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강해/창세기 강해

(창세기18장-2)김용옥 교수는 성경을 알 수 없다!

이요나 2007. 2. 17. 10:37

(창세기18장-2)김용옥 교수는 성경을 알 수 없다!

 

성경을 알 수 없다!

노자와 21세기 김용옥 교수는 성경을 얼마나 아는가? 먼저 이 문제는 성경은 누가 가르칠 것인가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이것은 국어 선생이 역사를 배워서 가르치는 것과는 다르다. 왜냐하면 성경은 그의 사람들을 감동시켜서 하나님이신 성령께서 친히 쓰신 것이기 때문에 그의 기름부음이 없으면 성경은 일반적인 이스라엘의 역사와 예수의 전기와 교회사일 뿐 그 깊이를 알 수가 없게 기록된 계시 문서다. 따라서 김 용옥 씨가 성경을 가르치는 것은 공산 당원이 민주주의를 가르치는 것과 같고 어쩌면 승려가 성경 공부를 하는 것과 같으며 루시퍼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과 같다.

 

세상에 오신 이유

본문에서 두 사람의 천사들은 소돔 성을 탐색하러 내려가고 여호와와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사역과 관련하여 서로 의견을 나누고 있다. 이 장면들을 잘 살펴보면 지금 아브라함은 이상 중에서나 꿈속에서 하나님과 그의 천사들을 만나는 것이 아니라 현실 세계에서 그들의 방문을 받고 그들에게 음식을 대접하고 여호와로부터 직접 아들 이삭에 대한 구체적인 약속을 받았다.

 

과연 현실 세계에서 하나님이신 여호와를 사람의 모습으로 만날 수 있는 것일까? 현대를 사는 우리라도 이 문제만큼은 쉽게 납득이 되어지지 않는다. 더욱이 세상은 지식의 팽대함 속에서 현실 속에서의 밝은 미래의 성취를 요구하면서 신적인 감각은 점점 신화적 요소로 바뀌어 갈 것이고 오히려 교회는 세상에서 설득력을 잃고 빛을 잃어갈 것이다. 더군다나 많은 교회 지도자들이 자유주의 신학 사상을 좇아 과거 초대교회 시대를 대적하던 그노시스 사상이 만연되어 나갈 것이다.

 

한국교회의 맥을 이어가던 믿음을 향한 기도생활도 점점 그 설득력을 잃어버리고 현실주의 속의 생존경쟁이란 커다란 굴레에서 헤매게 될 것이다. 벌써 이러한 조짐은 사회 저변에 서서히 확대되고 있다.

 

본문에서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자신의 계획을 나타내심을 볼 수 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종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시며 미리 말씀하시지 않고 일을 행하지 않으신다고 기록하였다. 따라서 성경은 예언의 말씀이다. 지금 우리는 예언의 말씀 속에 살고 있는 것이며 하나님의 계획과 그의 미리 하신 말씀을 따라 성취되어 가는 성경의 과정 속에 살아가고 있다. 먼저 여호와께서는 아브라함이 강대한 나라가 되어 천하 만민들이 그로 인하여 복을 받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여기서 말하는 믿음의 나라는 곧 주께서 오셔서 세우실 하나님의 나라이다. 사실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오신 그리스도는 전 세계에서 커다란 하나님의 나라를 만들었고 그를 믿는 모든 나라를 축복하셨다.

 

우리나라도 이처럼 급성장으로 축복을 받은 것은 하나님의 복음을 받아들인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인간의 노력과 정신적인 사상으로 말하면 우리가 이북을 능가할 수는 없다. 동독과 소련의 붕괴 그리고 중국의 개방 등은 무신론을 주장하고 하나님을 거부하는 나라들의 패망을 증명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경우에는 일본을 들고나서는데 일본이라는 나라는 우리가 복음을 받아들이지도 않았던 200년 전에 명치유신을 일으켜 이미 복음이 땅 끝까지 이르렀었고 그 후 핍박으로 인하여 순교 당한 수많은 피의 행렬이 있었다.

 

택한 자의 목적

여호와께서는 아브라함을 택한 궁극적 목적에 대하여“내가 그로 그 자식과 권속에게 명하여 여호와의 도를 지켜 공의와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고 택하였다”라고 말씀하셨다. 또한 덧붙여서“나 여호와가 아브라함에게 대하여 말한 일을 이루려 함이니라”고 말씀하심으로써 결국 이 일은 아브라함을 통하여 하나님이 이루신다는 의미이다. 많은 사역자들이 이 점에서 사역의 최종적 실패를 하게 된다.

 

결국 하나님이 하신 일에 자신이 영광을 취함으로 버림을 받게 된다. 이것의 시초를 거슬러 올라가면 자기의 위치를 떠난 사단 루시퍼가 존재한다. 하나님은 자기의 영광에 부르신 사람들을 참예 시키신다. 그러나 그의 영광을 사람과 함께 나누시지 않는다. 지금 하나님께서는“여호와의 도”를 말씀하고 계신다.

 

얼마 전부터 교육방송을 통하여 일부 크리스천에게까지 갈채를 받으며 펼쳐지는 김용옥의‘노자와 21세기’와‘금강경’을 살펴보았다. 가끔 그의 강좌를 들으면서 과연 이 사람이 그리스도의 축복 속에 태어나(그의 어머니는 이화 학당 출신으로 부모가 모두 독실한 그리스도인 이었다고 함) 한 때 주의 종이 되겠다고 신학교까지 답습한 사람일까 하는 생각에 두려움이 앞섰다.

 

그의 텔레비전 강의를 편찬한 책을 읽으면서 이러한 생각은 견딜 수 없는 아픔에 빠지게 되었는데 그것은 방송을 들으면서 생겼던 그에 대한 분노가 아니라 그에 대한 하나님의 임박한 진노가 눈앞에 보였기 때문이다.

 

그가 노자의 학문을 연구하고 가르치는데 대하여 우리가 그 학문의 허구성을 탓할 필요는 없다. 학문은 공정한 지식의 체계와 수평적 공감대를 형성하지 않으면 곧 다른 학설에 의하여 거부 내지 지배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김 용옥 씨는 노자의 학문적 도리를 벗어나 노자의 지식을 외도하고 하나님의 말씀 즉 성경을 도전하는 도구로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학문에 대한 모욕으로서 후일 진정한 노자의 학문을 정립할 후예들에 의하여 판단을 받게 될 것이다.

 

그가 과거 기독교 생활 속에서 얼마나 커다란 상처를 받았는가 모르겠지만 그는 하나님을 대적하기 위하여 목숨을 바친 것과 같은 결사적인 태도를 갖고 있다. 이러한 그의 실체를 파악하면서 그를 향한 나의 분노의 시선은 오히려 불쌍한 쪽으로 바뀌었다.

 

그 이유는 아직도 그의 구원을 위하여 하나님 앞에서 간구하고 있는 그의 부모의 모습이 눈에 보이기 때문이다. 이제 하나님의 백성 그리스도의 사람들은 그의 책을 한번 살펴봄으로서 교육방송을 타고 흐르는 김용옥 씨의 강의가 얼마나 심각한 것인지 그 배후에 흐르는 영적 존재를 간파해야 할 것이다.

 

헬레레파들 같으니라고!

최근 국민 정서와 윤리 그리고 국민의 기본권인 종교의 자유를 선도하여야 할 교육방송이 상업적 시장성에 치우쳐 기독교의 경전을 비방하는 김용옥의 노자 강의에 편중을 두는 것은 매우 잘못된 처사라고 생각한다.

 

기독교 단체들은 말 못하는 단군상 건립에는 동상까지 때려부수는 일을 저지르면서도 하나님을 대적하는 거짓 교사의 몰지각한 망언에는 흥미로운 관심까지 갖고 있다. 어쩌면 자기들의 지식이 이를 따르지 못하는 수치감에서 끽 소리조차 못하는지 모른다.

 

그러다가 어린양 하나가 이를 위하여 희생될 즈음이면 이목이 두려워서 기독교 신문을 선두로 눈에 쌍심지를 들고서 나설 것이다. 또한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사이버 광야에 그의 강좌에 편중을 둔 EBS에 조용한 반대 피켓을 들어 오직 하나님을 향하여 외치는 나의 작은 음성에 그리스도인이라 자청하는 사람들이 거센 항의를 해 옴은 참으로 애석한 일이다.

 

비록 내가 커다란 지식을 갖지는 못하였지만 세계가 인정하는 석학(?)이라 할 김용옥의 강좌에 제동을 걸었을 때에는 그리스도께 헌신한 사람으로 진리에 대한 지식도 없이 계란으로 바위를 치겠는가?

 

어떤 지식인이라 자처하는 크리스천은(그가 진정한 그리스도인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으나 이력서에 그렇게 써 있음으로…) 자기의 철학적 학문을 가지고 오히려 나를 비방하며 그의 가르침에 박수를 보내는 사람도 있다. 항의를 하는 사람들의 내용 속에 고대 헬라 철학과 근대 사상과 그리고 문학적 조류와 현대 교회사까지 편람한 것을 보면 최소한 그는 최고 학문 과정을 갖춘 엘리트들로서 개중에는 교회 지도자도 있었다.

 

나는 철학가도 아니고 김용옥 보다 공부도 못했다. 박사 학위도 없는 많이 못 배운 개척교회 목사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나의 지식은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에서 비롯되었고 그의 학문은 인간으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나는 우주 만물의 창조자이시며 운행자의 진리를 토대로 말하고 있고 그는 하나님의 신적 존재를 무시하는 대적자로서 성경을 공박하고 있다. 그는 노자의 학문을 후대‘왕 필’(王弼)이라 한 사람이 주석한 도덕경을 가지고 풀이하고 있는데 그는 그 해석의 범위에서 결국 인간의 한계를 넘지 못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 글 자체가 죄의 속성을 갖고 있는 아담의 후예가 쓴 것이고 또 그 후예들에 의하여 연구되어 정립한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한번 박수를 쳐보시지!

그의 글 속에서도 인간의 한계를 넘지 못하는 노자의 고뇌에 관한 표현들을 종종 발견하는데 김용옥은“도”(道)를 설명함에 있어 노자의 도덕경 제4장에서“상제지선”(象帝之先) 결어(結語)를 해석하기를‘여호와 하나님은 존재일 수가 없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을 하나의 존재로 인식하는 순간 그 존재는 이름을 가진 분별적 존재로 하락한다’라고(노자와 21세기, p.197) 전제하며 한 걸음 더 나아가‘여호와 하나님을 하나의 존재로 파악하는 기독교인들에게, 유대인들에게, 우리의 노자는 가르친다. 그대들의 신을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말한다면, 내가 말하는 도(道)는 여호와 하나님보다 앞선, 그러한 신이라는 이름으로 규정지을 수 없는 그 이전의 무엇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네!(象帝之先)’(노자와 21세기, p.198)

 

이 글을 읽는 크리스천들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래도 일주일에 세번씩 돌아가는 김용옥 강의에 얼이 빠진 채 격찬을 하고 있을 것인가? 그를 찬동하는 사람들에 대하여 나는 뭐라고 말할 자격이 없다, 그들이 하나님의 오묘한 진리를 깨닫지 못하여 미혹 당하는 심령들이기 때문에 속히 그리스도의 진리의 복음을 접하게 되기를 기도할 뿐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천국의 구성원이 된 그리스도의 사람들이 성경의 지식을 외면한 채 하나님을 거부하고 대적하는 무의도식한 글자 풀이에 넋을 잃고 앉았으니 나의 외침은 이러한 무지한 하나님의 백성을 향하여 외치는 광야의 소리인 것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는 경전이다. 물론 성경은 우주 만물 모든 창조의 범주를 포괄하며 피조물을 다스려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낼 하나님의 사람들의 길이요 규범인 것이다.

 

“하나님의 도”에 대하여

“여호와의 도”는 히브리어로“데리크”로서‘길, 도로, 여행, 방법’을 의미하며 이 단어는 동사형“다라크”의 의미가 내재되어 있어 지속적‘습관’내지‘태도’를 포괄한다. 이 말은 또 인간의 삶 속에 은유적으로 표현되어 사람의 활동과 행위로 표현되기도 한다.(시 1:6)“데리크”라는 히브리어는‘곧다’라는 어근으로서“기준”을 내포하며 하나님의 성품이다.(시 145:19)

 

따라서 이 말은 원래 인간으로서는 알 수도 짐작할 수도 없는 하나님의 범주에 속한 것으로서“여호와의 도”란 하나님에 의해서 하나님의 백성에게 주어진 율법의 규례와 계명으로 나타난다.(왕상 2:3)“여호와의 도”는“의”(정의righteousness;공의justice)와“공도”(공의justice; 판결judgment)로 나타나는데“의”를 나타내는 히브리“체타카”는 여성형으로서 윤리적, 도덕적 표준의 어근을 갖고 있다.

 

또한“의”즉“체타카”는 윤리적 측면에서 상호간의 행위와 관련하며, 법률적 측면에서 공평을 전제로 하며, 더 나아가 언약적 측면에서 신과 그 백성간의 신실성을 전제로 한다. 따라서“하나님의 의”는 법적 통치권자로서 자기 백성에 대한 언약을 신실히 이행함으로써 그 언약의 하나님의 관계를 갖는다.

 

또한“공도”(공의justice,판결judgment)는 히브리어로“미쉬파트”인데‘정의, 법령, 판결, 관습과 방법’으로 핵심사상은‘공의' 또는‘정의’이다. 따라서“공도”는 하나님의 속성으로써 하나님의 당연성을 전제한다.

 

또한“공도”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속성이 되어 그 삶 속에 토대가 되어야 한다.(시 106:37, 시 37:30, 잠 12:5, 잠 29:4, 마 6:8) 이제 우리는 더 깊은 하나님의 지식 속으로 들어가 하나님의 말씀을 모독하는 사람들에게 진정한 공의를 전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할 것이다. 바울은 하나님의 진리를 전하는 바울을 대적하는 자들을 향하여 이제 자기에게 그리스도의 흔적이 있음을 선언하였다.