 일목요연하다.“그가 나에게 내 누이라 하였잖아요? 그 여자도 자기 오라비라 하였고요. 나는 내 양심에 한치도 부끄러움이 없어요”이 말은 자기의 행위는 간음이 아니라는 말이다. 이에 대하여 하나님께서도“네가 온전한 마음으로 이렇게 한 줄 알기에 너로‘내게 범죄’하지 않게 하였다”라고 하셨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하신“내게 범죄”라는 단어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와 유사한 사건이 또 성경속에 나타나 있기 때문이다. 이 문제는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중요한 이슈를 제공한다. 또한 우리는 남의 처를 범하는 죄가“하나님께의 죄”라는 부분을 상기해야 한다. 다윗은 시편 51편 3-4절에서“무릇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라고 자기의 죄를 고백하였다.

 

이 시는 다윗이 우리야의 처 밧세바를 범하고 선지자 나단이 그에게 왔을 때 고백한 것이다. 이에 대하여 나단 선지자를 통한 하나님의 판결은“당신은 남의 아내를 가로채고 우리야를 죽게 하였으니 당신에게 태어날 자식은 죽게 될 것이다”이다.(삼하 12:9-14) 이 말씀을 정리하면 남의 아내를 범하는 것은“하나님에게의 죄”이며 그 죄값은 태어날 아이의 죽음인 것이다.

 

본문에서의 하나님의 메시지도 동일한 맥락이다. 즉 아비멜렉이 사라를 취한 일에 대하여는 어쩌면 일국의 왕으로서 정당방위일지는 모르나(왕으로서 후궁을 여럿 두는 것은 죄가 아니었다) 남의 아내를 취한 아비멜렉의 범죄로 하여 그의 처는 물론 모든 집안의 여인들의 태(胎)를 닫았다는 것이다. 아마 사라가 왕실에 들어가 신부로서 결혼식을 기다리는 동안 궁궐 안에 만삭의 여인들이 해산을 하지 못하고 지옥을 헤매고 있었던 모양이다.

 

이 글을 보면서 이조 오백 년 왕실비화를 생각해 보니 수많은 후궁을 거느리고도 정궁의 자손이 궁하여 권력 싸움이 끊이지 않았던 일들을 생각할 때 이 법칙은 모든 인류에게 적용되는 하나님의 거룩한 형상인 인간 창조의 사역에 관한 준령인지도 모른다.

 

이방인에게 당하는 망신

바울은 이것을 신약에서 멋있게 적용한다. 종말을 바라보는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곧 음란을 버리고 각각 거룩함과 존귀함으로‘자기의 아내를 취할 줄 알고’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과 같이 색욕을 따르지 말고 이 일에 분수를 넘어서‘형제를 해하지 말라’이는 우리가 너희에게 미리 말하고 증언한 것과 같이 이 모든 일에‘주께서 신원’하여 주심이라”(살전 4:3-6)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말은“자기의 아내를 취하고”“이 일에 분수를 넘어서 형제를 해하지 말라”“주께서 신원하여 주심”이라는 내용이다.‘신원’이라는 것은 그 일을 꼭 하나님께서 갚으신다는 의미이다.

 

최근 크리스천들의 이성관계에 대한 상담 중 교회 사역자들과의 관계를 호소해 오는 자매들이 꽤 많다. 그 중에는 이미 결혼한 사역자들이 중·고생을 범한 사례도 있다. 이쯤 되면 이곳은 교회가 아니라 범죄의 소굴이다. 더군다나 이러한 관계 속에 있는 자매나 형제들이 거의 청년 예배의 중요 파트를 맡고 있다는데 더욱 심각하다. 이들의 고백에 따르면 이러한 사고는 청소년 수련회나 교회 특별집회 중에 일어나고 있다. 또한 이러한 사고는 사역자의 유혹으로 아주 쉽게 이루어지고 있다. 이처럼 이 시대는 자녀들을 청소년 집회에도 마음놓고 보내지 못하는 현실이 되었다.

 

본문 속에서 이방인에게 질책을 당하는 하나님의 사람을 보게 된다. 얼마 전 우리 칼럼 가에서도 신학적 논쟁으로 언사가 거칠어지자 법정 고발까지 제기하겠다는 사건이 생겨서 보는 이로 하여금 얼굴을 찌푸리게 하였다.

 

바울은 교회 중의 이러한 일에 대하여 너희 중에 이것을 해결할 만한 지혜가 없어서 세상 사람의 판결을 받아야 하느냐고 책망하였다. 이유가 어디에 있든지 간에 성도들간에 법정 시비 운운된 것은 내 목회 일생에 잊혀지지 않을 소금 기둥일 것이다. 누구의 잘 잘못을 떠나서 나는 이 일로 인하여 주께로부터 커다란 경책을 당하였다.

 

아브라함이 누구인가? 모든 이방의 빛으로 삼으신 믿음의 조상이 아닌가? 그런데 세상을 두려워하는 그의 태도로 빚어진 형벌은 하나님의 이름이 세상 가운데서 비방을 당하게 하고 있다. 그러나 이 일에서도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책망치 않으시고 그를 구하셨다. 이것이 택한 자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다. 오히려 택한 자를 지키시어 이 범죄의 도구가 된 아비멜렉의 가정을 징계하심으로 하나님의 기름 부은 자가 있음을 알게 하셨다.

 

도로아미타불

이에 대하여 다윗은“주께서 이르시기를 나의 기름 부은 자를 손대지 말며 나의 선지자들을 해하지 말라 하셨도다”(시 105:15)라고 노래하였다. 이 말씀은 지금부터 7년 전 일본에서 7년의 억류를 청산하고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세미한 음성으로 내게 다가왔었다. 그 당시 나는 일본 여행 중 운영 중인 클럽 내의 사고로 돌아올 수 없는 입장에 처해있었다. 들어오면 구속을 당해야 할 상황이었다.

 

따라서 나는 10여 년을 경영하던 모든 사업장을 포기하고 일본에 억류된 생활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오히려 내 생각에는 이 기회에 유흥업의 일선에서 손을 떼고 일본에서 팔자 좋게 살아보자 하는 심산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러한 망상은 이태원 유흥업소 집중 단속이라는 정부 차원의 폐쇄 정책에 의하여 10여 년 간 찬란하게 꽃 피웠던 나의 분신들은 모조리 문을 닫게 되고 아파트 두 채를 포함한 모든 부동산은 강제 경매 처분을 당하고 말았다.

 

졸지에 일본에서 오도 가도 못한 미아가 된 채 손도 써 보지 못하고 깔끔하게 대청소가 되었다. 어느 목사의 말처럼 외국에 살다보니 인간의 정 때문에 처리 못할 때 간단하게 처리해주는 법의 깔끔함을 처절하게 맛본 셈이었다. 십억대의 재산이 불과 몇 개월 사이에‘깔끔히’청산된 것이다. 나는 그래서 삶 속에 살아있는 지옥과 삶 속에서 일어나는 지진의 처절함을 이해한다. 그 후 나는 동경의 멋쟁이 거지가 되어서 부평초의 생활을 하게 되었는데 이것은 내 삶을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제2 단계였던 것이다.

 

그리고 7년 간의 동경에서의 삶은 생존을 위한 치열한 영적 전쟁을 경험하였다. 그리고 7년이 되던 해 나는 결국‘이 요나’라는 하나님의 종이 되어 서울로 귀국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귀국이라는 것이 내 의사가 아니고 일본 출입국 관리국으로부터‘당신은 더 이상 일본에 체류해야 할 이유가 없으니 앞으로 30일 내에 출국하라’는 명령이 떨어졌기 때문이었다.

 

더 놀라운 것은 이 일은 사역자로서의 기름 부음이 있은 지 삼일 후의 일이었다. 이제 모름지기 동경 호라이즌채플 부사역자가 되어 일본 선교를 위하여 신나는 짜장면을 만들 참인데 출국 명령서라니 기가 막혀서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그렇다고 목사가 불법 체류를 할 수도 없고 서울로 돌아가자니 아버지의 임종도 못 지킨 불효자가 되어 5년이란 세월을 전전긍긍하며 기소유예기간을 버티어 온 것인데 불과 법정 만기일 5개월을 앞두고 쇠고랑을 차고 형무소로 들어가야만 한다니 절간의 말로 도로아미타불이다. 나는 그 때 내 인생의 죄가 막중하여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치러야 할 죄 값이 남은 것으로 느껴왔다. 그래서 나는 묵묵히 하나님의 뜻을 따르기로 결심하였다. 이것이 7년의 일본생활 속에서 터득한 믿음이었다.

 

'요나'인데,,,,

히라노 목사님께서는 나를 위하여 구민 홀 무대를 빌려서 선교사 파송식을 해 주셨고 성도들은 동경에서의 마지막 저녁상을 신쥬꾸 가장 높은 빌딩의 45층 스카이 라운지에 차려 주었다. 결국 나는 히라노 목사님과 성도들의 기도 속에 귀국 길에 올랐다. 5월 21일 아침 나리다 발 대한항공 첫 비행기를 택하였다.

 

어차피 김포공항에서 경찰의 구속 절차를 받으려면 아침이 좋겠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러나 쇠고랑을 앞에 둔 내 마음은 이상하리 만큼 또 다른 평안의 시간 속에 쌓여 7년 만에 귀국하는 고국 길은 마냥 행복하기만 했다. 그리고 잠시 후 비행기 안 창가 하늘 저편에서는 다가오는 세미한 음성이 있었다.“나의 기름 부은 자를 만지지 말라”이 의미는 김포공항에 와서야 알게 되었다.

 

내 사건은 이미 김영삼 대통령 취임 특사로 얼마 전에 해결되어 있었던 것이었다. 김포공항을 나서면서야 히라노 목사를 통하여 내 이름을‘요나’라고 바꾸신 하나님의 뜻을 화끈하게 체험하며 힘차게 웃어댈 수 있었다. 김포공항 입국 카운터에서의 일이다. 이제 수속을 마치면 형사가 기다리고 있겠지 하며 심사대 앞에 초조히 서있는 나에게 “꽤 오랜만에 귀국하셨군요”라고 말하며 패스포드를 심사대 위로 밀어주는 심사원의 눈초리는“용케도 오랫동안 잘 피해 있었구만”하는 듯한 말로 들려왔다.

 

어정쩡한 분위기를 넘기려는 듯이 무심코 한마디 던져버린 얼어붙은 말이 입 밖으로 튀어 나왔는데….“나 요나…인데요”이 말은 나는 희진 이라는 사람인데 그냥 나가도 되느냐고 물은 것인데 일본에서 요나 라는 이름이 입에 붙어서“나 요나인데...”해 버린 것이다. 나의 어정쩡한 태도에 의아하다는 듯이 짜증 섞인 투로“왜 안나가세요?”라고 말할 때에야 “나 요나 인데… 나 요나 라니까…”하며 어정어정 걸어 나오는 꼴이라니…. 하하하! “나 요나∼”“나 요나” 하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