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19장-1)천사를 맞으라 그가 너를 구하리라!
(창19:1-3) 날이 저물때에 그 두 천사가 소돔에 이르니 마침 롯이 소돔 성문에 앉았다가 그들을 보고 일어나 영접하고 땅에 엎드리어 절하여 가로되 내 주여 돌이켜 종의 집으로 들어와 발을 씻고 주무시고 일찌기 일어나 갈 길을 가소서 그들이 이르되 아니라 우리가 거리에서 경야 하리라 롯이 간청하매 그제서야 돌이켜 그 집으로 돌아오는지라 롯이 그들을 위하여 식탁을 베풀고 무교병을 구우니 그들이 먹으니라 그들의 눕기 전에 그 성 사람 곧 소돔 백성들이 무론 노소하고 사방에서 다 모여 그 집을 에워싸고 롯을 부르고 그에게 이르되 이 저녁에 네게 온 사람이 어디 있느냐 이끌어 내라 우리가 그들을 상관하리라
롯의 처를 생각하라!
본문은 이제 곧 우리 앞에 있을 일들과 연관하여 생각하여야 한다. 예수께서도 오늘의 이 사건을 들어 마지막 시대의 성도들에게 “롯의 처를 생각하라”(눅 17:32)고 경계하셨다. 롯의 처의 문제는 무엇이었던가? 롯의 처는 롯과 두 딸과 함께 천사들의 손에 이끌리어 일단 소돔성에서 탈출에 성공을 했었다.
그러나 주께서 뒤를 돌아보지 말라는 경계를 소홀히 하고 그 마음에서 옛 소돔의 향락을 그리워함으로 말씀대로 소금 기둥이 되어버렸다. 주께서는 또 마지막 때에 대하여 노아의 때와 같고 롯의 때와 같다고 하셨다. 바울도 마지막을 사는 우리를 향하여 이스라엘의 역사는 종말을 사는 우리의 경계로 기록하였다고 강조하였다.
지금의 현실 세계를 생각해 보라. 오늘의 양상이 어떻게 변하고 있는가? 음란의 물결은 이미 아무도 막을 수 없는 지경으로 폭주하여 우리 생활 깊숙이 들어와 앉기 시작하였고 우리를 지켜오던 믿음도 이제 적당주의로 뒤섞여서 믿음의 행위만 남아 있고 믿음의 실체는 없어져 버렸다. 따라서 본문을 앞으로 일어날 일들과 연관하여 생각해 보도록 하였다.
베드로는 종말을 사는 우리를 향하여“무법한 자의 음란한 행실을 인하여 고통하는 의로운 롯을 건지셨으니 주께서 경건한 자는 시험에서 건지시고 불의한 자는 형벌아래 두어 심판 날까지 지키시며”(벧후 2:7)라고 경계하였다. 따라서 아무리 험악한 세상 속에서도 주께서는 의인을 지키실 줄을 나는 믿는다. 우리가 그 의인이라는 관점을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하는데 성경은 이 땅의 사람 중 의인은 없음을 전제로 한다.
오직 한 길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에 참여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안에 있는 자를 하나님께서는 의인이라 여겨 주신다. 그것은 우리의 혈통과 우리의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그의 부르심에 참여한 자들에게 주시는 공평한 하나님의 은혜이다. 여기서 우리는 롯의 행적을 잠깐 살펴보자. 그는 하나님의 소명을 받은 그의 삼촌 아브라함을 따라 가나안으로 들어왔다. 따라서 그는 아브라함으로 인하여 생활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한 자라고 볼 수 있다.
고통받는 의인의 삶
롯은 13장에서 아브라함과 헤어질 때 물질의 소욕에 이끌리어 소돔 지역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14장에서 롯은 소돔 성 시민이 되어 있었다. 그런데 본문 속에는 롯은 소돔 성문 곁에 앉아 있다.
여러분은 소돔 성이 그돌라오멜의 연합군에게 패망하였을 때 롯이 잡혀갔고 이에 아브라함이 구출하여 왔음을 기억할 것이다. 아마 이것으로 롯은 소돔 지역의 특별한 사람으로 인정되어 정치적인 위치에 오르게 되었을 것이다.
그 당시는 성문 앞에서 그 책임자가 그 성 사람들의 문제의 시시비비를 가렸었다. 롯이 저녁 늦은 시간까지 이곳에 앉아 있었던 것으로 보아 저녁 시간에 많은 문제들이 발생한 것 같다. 최근 여자 경찰서장이 탄생되어 미아리 일대의 사창가와 전쟁을 선포하고 출입구 일대에 검문소를 설치하고 미성년자를 봉쇄하고 있는데 이러한 제도적인 법적 조치도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국제 사회 속에서 범죄와의 전쟁에서 성공한 나라가 있는데 바로 싱가포르이다. 그들이 오늘과 같이 국가의 기강을 바로 잡는 데에는 법의 제정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올바른 법을 세우고 위에서부터 그 법을 실천한 데에 있었다.
아브라함을 떠난 천사가 소돔 성에 들어섰을 때 롯은 즉각적인 반응을 하였다. 그는 이방 속으로 찾아온 손님을 접대하기에 지체하지 않았다. 그가 그들을 맞이하며 간청하여 자기 집으로 이끌어 들이려고 했던 데에는 그 소돔성의 관리로서 그곳을 찾아온 손님을 온전히 보호해야 할 의무가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이처럼 즉각적인 반응과 그들로 하여금 소돔성의 밤거리를 지나지 못하게 하려 했던 롯의 행동 속에는 타락된 소돔성의 모습이 감추어져 있음을 엿볼 수 있다.“내 주여 돌이켜 종의 집으로 들어 와”라는 롯의 말로 보아 그 두 사람의 모습 속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발견하였을 것이다. 이 또한 하나님께서 특별한 영안을 열어 계시하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것이다.
소돔 야경을 지켜보려던 두 천사는 롯의 간청에 이끌려 롯의 집으로 들어가 롯의 접대를 받게 되는데 롯의 처가 나타나지 않는 것을 보면 그의 처는 지금 텔레비전 심야 프로를 보고 있든지 테크노를 추러 나갔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롯은 그들에게 식탁을 베풀고 무교병을 내어놓았다. 무교병이라는 빵이 처음 성경에 등장하는데 이것은 우리말로 하면 누룩을 넣지 않고 만든 전병으로 과자와 같은 빵이다. 성경에서 누룩은 죄로 등장한다.
그것은 그 누룩 속에 효소 성분이 들어있어 조금만 넣어도 밀가루 반죽을 부패시켜 전체를 부풀리는 속성에서 나온 것이다. 이처럼 죄의 속성은 아주 작은 것이 번져도 걷잡을 수 없는 상태에 이르게 된다. 또 하나 죄의 속성으로 일컬어지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문둥병이다. 이것은 감각을 잃고 세포가 썩어 죽어버리는데서 동일시된다.
동성애가 만연하는 사회
문제는 이제부터 발단된다. 그 천사들이 자리에 눕기도 전에 그 성의 젊은 사람 늙은 사람 할 것 없이 떼를 지어서 쳐들어 온 것이다. 아마 이들이 소돔성에 들어섰을 때 그들의 아름다움과 준수함에 시세말로 뻑이 갔는가 보다. 그들이 롯의 집을 에워쌌다는 기록으로 보아 온 성이 들고 일어선 것이다. 이들의 목적은 아름다운 두 사람과의 성적 향락을 즐기기 위해서이다. 분명 이 두 사람은 남자들로 현신한 천사들이다.
여기서“우리가 상관하리라”는 말은 동성애의 표현이다. 이에 롯은 문을 닫고 나가서 그들을 설득시키기 시작한다. 아니 설득이 아니고 이것은 타협이다. 그런데 그 타협의 조건이 우리가 납득할 수 없는 선에 이른다. 즉 그들과 동성애를 즐기겠다고 으름장을 놓는 소돔 성 사람들을 그 성의 관리로서 만류하지 못하고 시집가지 않은 두 딸을 내어 줄 터이니 너희 눈에 좋은 대로 하라고 했던 것이다. 참으로 기가 막힐 노릇이다.
이 상황을 생각해 보라. 법이 마비되었고 도덕은 고사하고 인륜이 마비된 사회다. 불과 13∼4년 전 롯이 이곳을 바라볼 때 소돔성은 여호와께서 멸하기 전이였다고 하였다. 그 당시까지는 그들이 악하였어도 하나님의 인내하실 때였으나 이제는 하나님의 인내의 시간이 마감된 순간이다.
이때 이들의 모습은 로마서 1장에서“하나님이 저희를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어버려 두사 저희 몸을 서로 욕되게 하셨다”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하나님에게서 끊어져 나간 사람들의 상태가 얼마나 비참해지는 것인가를 증명하고 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은 어떠한가? 아직 우리의 눈에 보이지 않는 것 같은 이러한 죄악이 우리의 문틈까지 들어와 있다. 문밖만 나가면 우는 사자와 같은 죄악들이 우리의 자녀들을 기다리고 있다. 온 세상이 모두 성적 타락을 향하는 거대한 물결을 우리는 과연 무엇으로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의인을 구하심
자기 집으로 들어온 손님을 보호하기 위한 롯의 방어는 절대적이었다. 이러한 방법밖에 사용할 수 없었던 롯의 상황을 우리는 이해하여야 한다. 이것은 그 지역의 풍습과도 관련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중동 지방에서는 아직도 자기 집에 들어온 사람은 그가 비록 피의 보수를 받을 자기의 원수라 하더라고 그 집에 있는 이상은 손님으로 보호할 의무가 있다.
이것은 전통이며 가문의 명예에 해당하는 것이다. 아직도 베드윈족 사회에서는 이러한 풍습이 철저하게 지켜지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소돔 성 사람들은 롯의 제의를 아랑곳하지 않고“너는 물러나라”고 호통하며“이 놈이 이방인 주제에 우리의 법관 행세를 하려한다”라고 밀치고 들어서려 하였다.
이 때 천사들이 손을 내밀어 롯을 방으로 끌어들이고 문을 닫고 문밖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눈을 어둡게 하여 혼란 속에 빠뜨렸다. 이것과 동일한 사건은 성경에 또 한번 등장하는데 열왕기하 6장을 보면 아람 군대가 이스라엘을 포위하여 두려움에 떨게 되는데 엘리사가 기도하여 그 사환의 눈을 열어 이스라엘을 지키는 하나님의 불 병거를 보게 하고 다시 기도하여 아람 군대의 눈을 어둡게 하여 그들로 서로 치게 하여 패망시킨다.
이것은 사람의 눈을 잠시 장님이 되게 하는 것이라 하겠다. 여기서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사람들의 악의 모습이 어느 상태까지 처해질 수 있는가 와 그러한 패역한 상황 속에서의 의로운 사람의 무력한 모습이다. 그러나 우리가 걱정할 일이 없는 것은 하나님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악으로부터 고통 당하는 의로운 사람들을 구원하신다.
따라서 롯은 종말의 시대에 이방의 죄악 속에서 구원하실 교회의 모형이라고 생각하여야 한다. 이것을 생각할 때 종말의 시대가 얼마나 악해지며 휴거에 들어갈 교회가 얼마나 많지 못함을 짐작할 수 있다. 따라서 교회가 대환란을 통과할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대환란을 통과할 준비를 하는 일부 교회들의 주장도 그들에게는 설득력 있는 말일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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